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0:00 (금)
[출판화제] 50권 돌파한 '한길그레이트북스'
[출판화제] 50권 돌파한 '한길그레이트북스'
  • 이세영 기자
  • 승인 2001.06.1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1-06-12 16:50:02

서양 고전문학작품을 중심으로 고전 재번역이 활기를 띠고 있다. 심화되는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출판전략의 하나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부박한 우리의 번역현실을 고려할 때 고전은 부단히 재번역되고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옹호론도 적지 않다. 몇 해 전부터 대입논술에 고전이 출제되는 빈도가 늘어나면서 과거보다 고전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우리의 출판계에서는 고전출간이 저렴한 비용에도 일정한 매출이 보장되는 ‘소액안전투자처’ 정도로 인식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물론 대량으로 쏟아져나오는 졸속 번역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길사의 고전시리즈 ‘한길그레이트북스’(이하·’그레이트북스’) 시리즈는 대표적인 ‘고급’ 번역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지난 1996년 인문학의 부활과 사상의 대중화를 도모한다는 출간이념을 내걸고 처음 대중 앞에 선보였다. 지난달 마르크 블로크의 ‘봉건사회 Ⅰ·Ⅱ’(한정숙 옮김)가 출간됨으로써 그레이트북스가 50권을 넘어섰다. 96년 1월 화이트헤드의 ‘관념의 모험’(오영환 옮김)으로 대장정의 첫발을 내딛은 지 꼭 5년 5개월만의 일이다.

지금까지 그레이트북스는 정약용의 ‘경세유표’(이익성 옮김) 라다크리슈난의 ‘인도철학사’(이거룡 옮김)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임효선·박지동 옮김) 등 국내와 동·서양을 아우르는 인류의 지적유산을 번역·소개하는 데 역점을 기울여 왔다. 특히 20세기말에 출간된 ‘신고전’들을 시리즈에 포함시키는 ‘모험’을 시도함으로써 고전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넓히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에릭 홉스봄의 역사 3부작,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이정우 옮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고전적인 기초텍스트도 소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에 기반한 2차 3차 번역물의 출간은 잇따르는 출판계의 기형화된 현실을 감안할 때, 그레이트북스의 시도는 몇 가지 점에서 주목받을 만하다. 우선 눈에 띄는 게 탄탄한 번역진이다. ‘해당저자의 사상이나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30∼40대 전문학자’라는 번역자 선정원칙을 비교적 충실히 지켜왔다. ‘문명화 과정’(노베르트 엘리아스 지음)의 박미애씨,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마루야마 마사오 지음)의 김석근 교수, ‘인도철학사’(라다크리슈난 지음)의 이거룡 교수 등이 그레이트북스 번역을 통해 이름이 알려진 소장학자들이다.

중역을 피하고 가급적 원전에 기반한 번역을 추구한다는 것, 독자수준을 고려한 상세한 해설과 역자주를 첨부한다는 것도 그레이트북스의 번역원칙이다. 까다로운 원칙들을 충족시켜야한다는 부담 때문인지 한 권의 책이 번역되는 데만도 평균 3년의 시간이 소요됐다. ‘인도철학사’ 같은 책은 무려 7년의 산고 끝에 빛을 본 경우다.

상업성과는 거리가 있는 책들이 대부분인 만큼 판매는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평균 2천4백부 꼴로 팔려나갔는데, ‘원본 삼국사기’(김부식 지음/이강래 옮김)나 정약용의 ‘경세유표’(이익성 옮김) 같은 국내 고전들은 투입된 노력에 비해 판매량이 적어 마음고생이 컸다.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레비-스트로스의 ‘슬픈열대’. 5백여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찾는 사람이 끊이질 않아 지금까지 7천6백권이 팔렸다.

한길사는 애초 10년에 걸쳐 2백종 3백권을 출간할 계획이었다. 5년동안 50권을 펴냈으니 목표치의 6분의 1수준밖에 달성하지 못한 셈이지만, 독자들 누구도 출판사의 ‘약속위반’을 문제삼지 않는다. 출간된 책들의 번역과 편집이 기존 국내 고전총서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묵언의 합의가 형성되어 있는 까닭이다. 출판사측은 잠정적으로 30권의 책을 더 출간한다는 계획이다. 이후의 출간예정 도서목록에는 한나 아렌트의 ‘혁명론’,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력 비판’, 르네 지라르의 ‘소설적 거짓, 낭만적 진실’ 등 명실상부한 고전들이 망라되어 있다. 번역자들은 홍원표, 김상봉, 김치수 등 출판계 안팎에서 번역실력을 공인받은 학계의 소장·중견학자들. 후속출간이 기대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다.
이세영 기자 sylee@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