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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동양담론의 성격 - 김진석 교수에 대한 반론
[논쟁] 동양담론의 성격 - 김진석 교수에 대한 반론
  • 김성환 군산대 교수
  • 승인 2001.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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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 교수의 '동양담론의 공허함'의 공허함

이 글은 본지 지난호(203호)에 실린 김진석 인하대 교수(철학)의 '동양담론의 공허함'에 대한 반론이다. 김 교수는 이 글에서 노자, 공자등의 동양담론의 가진 지배논리적 성격을 비판하고, 최근의 동양담론에대한 해체론적 논의가 가진 문제를 비판한바 있다. 이에 대해 동양철학 전공자인 김성환 군산대 교수(철학)가 반론을 기고해왔다. 도올 김용옥의 강의를 통해 유포된 이른바 '동양담론'이 스타일과 포즈를 문제삼고 있다는 점에서, 혹은 '현대적 해석'을 둘러싼 '훈고학적 논의'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면, 이 두글은 '동양담론의 성격'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된다.

"우리는 한국사람이기는 하지만 동양인은 아니다"라는 김진석교수의 선언은 우리를 적잖이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동양'은 정치적·문화적으로 너무나 이질적인 덩어리이고, 서양에 의해 구획되어 그 자신에 대립된 것으로 기획된 추상적이고 솔직하지 못한 개념이다. 그러므로 '동양'은 실체가 없으며, 이처럼 실체가 불분명한 '동양'을 내걸고 제기되는 철학적 혹은 인문학적 담론은 모두 근거 없는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김교수의 글을 차분히 읽으면서, 스스로 동양인이기를 거절한 과감한 발언에서 발동된 호기심은 이내 공허함으로 바뀐다. 그의 주장이 전혀 새롭지 않을뿐더러, 내용마저 부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당신들이 한국사람이지만 동양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발 우리 모두가 동양인이 아니어야 한다고 강요하지는 말라.
우선 '동양'은 너무나 이질적인 덩어리라는 주장. 그의 말처럼 Asia를 지칭하는 의미의 '동양'은 중동에서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정치적·문화적으로 매우 이질적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언어 관습에서 '동양'이 아시아 전역보다 주로 동아시아를 지칭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동양철학' 혹은 '동양문화'라는 말을 사용할 때 보통 한·중·일을 전제로 하는 것은 일종의 언어 습관이다. 물론 이것은 그 언어사용의 엄정성에 있어 분명 문제가 있으며, 필자 역시 오래 전부터 우리 언어에서 '동양'과 '동아시아'가 보다 엄격히 구분될 필요가 있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김진석교수는 이런 언어 규약 상의 혼란을 곧 실체의 부재로 비약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리가 '동양'이라는 말을 통해 '동아시아'를 지칭하는 것이 언어사용의 오류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하나의 문화적 정체로서 동아시아의 실체를 부인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양인이기를 거부하는 김교수는 반드시 동아시아의 문화적 정체성을 부인해야 하며, 나름대로 그런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시도는 다시 건너지 말아야할 비약의 강을 넘는다. "동양철학이라는 실체, 더구나 지금의 동아시아 삼국 문화의 근저에 놓여있을 실체, 이것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거의 없다"는 발언은 그 자신이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사상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비록 현재 동아시아 삼국의 전통문화가 서구문화의 폭격에 거의 초토화된 것은 틀림없지만, 과거 동아시아 문화의 근저에 유교·도교 등의 사상적 실체가 없었다는 주장은 분명 설득력이 없다.
김교수의 글에 관통되는 보다 근원적인 관점은 서구가 곧 보편의 잣대라는 독단이다. 예컨대 "서양문화는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거의 모든 나라에서 꽃이 피었다"는 찬미가 "동양에서는 중국문화가 19세기까지 문화적 헤게모니를 유지했다"는 그래서 "이 천년 가까이된 문화적 패권주의를 되돌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억지의 배경이 된다. 김교수는 은연중 이 땅의 '동양철학 연구자들이 중국의 문화적 패권을 되돌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고 매도하지만, 이것은 서구 문화에 기생해 엄청난 문화권력을 누려온 자신들의 기득권을 한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으름장에 불과하다. 사실 '동양담론'을 업으로 삼는 우리는 김교수의 말과 달리 중국의 문화적 패권에 일말의 향수도 느끼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그 동안 홀시 되어온 동아시아의 전통 가운데 의미 있는 사상과 문화를 발굴·재해석하여 인류에게 되돌리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패권에 대한 질문은 반대로 필자가 김교수에게 던지고 싶다. 지난 수세기 동안 '서양'이야말로 잔인한 식민지 확장을 통해 범지구적으로 자신의 문화를 강제이식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그 패권을 강요하지 않는가? 게다가 김교수 같은 식자들이야말로 지난 백년 동안 이 땅에서 서구의 패권에 의지해 거대한 문화·사상·학술적 권력을 누려오지 않았는가? 그런 사람들이 여전히 미약한 동양철학 연구를 '문화권력'으로 몰아세우고, 그 담론의 씨를 말리려 드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물론 김교수가 '개그'라고 빈정거리는 김용옥의 노자·공자 강의는 그의 말처럼 모종의 '문화권력'일 수 있다. 그런데 김교수는 김용옥강의의 '문화권력'화를 동양담론 전체의 문화권력으로, 그리고 김용옥강의의 공허함을 동양사상 자체의 공허함으로 비약시킨다. 이것이야말로 음모가 아닐까? 빌미를 잡은 김에 철학 혹은 인문학적 '동양'을 말살하려는 음모. 그리고 '서양'에 기생한 자신의 거대한 문화권력을 유지하려는 이해관계에서 생긴 음모.
사실 김교수의 비난과 달리, '동양' 전공자들은 오히려 대학과 학계에 압도적인 '서양' 학문의 패권, 그 문화권력의 부당한 횡포에 적잖이 시달리고 있다. 김교수는 동양철학자들이 과거의 동양을 되돌리려한다고 모함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를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대부분의 동양철학 전공자들은 전통에 대한 비판적 계승과 동·서 문화의 화해 혹은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서양철학자 가운데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작업에 동참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필자는 김교수의 글에서 선언적 논리에 의거해 학문의 서구적 패권을 유지하려는 독단, 철학의 살집에 끼여든 '동양'이라는 가시를 견디지 못해 내지르는 투정, 동양이 조금이라도 주목받는 것을 참지 못하는 질투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다. 김교수는 본인의 주장이 얼마나 빈약한 근거와 비약 그리고 감정적 노여움과 질투에 근거하는지를 자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동양'에 대한 거친 부정이 자신의 지적·정신적 빈곤의 소산임을 노출시킬 뿐이다. 한 예로 유가사상이 신분제를 옹호했기 때문에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김교수식의 논리에 따른다면, 마찬가지로 계급질서를 옹호했던 근대 이전의 거의 모든 서양철학 역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김교수는 그런 교조적 단순화의 논리가 이미 반세기 전에나 통했음직한 억지임을 모르는 모양이다. 동아시아의 유교적 전통을 그리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필자조차도 그의 이런 지적 무모함에는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다.
그밖에 유가와 도가에 대한 그의 구체적 주장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 것은 주어진 지면의 제한이 가장 큰 이유지만, 동양철학에 대한 그의 공부가 너무나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이를 반박할 흥미가 유발되지 않는 탓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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