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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에게는 ‘합성고무’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에게는 ‘합성고무’가 있었다
  • 유무수
  • 승인 2021.11.12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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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소재, 인류와 만나다』 홍완식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360쪽

조선에서 장인은 노예와 같았고
일본에서는 특급 대우를 받았다

  
서울시립대 홍완식 교수(신소재공학과)는 돌, 금속, 도자기, 콘크리트, 유리, 비료, 화약, 철강, 섬유, 수지, 플라스틱 등의 소재가 인류역사에 끼친 작용을 ‘소재와 인류문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했다. 그 강의는 2017년 한국대학교육협의회로부터 우수 교과목으로 선정됐다. 이 책은 강의교안을 다듬어 집필한 것이다.

소재가 인류문명을 바꿨다. 구석기 시대에 흑요석에서 뭉툭한 돌보다 정교한 ‘좀돌날’이라는 소재를 발견해낸 것, 농경의 시작과 함께 곡식을 담아 익힐 수 있는 ‘토기’라는 소재를 발견해낸 것은 예전에 없던 혁신적 편리를 누리게 했다. 콘크리트, 유리, 철강이라는 소재를 발견했기에 오늘날 도시의 빌딩도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소재는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주체였다. 중세를 거치며 유럽은 철제무기가 발달했다. 그들이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 신대륙은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무기의 소재에서 뒤떨어졌기에 속수무책으로 패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군승리 배경에는 ‘합성고무’라는 소재가 있었다. 군용기 1대에는 약 0.5톤, 군함 1척에는 75톤, 병사가 휴대하는 장비와 군화에는 개인당 약 15킬로그램의 고무가 필요했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정부고무 계획을 발표했고, 연구진은 합성고무 개발에 성공했다. 고무소재의 원활한 조달은 연합군의 승리를 뒷받침했다. 

 

세계 질서를 재편하는 주체로서 소재

소재의 발견과정에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였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포탄을 쏘아도 마모되지 않는 포신(砲身)을 개발할 필요성이 있었다. 다양한 합성물을 첨가했으나 강도는 개선되지 않았고, 강도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결과물은 폐기되었다. 연구자는 폐기된 더미에서 녹이 슬지 않고 있는 재료를 우연히 발견했고 화학적 분석기술을 이용, 부식되지 않는 스테인리스 식기를 개발했다. ‘순간접착제’나 ‘전시 응급지혈제’도 총의 조준경에 적합하도록 아크릴수지를 개량하는 과정에서 실패한 결과물을 통해 개발되었다.

도자기 역사는 한국인에게 비극이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자기를 유럽에 소개했을 때 유럽은 열광했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러한 정세를 읽고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사기장(沙器匠)들을 납치해갔다. 도요토미가 죽고 전쟁이 끝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화평을 시도했고 납치한 조선인들의 귀환을 제안했다. 그러나 강제로 끌려갔던 사기장들 중 다수가 일본정착을 선택했다. 

조선에서 소재를 발견, 결합, 가공할 줄 아는 장인은 통제와 억압으로 고달팠다. 반면 일본에서는 사무라이와 동급으로 존중했고,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지원해줌으로써 창의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왔다. 조선의 사기장이 개발한 아리타 자기(Arita ware)는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은 명품 도자기 기술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고, 자기의 수출은 일본 국부 증진에 크게 기여했다. 도공의 용광로 제작기술은 일본의 제철소건설과 같은 군수산업 탄생의 기반이 되었다. 용광로에서 나온 강철은 대포가 되고 군함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처럼 그 이름을 귀하게 불러줄 때 존재는 몸짓 이상의 의미를 얻는다. 조선의 권력자들이 자기와 장인에게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었다면 저 당시 일본이 챙긴 국부의 상당부분은 조선을 부강하게 하는 꽃이 되었을 것이다. 

유무수 객원기자 wiseta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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