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3 15:55 (화)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이 땅의 스승들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이 땅의 스승들
  • 김조영혜 기자
  • 승인 2005.09.07 00: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부는 평생의 業, 달라질 것 없다"

▲권오길 교수(왼쪽) ©
“퇴임 후라고 달라질 건 없다. 공부를 평생 업으로 삼았으니 죽을 때까지 전념하겠다.”

지난달 말, 정년퇴임한 교수는 총 3백14명. 퇴임 후 교수들은 인생 제2기를 맡고 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퇴임 후에도 공부를 業으로 삼을 계획이다.

달팽이 관련 논문만 70편을 내 달팽이 박사로 유명한 권오길 前 강원대 교수(동물학)는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는 만큼, 퇴임 후에도 연구와 강의는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달팽이 연구를 계속 하는 것은 물론 시간에 쫓겨 못 쓴 글들을 정리, 발표할 계획이다. 또 시간강사로 변신, 춘천교대, 상지대 등에서 학생들을 만난다.

김형효 前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철학윤리학)는 퇴임과는 무관하게 7세기에 살았던 원효를 21세기의 인물로 조명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김 교수는 “해체주의는 20세기 말 등장한 사상인데도 7세기의 원효가 해체주의적 사고를 했다는 것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라며 “해체주의는 인류의 여명기부터 늘 있어왔고, 시대마다 표현을 달리 해왔던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의 원효사상은 올해 말, 발간될 계획이다. 그의 철학 연구는 실존주의에서 시작해 현상학, 구조주의 등 서양철학을 두루 연구하다 한국철학을 통과, 해체주의·노장·불교철학으로 귀착했다.

황의각 前 고려대 교수(경제학)는 퇴임을 앞두고 지난 한 달간을 꼬박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보냈다. 6·25 전쟁 이후와 다를 바 없는 황폐한 아프가니스탄의 경제 상황에 대해 경제 자문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서다. 아프가니스탄 경제부의 요청으로 경제 복구 대안을 제시하고 강의를 하는 빠듯한 일정을 보낸 황 교수는 “내가 한 공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공부한 사람의 도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옥스퍼드대 출판부에서 발간한 ‘남북한 경제비교’로 북한 경제 연구의 시초를 일군 황 교수는 앞으로 통일 후 경제격차를 줄일 수 있는 대안들을 모색할 계획이다. 

이밖에도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교수들이 적지 않다. 김정배 前 고려대 교수(한국사)는 지난해 3월 출범한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으로 재임하며 연구뿐만 아니라 고구려 연구의 기틀을 잡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정성진 국민대 前 교수(법학)는 지난해 3월 국민대 총장직에서 물러난 뒤 9월부터 국가청렴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윗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형효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황의각 전 서울대 교수, 김기찬 전 경북대 교수, 윤이흠 전 서울대 교수, 김종은 전 경희대 교수, 이상백 전 건국대 교수, 노재성 전 충남대 교수, 장지혜 전 성균관대 교수, 성진기 전 전남대 교수, 전재근 전 서울대 교수. ©

대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보직하느라 사회 활동 하느라 연구에 전념하지 못한 퇴임 교수들은 퇴임 후 제2기 인생을 위한 연구 계획을 짜놓고 있다.

송성진 연세대 전 교수(건축공학)는 퇴임 후 1년간은 해외로 여행을 다니며 새로운 건축경향을 보고 배울 계획이다. 그동안 정리하지 못했던 건축양식을 담은 슬라이드 필름들도 홈페이지를 만들어 올려 자신은 물론 후학들에게 자극을 주겠다는 심산이다.

▲송성진 교수(오른쪽) ©
송 교수는 특히 “최고령 사회를 준비해 노인 요양시설에 대한 해외 자료들을 모을 계획”이라며 “노인 요양시설을 위한 복도의 폭, 방의 크기는 어떠해야 하는지 기준을 세우고 온돌방을 개조한 침실 등 한국적 노인요양시설의 설계 기준을 제시하겠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해외에서 건축가로 활약하며 요양소를 건축한 경험을 살려, 한국형 요양시설의 기준을 제시하겠다는 재임 시절 목표가 퇴임 후로 연장된 것이다.

한국어와 영어의 색채 비교 연구에 선두주자였던 김기찬 전 경북대 교수(영어학)는 퇴임 이후 ‘영어 교수법’을 연구 과제로 삼았다. 6년 동안 경북대 어학교육원장을 역임하며 해외 연수를 하지 않고도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보자는 고민이 퇴임 이후, 새로운 연구과제가 된 것. 김 교수는 “한국에서도 제대로 영어를 가르치면, 외국에 어학연수를 보내는 사교육비도 절감할 수 있다”라며 “외국문화를 익히는 데는 해외연수가 필요하겠지만 좋은 선생과 책만 있으면 한국에서도 영어교육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다”라고 말했다. 또, “토익시험도 교육부 평가원에서 제출해 외화 절약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할 계획”이라며 “연구에 더해 정책 개발을 위해서도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윤이흠 서울대 전 교수(종교학)는 평생 연구했던 한국종교사와 세계종교사를 총 망라, 한 권의 책으로 집필할 계획이다. 윤 교수는 “그간 틈틈이 써온 글들을 묶어, 체계적으로 정리해 올해 안으로 한국종교사를 출판할 것”이라며 “2~3년 후에는 상고대부터 고대, 중세, 현대 종교로 이어지는 세계종교사를 집필할 계획”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윤 교수는 서울대 재직 시절, 동료 종교학자들과 함께, ‘한국인의 종교관’이란 저서를 집필해 한국인의 일관된 정신을 ‘감성과 이성의 조화’로 보고 이를 ‘멋’이라는 고유 언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윤 교수가 집필한 ‘단군, 그 이해와 자료’는 8백7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 단군연구에 대한 기존의 자료와 견해를 집대성해 놓아, 단군을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중요 자료로 읽히고 있다.

관광학 연구 1세대인 김종은 경희대 전 교수(관광학)는 퇴임 후 ‘관광학 사전’을 펼칠 계획이다. “직업이 공부여서 달리 할 일도 없다”라고 말하는 김 교수는 “관광학문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데다 아직 이론이 체계적으로 정립돼 있지 않아 관광학을 총망라하는 사전을 편찬해 후학들의 연구 기반을 다져놓겠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김 교수는 지리학 연구자로 관광학을 접했다가 전공을 바꾼 경우로, 대통령 산하 국토균형발전위원회 위원, 도시계획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며 관광정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왔다. 김 교수는 “입지론적 관점에서 재개발 뉴 타운의 지역적 구도와 지역 관광상품을 개발하고 고향인 당진을 새로운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교수정책자문단장을 맡은 일은 연구를 정책에 반영할 수 있어 보람됐다”라고 말했다.

▲유세희 교수 ©
중국과 구 소련 등 공산권 국가를 주 연구주제로 삼았던 유세희 한양대 전 교수(정치외교학)는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 전환의 비교연구’로 퇴임 후 연구계획을 잡았다. 빠르게 변화하는 21세기 국제정치 구조에서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변모에 연구의 초점을 잡은 것. 유 교수는 “사이버 정보화 시대에 변질하는 민주주의 양상에 대해서도 새롭게 연구하고 싶다”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유 교수는 한국공산권연구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중국·구 소련과 수교를 맺는데 일조해 ‘수교훈장 창의장’을 받기도 했다.

김치냉장고를 개발한 전재근 서울대 전 교수(식품공학)는 “여생을 맛을 느끼는 인간의 의식에 대해 연구할 계획”이라며 “형이상학적인 주제이지만, 개인의 식성 패턴뿐만 아니라 지역, 가족의 패턴을 읽을 수 있어, 식품공학 연구자가 여생을 투자하기에 알맞다”라고 말했다. 전 교수는 “후학들이 내 문제의식에 고무 받아, ‘맛의 인지과학’ 등 관련 논문을 쓰기 시작해 보람을 느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 교수는 후배 교수들에게 “학문에도 유행이 있지만,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한 분야에 10년은 매진해야 학자로서 성공하고 국제경쟁력도 생긴다”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성진기 전 전남대 교수(철학)는 ‘인문학의 대중화’를 고민하고 있다. 전남대 인문학연구원장을 맡으며 시작했던 시민대상 철학 강좌를 ‘철학 카페’로 전승하려는 욕심 때문이다. 성 교수는 “인문학적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철학을 머리 아파하는 시민들이 철학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라고 말했다. “인문학이 죽었다고 절규하는데, 인문학을 몰라서 괄시하는 사람들에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인문학을 즐겁게 살려내자”라는 취지에서다.

한국니이체학회 회장, 한국철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평생 동안 몸 받쳐 온 철학연구가 대중에게 널리 보급돼야 한다는 게 성 교수의 바람이자, 퇴임 후 계획인 셈이다.

후학들을 위해 퇴임 이후에도 학문적 기반을 다지는 것을 보람으로 삼는 교수들도 있다.

장지혜 성균관대 전 교수(의상학)는 퇴임 후 후학들의 연구를 도울 생각에 뿌듯하다. 지난해 성균관대 내 인공기후실을 설립해 시설이 없어 일본대학들과 공동연구를 해야만 했던 어려움을 후학들에게는 물려주지 않게 된 것. 인공기후실은 기후를 자유롭게 조절해 인체와 의복, 환경간의 적합성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시설 중 하나다. 장 교수는 “재직 중에는 기능성 건강소재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 등을 연구했다면, 퇴임 후에는 실버사회의 도래에 맞춰, 노인 건강의복과 장애인 의복을 연구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제자들과 함께 ‘실버건강의복연구소’도 구상 중이다.  장 교수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후학들이 연구하는 것을 뒤에서 돕고 뒷받침하는 것이, 내가 못다 한 연구를 완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노재성 충남대 전 교수(정밀공업화학)는 산업계에 진출해 있는 제자들에게 컨설팅을 해주는 것으로 퇴임 이후 계획을 잡았다. 그간 노 교수가 배출한 석사학위 제자만 46명, 박사학위 제자는 19명이다. 노 교수는 후배 교수들에게 “성실하고 연구하고 강의하는 것만큼이나 동료 교수들과 화합하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 화목한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노 교수는 “1966년 일본 연수 중 불소화학을 접하게 된 것이 인연이 돼 불소화학협의체를 설립했는데, 퇴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불소화학을 연구하고 싶다”라며 “값싸면서 유용한 시멘트를 개발하는 것도 또 하나의 연구과제”라고 말했다.

이상백 건국대 전 교수(서양철학)는 “중학교 이후 반세기만에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라며 “노후에 못했던 취미생활을 하며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지난 교수 생활을 되돌아보며 “보직을 이것저것 맡다 부총장까지 맡다 보니 연구에는 이만저만 손해를 본 것이 아니다”라며 “다시 교수가 된다면, 보직에 아까운 시간을 보내지 말고 연구에 몰두해서 학교에 기여하는 교수가 되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각종 평가로 연구 부담이 큰 것이 사실이지만 좋은 기회로 여기면 남는 것은 연구뿐이다, 라는 것을 알게 된다”라는 것. 이 교수는 후배 교수들에게  “교수에게 남는 것은 연구업적 밖에 없다. 보직에 힘쓸 시간에 공부를 해라”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김조영혜 기자 kimjoe@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염건 2005-09-11 01:57:18
대학의 소식들을 둘러 보느라 이 기사, 저 기사를 읽고 있었는데,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이란 제목을 접하자 당연히 선생님이 떠 올랐습니다.
클릭하자마자 등장하는 선생님 사진, 역시 우리 선생님이시군하는 생각과 동시에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습니다. 요즘 지면에는 온통 우울하고 답답한 소리만 가득했는데, 순식간에 그런 체증을 쏵 쓸어내려주는 기사였습니다.
제가 과연 우리 선생님 수석(?) 제자답게 이 다음 마지막에 아름다울 수 있을까 벌써 걱정이 됩니다.
느림의 철학이면서 평생의 좌우명과도 같은 상징, 그런 '달팽이'에 대한 사랑을 꾸준히 실천하시는 그 모습이 진정 아름답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달팽이를 느리다고 하지만 문득 처다보면 저만치 멀리 앞서 가있는 그 모습이 더욱 경탄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