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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된 정체성
오인된 정체성
  • 이지원
  • 승인 2021.11.19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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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드 하이더 지음 | 권순욱 옮김 | 두번째테제 | 200쪽

정체성 정치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 해방의 정치를 주장하다!

맬컴 엑스에서 컴바히강공동체까지, 미국 흑인 저항운동의 유산에서 시작하여

극우의 부상과 정체성 정치의 한계점을 통렬히 비판하며 펼쳐 보이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

『오인된 정체성 - 계급, 인종, 대중운동, 정체성 정치 비판』은 파키스탄계 미국인으로, 정체성과 현대 정치와 관련한 여러 논쟁을 통해 주목받는 언론인이자 편집인, 뉴욕 뉴스쿨대학교 객원 조교수인 연구자 아사드 하이더가 펴낸 책이다. 

이 책은 영어권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시기에 출간되었으며, 극우의 부상과 그것이 야기한 실질적인 공격에 대한 사회운동의 실망스러운 대응과 분열에 관해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미국 흑인운동의 역사와 정체성 정치의 부상을 논하며, 운동의 분열이 띈 특정한 방식, 즉 정체성 정치라는 현상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있다. 정체성 정치는 보편적 해방을 표방한 사회운동에 대해서 분리주의적 시각을 제시하였고, 이를 통해 차이만을 중시하고 연대와 공통을 찾는 노력을 멈추도록 만들었다. 저자는 이러한 모습을 백인종의 발명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미국에서 1960년대 이후 전개되었던 정체성 운동과 문학 논쟁을 통해 살펴본다. 그러면서 인종주의에 맞선 투쟁이 이러한 정체성에 기반할 것이 아니라 실제 구체적인 현실에서 시작하여 해방이라는 보편성을 추구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20세기 미국에서 여러 차례 일어난 인종주의에 맞선 대중운동에서 교훈을 얻은 것이다. 

초기 형태의 정체성 정치는 혁명적인 정치적 실천을 이론화하였지만, 현대의 이데올로기적 형태의 정체성 정치는 개인주의적 방법에 근거한다. 정체성 정치는 인정에 대한 개인의 요구에 근거하며, 그 개인의 정체성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것은 이 정체성들을 당연한 것으로 보며, 모든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숨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필연적으로 다른 모든 이들과 상이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에, 정체성 정치는 집단적 자기 조직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약화시킨다. 정체성에 기반한 정치는 보편적 해방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억압적인 사회구조에 대항하는 집단적 투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인정을 획득하는 것으로 정치를 환원해 버린다.

이 책은 정체성 정치가 사회적 해방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비관론을 설파하는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마틴 루터 킹, 맬컴 엑스, 휴이 뉴턴과 블랙팬서당, 흑인 여성들의 급진적 운동 조직이었던 컴바히강공동체의 선언과 실천, 흑인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자로 옮겨 간 작가이자 조직가였던 아미리 바라카가 보여준 말년의 행보 등 미국 흑인운동의 흐름을 통해, 저자는 정체성 정치가 갖는 한계점을 넘어서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단초를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 사회 또한 세대만이 아니라 젠더, 섹슈얼리티, 지역, 국적, 난민 등 여러 측면의 사회적 억압에 관한 논쟁과 대립, 갈등을 겪고 있다. 특히 사회적 소수자들이 겪는 문제를 이야기할 때, 서로의 문제에 공감할 뿐 아니라 어떻게 해방적인 방향으로 나아갈지 고민하고 실천하자는 제안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 대신 누가 더 약자인지를 증명하고, 누가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구분 지으며 자신과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낙인 찍는 모습이 더욱 눈에 띈다. 인종이라는 단어를 세대, 젠더, 성소수자, 난민 등으로 대체하면서 이 책을 읽는다면, 이 책이 고민하는 문제가 한국의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대중운동, 사회운동이 어떤 기반 위에서 전개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각각 분절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부문별 운동들이 어떤 식으로 함께할 수 있는지 궁금한 사람들,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 어떻게 해방의 정치에 참여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더불어 반란자적 보편성이라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던 새로운 해방의 권리에 대해 논의하는 책의 6장은 정치 이론에서도 흥미로운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려 준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대중운동의 새로운 차원에서부터 권리의 문제까지 좀 더 열린 시각으로 다가갈 수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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