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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역사 허물기
신성역사 허물기
  • 남기원 경희대
  • 승인 2005.08.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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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


남기원 (경희대·사학과)

요즘 대중문화의 키워드 중에 하나는 ‘역사’가 아닐까. 서점에는 역사 관련 서적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TV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역사물은 상종가를 치고 있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 역사 과목은 분명 내일의 생존도 장담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해 있는 듯 하다. 중·고등학교에서 역사과목은 독립과목으로서의 지위를 잃어가고 있으며, 대학에서도 사학과는 냉혹한 시장경쟁의 희생양이 돼버렸다. 이른바 역사학의 위기인 것이다.

내가 학부생이었던 80년대만 해도 역사학은 인기과목의 하나였다. 사회변혁의 모범을 과거에서 찾고, 내일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발전법칙을 알아야 한다는 필요성이 많은 학생들로 하여금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들었으리라. 그러나 사회혁명, 민중해방 등의 구호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돼버린 지 오래인 오늘, 많은 사람들은 과거를 무겁고 진지하게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현대의 대중들이 역사를 찾는 이유는, 현재와는 사뭇 다른 과거의 이국적 풍경과 낯선 정서들이 재미있고 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 아닐까. 달리 말하자면 오늘을 바로 알고 내일을 설계하기 위한 역사에는 관심이 없고, 그것이 우리에게 펼쳐놓는 신비로움에만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서양의 역사와 문화’, ‘역사란 무엇인가’ 등의 교양강의를 주로 담당하는 나의 문제의식은 이로부터 출발한다. 재미있는 이야기로서의 역사는 좋아하되 그것의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에는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흥미와 의미를 동시에 제공할 수 있는 강의 주제와 방법은 무엇일까. 우선 역사를 고리타분한 것으로, 단순히 암기하는 지식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학생들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선입관을 깨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신화, 여성, 동성애자, 광인 등 지금껏 역사에서 소외됐던 대상들을 강의 주제로 선택했다. 역사를 ‘확정된 과거의 사실’로 믿는 학생들에게 역사란 다양한 해석의 결과물임을, 정치와 경제 같은 것만이 역사의 주제가 아니라 일상의 사소함이 역사의 중요한 테마가 될 수 있음을, 우리가 책을 통해 배운 역사 지식들이 때로는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파격적이라고 거부감을 느끼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이러한 강의가 역사를 신성시하는 학생들의 태도를 바꾸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교과서에서 정답을 찾는 방식에 익숙해진 학생들, 그럼으로써 역사의 단순한 수용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학생들의 사고가 유연하고 자유로워져야만 역사를 능동적으로 해석하고 비판하는 적극적 참여자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비판적 태도로부터 우리의 현실을 날카롭게 해부하는 시각을 배울 수 있다면 자연스레 역사의 의미를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문제는 학생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교양과목이 대개 그러하듯이 60~80여명이 되는 학생들과 마주할 시간은 불과 15~16주밖에 허락돼 있지 않다. 한 학기 동안 방대한 분량의 주제를 강의하고 학생들의 질문이나 궁금증을 소화하기에는 수업 시간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인터넷 공간에 커뮤니티를 만들어 학생들과 만나고는 있으나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다. 작두를 타듯 신명나게 강의하고, 학생들과 어우러져 열띤 논쟁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그런데, 시간 강사의 신분으로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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