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길 교수(왼쪽) © |
지난달 말, 정년퇴임한 교수는 총 3백14명. 퇴임 후 교수들은 인생 제2기를 맡고 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퇴임 후에도 공부를 業으로 삼을 계획이다.
달팽이 관련 논문만 70편을 내 달팽이 박사로 유명한 권오길 前 강원대 교수(동물학)는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는 만큼, 퇴임 후에도 연구와 강의는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달팽이 연구를 계속 하는 것은 물론 시간에 쫓겨 못 쓴 글들을 정리, 발표할 계획이다. 또 시간강사로 변신, 춘천교대, 상지대 등에서 학생들을 만난다.
김형효 前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철학윤리학)는 퇴임과는 무관하게 7세기에 살았던 원효를 21세기의 인물로 조명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김 교수는 “해체주의는 20세기 말 등장한 사상인데도 7세기의 원효가 해체주의적 사고를 했다는 것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라며 “해체주의는 인류의 여명기부터 늘 있어왔고, 시대마다 표현을 달리 해왔던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의 원효사상은 올해 말, 발간될 계획이다. 그의 철학 연구는 실존주의에서 시작해 현상학, 구조주의 등 서양철학을 두루 연구하다 한국철학을 통과, 해체주의·노장·불교철학으로 귀착했다.
황의각 前 고려대 교수(경제학)는 퇴임을 앞두고 지난 한 달간을 꼬박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보냈다. 6·25 전쟁 이후와 다를 바 없는 황폐한 아프가니스탄의 경제 상황에 대해 경제 자문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서다. 아프가니스탄 경제부의 요청으로 경제 복구 대안을 제시하고 강의를 하는 빠듯한 일정을 보낸 황 교수는 “내가 한 공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공부한 사람의 도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옥스퍼드대 출판부에서 발간한 ‘남북한 경제비교’로 북한 경제 연구의 시초를 일군 황 교수는 앞으로 통일 후 경제격차를 줄일 수 있는 대안들을 모색할 계획이다.
이밖에도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교수들이 적지 않다. 김정배 前 고려대 교수(한국사)는 지난해 3월 출범한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으로 재임하며 연구뿐만 아니라 고구려 연구의 기틀을 잡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정성진 국민대 前 교수(법학)는 지난해 3월 국민대 총장직에서 물러난 뒤 9월부터 국가청렴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윗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형효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황의각 전 서울대 교수, 김기찬 전 경북대 교수, 윤이흠 전 서울대 교수, 김종은 전 경희대 교수, 이상백 전 건국대 교수, 노재성 전 충남대 교수, 장지혜 전 성균관대 교수, 성진기 전 전남대 교수, 전재근 전 서울대 교수. © |
대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보직하느라 사회 활동 하느라 연구에 전념하지 못한 퇴임 교수들은 퇴임 후 제2기 인생을 위한 연구 계획을 짜놓고 있다.
송성진 연세대 전 교수(건축공학)는 퇴임 후 1년간은 해외로 여행을 다니며 새로운 건축경향을 보고 배울 계획이다. 그동안 정리하지 못했던 건축양식을 담은 슬라이드 필름들도 홈페이지를 만들어 올려 자신은 물론 후학들에게 자극을 주겠다는 심산이다.
▲송성진 교수(오른쪽) © |
한국어와 영어의 색채 비교 연구에 선두주자였던 김기찬 전 경북대 교수(영어학)는 퇴임 이후 ‘영어 교수법’을 연구 과제로 삼았다. 6년 동안 경북대 어학교육원장을 역임하며 해외 연수를 하지 않고도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보자는 고민이 퇴임 이후, 새로운 연구과제가 된 것. 김 교수는 “한국에서도 제대로 영어를 가르치면, 외국에 어학연수를 보내는 사교육비도 절감할 수 있다”라며 “외국문화를 익히는 데는 해외연수가 필요하겠지만 좋은 선생과 책만 있으면 한국에서도 영어교육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다”라고 말했다. 또, “토익시험도 교육부 평가원에서 제출해 외화 절약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할 계획”이라며 “연구에 더해 정책 개발을 위해서도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윤이흠 서울대 전 교수(종교학)는 평생 연구했던 한국종교사와 세계종교사를 총 망라, 한 권의 책으로 집필할 계획이다. 윤 교수는 “그간 틈틈이 써온 글들을 묶어, 체계적으로 정리해 올해 안으로 한국종교사를 출판할 것”이라며 “2~3년 후에는 상고대부터 고대, 중세, 현대 종교로 이어지는 세계종교사를 집필할 계획”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윤 교수는 서울대 재직 시절, 동료 종교학자들과 함께, ‘한국인의 종교관’이란 저서를 집필해 한국인의 일관된 정신을 ‘감성과 이성의 조화’로 보고 이를 ‘멋’이라는 고유 언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윤 교수가 집필한 ‘단군, 그 이해와 자료’는 8백7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 단군연구에 대한 기존의 자료와 견해를 집대성해 놓아, 단군을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중요 자료로 읽히고 있다.
관광학 연구 1세대인 김종은 경희대 전 교수(관광학)는 퇴임 후 ‘관광학 사전’을 펼칠 계획이다. “직업이 공부여서 달리 할 일도 없다”라고 말하는 김 교수는 “관광학문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데다 아직 이론이 체계적으로 정립돼 있지 않아 관광학을 총망라하는 사전을 편찬해 후학들의 연구 기반을 다져놓겠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김 교수는 지리학 연구자로 관광학을 접했다가 전공을 바꾼 경우로, 대통령 산하 국토균형발전위원회 위원, 도시계획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며 관광정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왔다. 김 교수는 “입지론적 관점에서 재개발 뉴 타운의 지역적 구도와 지역 관광상품을 개발하고 고향인 당진을 새로운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교수정책자문단장을 맡은 일은 연구를 정책에 반영할 수 있어 보람됐다”라고 말했다.
▲유세희 교수 © |
김치냉장고를 개발한 전재근 서울대 전 교수(식품공학)는 “여생을 맛을 느끼는 인간의 의식에 대해 연구할 계획”이라며 “형이상학적인 주제이지만, 개인의 식성 패턴뿐만 아니라 지역, 가족의 패턴을 읽을 수 있어, 식품공학 연구자가 여생을 투자하기에 알맞다”라고 말했다. 전 교수는 “후학들이 내 문제의식에 고무 받아, ‘맛의 인지과학’ 등 관련 논문을 쓰기 시작해 보람을 느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 교수는 후배 교수들에게 “학문에도 유행이 있지만,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한 분야에 10년은 매진해야 학자로서 성공하고 국제경쟁력도 생긴다”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성진기 전 전남대 교수(철학)는 ‘인문학의 대중화’를 고민하고 있다. 전남대 인문학연구원장을 맡으며 시작했던 시민대상 철학 강좌를 ‘철학 카페’로 전승하려는 욕심 때문이다. 성 교수는 “인문학적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철학을 머리 아파하는 시민들이 철학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라고 말했다. “인문학이 죽었다고 절규하는데, 인문학을 몰라서 괄시하는 사람들에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인문학을 즐겁게 살려내자”라는 취지에서다.
한국니이체학회 회장, 한국철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평생 동안 몸 받쳐 온 철학연구가 대중에게 널리 보급돼야 한다는 게 성 교수의 바람이자, 퇴임 후 계획인 셈이다.
후학들을 위해 퇴임 이후에도 학문적 기반을 다지는 것을 보람으로 삼는 교수들도 있다.
노재성 충남대 전 교수(정밀공업화학)는 산업계에 진출해 있는 제자들에게 컨설팅을 해주는 것으로 퇴임 이후 계획을 잡았다. 그간 노 교수가 배출한 석사학위 제자만 46명, 박사학위 제자는 19명이다. 노 교수는 후배 교수들에게 “성실하고 연구하고 강의하는 것만큼이나 동료 교수들과 화합하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 화목한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노 교수는 “1966년 일본 연수 중 불소화학을 접하게 된 것이 인연이 돼 불소화학협의체를 설립했는데, 퇴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불소화학을 연구하고 싶다”라며 “값싸면서 유용한 시멘트를 개발하는 것도 또 하나의 연구과제”라고 말했다.
이상백 건국대 전 교수(서양철학)는 “중학교 이후 반세기만에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라며 “노후에 못했던 취미생활을 하며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지난 교수 생활을 되돌아보며 “보직을 이것저것 맡다 부총장까지 맡다 보니 연구에는 이만저만 손해를 본 것이 아니다”라며 “다시 교수가 된다면, 보직에 아까운 시간을 보내지 말고 연구에 몰두해서 학교에 기여하는 교수가 되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각종 평가로 연구 부담이 큰 것이 사실이지만 좋은 기회로 여기면 남는 것은 연구뿐이다, 라는 것을 알게 된다”라는 것. 이 교수는 후배 교수들에게 “교수에게 남는 것은 연구업적 밖에 없다. 보직에 힘쓸 시간에 공부를 해라”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김조영혜 기자 kimjoe@kyosu.net
클릭하자마자 등장하는 선생님 사진, 역시 우리 선생님이시군하는 생각과 동시에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습니다. 요즘 지면에는 온통 우울하고 답답한 소리만 가득했는데, 순식간에 그런 체증을 쏵 쓸어내려주는 기사였습니다.
제가 과연 우리 선생님 수석(?) 제자답게 이 다음 마지막에 아름다울 수 있을까 벌써 걱정이 됩니다.
느림의 철학이면서 평생의 좌우명과도 같은 상징, 그런 '달팽이'에 대한 사랑을 꾸준히 실천하시는 그 모습이 진정 아름답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달팽이를 느리다고 하지만 문득 처다보면 저만치 멀리 앞서 가있는 그 모습이 더욱 경탄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