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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67] 좌절과 도전 사이, 전후 프랑스의 아나키즘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67] 좌절과 도전 사이, 전후 프랑스의 아나키즘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11.29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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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아르망
알랭 세르장
클로드 하멜
슈티르너
바쿠닌
다니엘 게랭
CGT는 1895년 창립된 좌파계열의 노동조합으로, 주도자는 생디칼리스트들이었다.
계급투쟁을 통한 혁명적 사회변혁 목표였으며, 이를 위한 방법으로 단체교섭과 총파업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집단이었다.
사진은 아르헨티나의 콜론 극장에서 찍힌 CGT합창단이다. 사진=위키미디어.

생디칼리슴은 유일한 수단이 아니라 아나키를 위한 수단으로만 간주되어야 한다. 공산주의자와 생디칼리스트 날개를 모두 포함하는 프랑스 아나키스트 운동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절정에 달했다. 포레와 개인주의자 E. 아르망(E. Armand)은 여전히 반군사주의자들이었지만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군대에 입대하거나 동맹국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전쟁 후 러시아 혁명의 명백한 성공으로 공산주의자들은 CGT(General Confederation of Labour)에서 입지를 확보했다. 아나키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은 1921년에 분리되어 CGT Unitaire를 결성한 혁명적 그룹을 형성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이듬해에 우위를 점하고 모스크바와 동맹을 맺었다. 아나키스트들은 1923년 베를린에 설립된 생디칼리스트 IVVMA에서 10만 명의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Comiti de Defense Syndicalist Revolutimmaire를 결성하기 위해 떠났다.

그것은 1939년까지 지속되었지만 노동계급 사이에서 큰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생디칼리스트 운동 외부에서, 소수의 노령화된 투사들은 독자가 감소하는 몇 편의 신문에 아나키즘 메시지를 계속 내보냈다. 그들은 프랑스로 망명하기 위해 소련,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에서 온 아나키스트 난민들의 증가에 의해 국제적 연결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독일 점령과 저항의 경험 이후 프랑스 아나키즘은 아나키스트연맹(Anarchist Federation)의 리버테르(Le Libertaire)와 새로운 <흑과 적>(Noir et Rouge) 같은 잡지를 중심으로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약간 부활했다. 알랭 세르장(Alain Sergent)과 클로드 하멜(Claude Harmel)은 1949년에 불완전한 『아나키즘의 역사』(Histoire del'anarchie)를 썼고 장 메트롱(Jean Maitron)은 1951년에 『프랑스 아나키스트 운동의 역사』(Histoire du mouvement anarchiste en France)를 발표했다.

 

학생 그리고 노동자와 만난 아나키즘

서클 A는 프루동의 격언 '아나키는 질서(Anarchy is Order)'라는 것을 나타낸다는 일각의 의견이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리버테리언의 분위기는 카뮈에게 프랑스와 스페인의 아나키스트 및 신디칼리스트와 연대하고 생디칼리스트와 아나키즘의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게 했다. 그는 『반항인』(L'Homme revolt, 1951)에서 슈티르너(Stirner)와 바쿠닌(Bakunin)을 비판했지만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훨씬 더 비판적이었다. 이 작품은 카뮈가 일종의 아나키적 생디컬리즘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나키즘이 실제로 새로운 세대를 장악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였다. 다다와 초현실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소수의 예술가와 지식인이 1957년에 국제상황주의자(Internationale Situationniste)를 설립하여 곧 아나키즘 역사를 재발견하고 소비자 사회와 문화에 대한 아나키즘적 비판을 발전시켰다. 

1964년 프랑스 그룹인 주네스 리베르테르(Jeunesse Libertaire)는 프루동의 슬로건인 '아나키는 질서다'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고 동그라미 A를 만들어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시켰다. 이전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다니엘 게랭(Daniel Guerin)은 아나키적 사회주의를 개발했고 1965년에 『아나키즘: 이론과 행동』(Anarchisme: de la doctrine a l'action)을 발간했다. 

3년 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의 아나키즘적 에너지가 분출된 것은 1968년 5월 학생 반란이었다. 뒤이은 총파업 동안 드골 정권은 흔들렸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학생들은 혁명에서 졌지만 논쟁에서 이겼고, 프랑스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그 이후로 후퇴하였다. 살아난 생디칼리스트 조직인 전국노동연맹(Confederation Nationale du Travail)은 그 후 특히 남서 프랑스와 파리 지역에서 전진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미셸 푸코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동등하게 논쟁적인 권력 비판을 발전시킨 반면, 코넬리우스 카스토아디스(Cornelius Castoriadis, 1922~1997)는 현대 사회와 문화의 미로에서 갈림길에 들어서면서 아나키적 사회주의와 야만의 선택을 제시했다. 

 

반세계화·반자본주의에 가장 앞섰던 아나키즘

카스토리아디스는 원래 트로츠키주의자였으나 1948년에 아나키스트로 옮겨갔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와 기 드보르도 활동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Socialisme ou Barbarie)는 1949년부터 1967년까지 간행되어 프랑스 좌파, 특히 아나키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자율의 철학자’라고 불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우리가 역사의 갈림길, 큰 의미의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길은 적어도 일반적인 방향에서 이미 명확하게 배치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의미 상실의 길, 공허한 형태의 반복, 순응, 무관심, 무책임, 냉소주의의 길이며 동시에 "합리적 지배"의 무제한 확장에 대한 자본주의적 상상을 꽉 쥐는 길이다. 소비를 위한, 다시 말해 헛된 소비를 위한 무한한 확장,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자율화되고 이 자본주의적 상상의 지배에 분명히 관련되어 있는 기술과학의 사이비합리적 유사지배주의이다.
다른 길이 열려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전혀 배제되지 않다. 그것은 사회적, 정치적 각성, 즉 개인과 집단의 자율성, 즉 자유 의지의 프로젝트의 부활을 통해서만 열릴 수 있다. 이것은 상상력과 창의적인 상상의 각성을 요구할 것이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질 들뢰즈(Gilles Deleuze),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 랑시에르,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와 같은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스트 사상가들은 아나키스트 이론을 갱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피노자를 통해 설명하는 사유의 내재성의 명령은 한편으로는 이론과 실천 사이의 불가분성을 확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설적으로 불복종을 명령하는 점에서 아나키즘적이다. 내재적이며 내적 실천에 적합한 사유, 강제할 수 없는 사유를 주장하는 들뢰즈는 스피노자나 니체의 독해와 함께, 현대 아나키즘 운동(그레버)과 아나키즘 전통(슈티르너)을 연결한다. 

조세 보베는 프랑스
조세 보베는 프랑스 농민운동가다. 반세계화 운동으로 명성을 얻었다.
사진=위키미디어.

새로운 세기에 프랑스 아나키스트들은 반자본주의와 반세계화 운동의 최전선에 섰다. 그중 한 사람이 프랑스의 대표적인 농민운동가이자 생디칼리스트이며 반세계화주의자인 조세 보베(José Bové, 1953~)이다. 그는 1976년에 라자크고원에서 양치기 농부들을 쫓아내고  군부대를 확장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는 투쟁에 성공하고 그곳에서 양치기가 되었다. 1987년에는 농민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유기농업운동을 전개하면서 유전자 변형(GMO)에 반대했다. 1995년에는 그린피스 등과 함께 아나키즘 조직인 ‘대안리버테러’(Alternative Libertaire)에 참여했다. 보베가 국내외의 주목을 받은 사건은 1999년 맥도날드 프랜차이즈 건설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한 탓으로 3개월 징역형에 처해진 것이었다. 이어 그는 여러 차례 반세계화운동에 참여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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