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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60주년기념특집: 한국 지성사의 풍경(1945~2005)
광복60주년기념특집: 한국 지성사의 풍경(1945~2005)
  • 강성민.이은혜 기자
  • 승인 2005.08.20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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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한 세대가 쌓아온 지적 영토가 굳건해지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학문세대들이 당대적 화두를 지난 세대의 업적과 연결시키면서 넘어서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교수신문은 광복 60주년을 맞아 KBS와 공동기획으로 ‘한국지성사의 풍경’라는 기획을 마련해, 지난 시절 우리 학문의 표정, 그런 학문을 만들어낸 사람들과 여러 가지 사건들의 존재를 돌아보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한국 지성사 연구가 ‘이념사적 연구’와 ‘지식인의 정치활동 분석’으로 나뉘어 전개됨으로써 미처 대중에 대한 지성의 구체적인 영향과 지식인의 정치참여 이외의 영역에서 유의미한 지성적 활동을 포착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교수신문은 학자 1백명을 대상으로 해방 이후 각 시대별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저술, 사건, 인물을 선정하는 심층 설문조사를 통해 이러한 빈틈을 메우고 지성사를 새롭게 구축하기 위한 기초자료를 완성하였다. 여기에 그 결과를 공개한다. / 편집자주

■1945~1960: 지성의 발아기

해방이후 5·16까지 15년의 기간은 한국근현대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전쟁과 혁명, 그리고 쿠데타를 겪으면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치른 한국인들은 그 와중에도 국가에 걸맞은 학문적 토대를 닦기 위해서 선구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 시기 학문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저술과 인물은 누구일까. 의외로 그 주인공은 ‘저술’이 아니라 ‘잡지’였다. 총 19명이 ‘思想界’를 꼽았다. 1953년 4월 재야인사 장준하와 백낙준이 사재를 털어 만든 이 잡지는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의 기관지 ‘사상’을 인수하여 종합교양지 성격으로 바꾼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정신적·물질적 갱생을 목표로 발간된 창간호 3천부가 발간과 동시에 매진되는 등 지식인층과 학생층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사상계’는 초기에 국판 1백면 내외로 나오다가 이후 4백면 내외로 증면됐다.

민족통일문제, 민주사상의 함양, 경제발전, 새로운 문화창조, 민족적 자존심의 양성을 무게있게 살필 뿐 아니라, 정치·경제·문화·사회·철학·교양·문학·예술 등 다방면에서 권위있는 글을 실은 사상계는 특히 문예면에 큰 비중을 두어 문인들의 활동무대를 크게 넓혀 주었다. 그 후 자유언론 투쟁에 투신하면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다가 1961년 1백호 기념호를 펴낸 것은 한국 독립언론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쾌거였고, 이 잡지의 성장은 곧 한국 지성의 성장을 의미한다고 할 정도로 지식인 사회의 중심적인 채널이었다.

그 다음으로 많은 이들이 주목한 것은 각 학문분야별로 전개된 通史 작업이다. 조윤제의 ‘한국문학사’를 필두로 ‘신문학사조사’(백철), ‘국사대관’(이병도), ‘조선경제사’(전석담), ‘조선과학사’(홍이섭), ‘고려시대사’(김상기), 을유문화사의 ‘한국사 시리즈’ 등이 거론됐다.

통사류 외에도 국학부흥의 차원에서 ‘우리말큰사전’(조선어학회), ‘반계 유형원 연구’(천관우), ‘조선 탑파의 연구’(고유섭) 등도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저술들이었다.

국외 저서로는 ‘자유로부터의 탈출’(에리히 프롬), ‘존재와 무/실존주의와 휴머니즘’(사르트르), ‘제2의 성’(보봐르), ‘죽음에 이르는 병’(키에르케고르) 등 실존주의 관련 서적이 압도적인 가운데 미국의 신프로이트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프롬이 널리 읽혔으며, 보봐르와 사르트르의 동거와 지성적 삶의 실천이 담론의 중심에 있었음도 능히 짐작이 간다.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을 묻는 질문에는 전공별로 대답이 고르게 분산됐는데, 조의설, 현상윤, 신채호, 이병도 등 역사학자와 화학의 기초를 닦은 안동혁, 외국유학 1세대로 한국 교육의 근대화를 일구어 나간 정범모, 이지호·육지수 같은 지리학자들도 거론됐다.


그 외에 정명환과 김붕구의 불문학 사조 소개, 영미 신비평의 전래, 헤겔과 칸트 등의 서구 근대철학 유입, 서구 실존주의 유입을 이 시기를 지배한 사상적 조류라는 대답이 종합적으로 엮여져 나왔다.

지성사적 차원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일로는 총 13명이 해방에서 한국전쟁을 언급했다. 4·19는 9명, 5·16은 6명이었고, 진보적 문인들의 월북사건을 5명이나 거론했다. 그 지성사적 손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논쟁으로는 자유부인 논쟁(3)을 가장 많이 기억했고, 민족문학논쟁과 한글전용논쟁도 거론됐다. 미시적으로 들어가서는 지식인들의 활동의 근거지가 되어 주었던 각종 단체들의 출범을 빼놓을 수가 없다. 역사학회, 사회학회, 철학회, 화학회, 물리학회 등 모학회들이 잇따라 생겨났고, 민족문화연구소와 조선학술원 창립, 동방학연구소와 아세아문제연구소도 이 때 문을 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국가보안법 제정도 양심적인 이 땅 지식인들과의 길항을 예고하며 등장하기도 했다. 그 외에 조선문학가 동맹 결성 등 해방공간의 설렘과 북적임도 거론됐다.

■1961~1970: 지성과 반지성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참혹에서 점차 벗어난후 60년대는 현대 한국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려는 움직임들로 이어졌다. 자주적 입장에서 역사와 사상사의 큰 흐름을 잡으려는 연구들이 나오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각 학문분야에서도 史的 연구서들이 활발히 출간되었다.

이 시기 단연 주목할만한 지성적 흐름은 문학계 양대산맥의 출현이었다. 총 15명이 ‘창작과비평’(이하 창비)을 가장 영향력 있는 지성으로 꼽았고, 6명은 ‘문학과지성’(이하 문지)을 지목했다. 백낙청을 중심으로 1966년 첫발을 내디딘 창비는 실천적 지성의 표상으로 역사, 문학, 사회과학 등의 지식인들이 모여든 곳이다. 방영웅, 황석영, 이문구 등이 이를 통해 우리 문학을 일궈나갔고, 단 한번의 작품게재로 문인을 탄생시키는 창비의 과감한 방법은 많은 시인, 작가, 평론가들을 발굴해냈다. 강만길, 리영희, 박현채 등은 창비를 통해 ‘분단’과 ‘계급’이라는 두가지 사회모순을 해결해나가려는 움직임을 이끌었다. 80년 언론통폐합조치로 폐간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87년 6월항쟁 후 계간지로 거듭나면서 지식인들의 담론과 토론을 이끌어내는 선봉대 역할을 담당해왔다.

창비가 당대의 현실을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접근했다면, 김병익·김현·김치수·김주연 등이 모여 1970년 탄생시킨 문지는 문학의 순수성과 자유를 옹호하며 창비와는 다른 대립각을 내세웠다. 주로 문학에 대한 지적접근과 형식미학적 논의들이 이뤄졌다. ‘한국문학사’(김윤식·김현), ‘상황과 문체’(김치수), ‘지성과 반지성’(김병익) 등의 성과물을 남겼다. 그 외, ‘청맥’과 ‘씨알의 소리’도 우리 지성계의 한축을 담당했던 것으로 꼽혔다.

국내 지성사적 흐름을 주도했던 저술로는 총 6명이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김용섭)를 떠올렸다.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내재적 발전을 이론적으로 정당화시킨 성과물이기 때문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함석헌), ‘한국사상의 방향’(박종홍) 등 자주적인 지성을 펼친 흐름들이 역시 중요하게 기억됐으며, ‘한국과학기술사’(전상운), ‘한국현대문학사’(조연현), ‘한국미술사’(김원룡), ‘한국의학사’(김두종), ‘한국문화사서설’(조지훈) 등 각 학문별 史的 연구가 이 시기 그 첫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국외저서로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조셉 니덤)이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가장 강하게 남아있으며, ‘기술과 차이’(데리다), ‘말과 사물’(푸코), ‘구조적 인류학’(레비스트로스) 등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기 국내에 수입돼 새로운 시적흐름을 배태시키기 시작했다.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문제적 인물’로는 김수영과 박종홍이 나란히 꼽혔다. 사학자 민석홍, 이기백, 화학자 이태규(유타대), 지리학자 이찬, 미술사학자 김원용, 조각가 권진규 등도 우리사회 한 흐름을 담당했다.

60년대는 반공주의가 지배이데올로기화 하면서 압제의 숨막힘을 안겨주었던 시절이었다. 김지하의 오적 필화 사건(5), 남정현의 ‘분지’ 사건, 동백림사건(3), 전태일 분신 사건(4)이 모두 이 시기에 집중됐다. 그에 뒤 이은 국민교육헌장 제정(2)은 어느 학자의 말마따나 ‘개인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분위기와 함께 사회과학은 침체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본격적인 미국 유학시대가 개막하고 유학파의 학계진입이 시작되었다(2). 민족주의를 학문의 방법론으로 구체화시킨 일련의 작업이 대두되었고, 그 대표적 목표로 ‘식민사관’의 극복이 외쳐졌다(2).

많은 이들이 60년대 지성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건으로 김수영-이어령에서 촉발된 순수-참여문학 논쟁(6명)을 꼽았다. 문학은 당대적 문제의식이 집결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 외에 한국행정학회와 한국사연구회가 창립되었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설립돼 국가주도 과학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이론적 사조로는 구조기능주의 및 근대화론이 도입된 것, 미국의 행태주의와 정치과학이 도입된 것이 학자들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다. 미국식 정치학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71~1980 : 지성의 숙성기

실천적 지식인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70년에는 단행본 저서들이 쏟아져 나와 우리 지성계를 더욱 풍부히 했다. ‘민중’과 ‘민족’이 키워드로 등장했으며, 제1세대 여성학자도 이 시대에 태어나면서 또 다른 지성사적·실천적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책으로 총 15명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꼽았다. 1974년 창비에서 출간된 이 책은 현대사와 국제정치를 바라보는 우리 시각에 전환점을 마련해준 고전적 사회계몽서였다. 리영희의 또 다른 저서 ‘8억인과의 대화’와 함께 한때 금서로 지명되었으나, 유신체제에 이 책을 거쳐가지 않은 지식인과 대학생은 없었을 정도로 그 파급력은 컸다. 당시 한국자본주의가 처했던 정치경제적 문제들을 치열하게 고민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에 대해선 총 12명이 가장 영향력 있던 지성으로 기억했다. 송건호·강만길 등 50명이 저술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전6권) 역시 당시 양심적 지식인들의 필독서였다.

이 시기 문학계 지식인들은 이론과 실천에서 타분야보다 한발짝씩 앞서갔다. 가장 첫 손에 꼽히는 성과물은 김윤식의 ‘한국근대문학비평사’이며,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한국문학사’/‘상상력과 인간’(김현), ‘민중시대의 문학’(염무웅)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오적(김지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조세희), ‘사람의 아들’(이문열), ‘농무’(신경림), ‘장길산’(황석영) 등의 문학작품도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외 학문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저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역사학계에서는 ‘한국고대사론’(이기백),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조선후기 상업자본 연구’(강만길), ‘서양근대사연구’(민석홍), ‘한국유학사’(배종호), ‘중국근대사연구’(민두기), ‘독립협회 연구’(신용하) 등의 연구가 이어졌고, 경제사의 ‘한국경제사론’(박희범), ‘후진국 경제론’(조영범), 교육학의 ‘교육과 사회학’(정범모) 등이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특히 여성학 1세대 이효재의 저술들이 파장을 일으켰으리라는 것은 쉽사리 짐작된다. 또 ‘한국사료총서’(국사편찬위원회), ‘고전국역총서’(민족문화추진회의)도 빼놓을 수 없는 흐름으로 지목됐다.

국외저술로는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위시로 자본주의 이행논쟁을 이끌었던 ‘자본주의 발전의 연구’(돕)와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스위지)이 꼽혔고,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이나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지라르의 ‘소설의 이론’ 등도 지성인들의 호기심을 가득 채워주었던 저술로 기억됐다. 또한 잡지로는 ‘경제사학’, ‘실천문학’ 등이 이 시기 첫발간되어 현재까지 그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영향력 있는 지성으로는 백낙청, 박현채 등은 물론이고 국내 과학기술행정의 기틀을 세운 최형섭, 물리학자 조순탁, ‘민족주의비교연구회’의 황성모를 비롯해 서양사학자 양병우, 문학평론가 여석기, 지리학자 박동원, 국문학자 정병욱 등이 꼽혔다. 그 외 종속이론가들의 활발한 기운을 떨쳤다.

그렇다면 가장 영향력이 컸던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총 13명이 유신/긴급조치를 거론했고, 그보다 1표를 더 얻어서 광주민중항쟁이 제 1의 사건으로 떠올랐다. 70년대 학계는 그야말로 논쟁의 공간이었다. 현재의 중진원로 학자들의 내공은 이 때의 논쟁에서 길러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한국사회구성체 논쟁, 리얼리즘 논쟁, 청년문화론 논쟁, 저항적 민족주의와 개발 민족주의의 대립적 전개가 대표적으로 거론됐다. 그 외에 내재적 발전론의 심화, 제3세계론의 대두, 사회사적 방법론의 등장, 독일법학의 소개, 종속이론 전개, 공간분석적 지리학 도입, 비판철학의 수용 등 학문과 담론의 물결이 현실과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제3세계 지식인이라는 의식 속에서 치열하게 흘러갔다.

과학 쪽에서는 대덕연구단지와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설립, 삼성전자의 메모리칩 개발, 과학기술학 관련 협동과정 개설, 한국과학사학회를 중심으로 한 과학사 연구의 본격화 등이 기억되고 있었다. 그 외에 동아일보 사태, 민청학련/인혁당 사건(5),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2), 한완상 교수 해직 등이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으로 기억됐다.

대학사회와 관련해서는 교수계약제가 처음 도입되었고, 서울대 지리학과 박사과정 개설, 대학의 계열별 모집, 각 대학에 교양과목으로 여성학 등장이 주목할 만한 일로 꼽혔다.

■1981~1990: 과잉이념의 시대

80년대의 지식인들은 이념적 대립구도 속에 위치해 있었으며, 특히 저항적 지식인들이 선두에 서있었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70년대의 이론적 고민들은 이 시기 좀더 왕성한 실천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후반으로 갈수록 여성, 생태, 환경을 주요 과제로 등장한, 즉 제3의 주체들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 시기였다.

‘계급’과 ‘민족’(분단)이라는 양 모순에서 지식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건 맑스의 저작들이었다. 총 16명이 이를 꼽았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등 당시로서는 금기되었던 사상으로 한국사회에 이념적·실천적 불을 지폈고, 많은 지식인들이 맑스주의를 기반으로 자신의 지적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한국의 문제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던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프랑크, 아민과 같은 종속이론가들의 저술과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도 큰 영향을 끼쳤다.


국내저서로 가장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건 조동일의 ‘한국문학통사’(전5권)로, 우리문학사에서 자생적인 좌표를 제시하며, 기존 국문학 성과를 광범위하게 수용하고 새로운 자료를 찾아낸 것으로 평가됐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까지 출현한 신흥종교들의 시가 ·경전 등을 다뤄 역사변환기 문학의 양상을 고찰한 점과, 전통사회의 기층문학이던 구비문학의 활기찬 모습을, 의병투쟁에서 나온 문학, 망명지의 문학, 필사본 전승 문학 등을 통해 포용한 점 등이 돋보인다고 평가됐다. 맑스주의 사회학자 김진균의 저서들과 동양학계에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했던 김용옥, 맑스저서를 완역했던 김수행 등이 뒤를 이어 우리 지성계에 큰 힘을 끼친 것으로 평가됐다. 또 최장집의 한국민주주의관련 저술, 한상진의 중민론 관련 저술, 신용하, 박영신 등의 저술이 중요한 것으로 꼽히고 있다.

이 시기 문학에선 ‘태백산맥’과 ‘아리랑’(조정래)이 최고봉에 서 있었으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황지우), ‘노동의 새벽’(박노해) 등이 문학계를 넘어 지식인들을 자극했다.

여성학자들은 이 시기 (남성)계급과 민족을 벗어난 또 다른 주체로서 입지를 굳건히 했다. ‘한국가족론’(이효재), ‘여성운동의 방향정립을 위한 이론적 고찰’(심정인), ‘제3세계 여성노동’(한국여성평우회) 등 가족주의, 여성 노동자들의 운동이라는 시급한 과제들이 여성학자들을 배출해내기 시작했다. ‘여성해방이론의 쟁점’(하트만 외), ‘여성해방의 이론체계’(앨리슨 재거), ‘성의 변증법’(화이어스톤)도 번역되어 활발히 읽혔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또 다른 주체로서 환경주의적 지성이 등장했는데, 아직은 번역서들만이 소개되는 수준이었다. ‘침묵의 봄’(레이첼 카슨), ‘현대환경론’(D. 페퍼) 등이 소개됐다. 그 외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 엘리아데의 ‘우주와 역사’, ‘종교형태론’도 지식인들의 사유를 넓혀 놓았다. 

지성사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들로는 여성학자 이효재, 국문학자 조동일, 지리학자 유우익, 최창조(풍수)와 무용평론가 채희완 등이 꼽혔고, 하버마스와 데이비드 하비 같은 지성도 국내 학자들의 학문적 모태가 되었다.

80년대는 광주민중항쟁으로 인한 대미인식 변화를 몰고왔고, 전두환 정권의 학원탄압과 해직교수 사건(3), 교수들의 시국선언과 언론 통폐합, 6월항쟁(7), 올림픽, 사회주의의 몰락(3)을 통해 거시적 지도가 그려진다.

지식사회를 뜨겁게 달군 논쟁으로는 민족/민중문학 논쟁(5), 맑시즘의 풍미와 이를 둘러싼 갑론을박(6), 사회구성체 논쟁(8), 실학논쟁, 노동문학 논쟁 등이 대표적이다. 학계 지형과 관련된 변화로는 사회과학 학회들의 탄생했으며 분과학회들이 갈려나가기 시작했다. 무크지의 시대가 열린 점, 전후세대의 학계 진입, 비판사회과학의 성립, 한국여성연구의 자성론 대두, 민교협(5)과 학단협의 출범(9)으로 인한 지식인들의 결집 등이 거론됐다. 그리고 김용옥의 동양학 관련 저술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널리 읽히고, 양심선언과 함께 교수직을 그만둔 사건이 남긴 인상(2)도 지나칠 수 없는 지성의 한 풍경이었다. 1982년 아시아 최초로 이화여대에 여성학과가 설립되기도 했다.

1990~현재: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의 심화

탈계급, 탈민족의 흐름 속에서 탈근대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추구했던 90년대는 다양한 지성들이 출현했던 시기다. 영향을 끼쳤던 세대의 스펙트럼도 넓고, 각 학계마다 세부적이고 다양한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이 시기 압도적으로 지성계를 뒤흔들어 놓은 이는 푸코로 꼽혔다. 그의 탈구조주의는 80년대식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지식인들에게 큰 파장을 일으켰고, 학문 전반에 걸쳐 푸코의 사상을 기반으로한 연구들이 활화산을 이루기 시작했다. 데리다, 라깡, 들뢰즈 등의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많은 지성인들이 90년대에 가장 유력했던 지성적 기반으로 꼽고 있다. 이들 외에도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국내의 다른 어떤 저술보다도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와 알튀세르의 수많은 저작들 역시 기존 맑스주의를 반성하며 새로운 지적 틀을 제공했던 사상으로 꼽혔다.

영향을 끼쳤던 국내저작들의 절반은 여전히 80년대의 인물들이었으며, 나머지 반은 각개약진으로 등장한 여러 학자들이다. 김현의 문학전집이나 백낙청의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이 여전히 지성계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이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최장집), ‘데리다와 노장의 독법’(김형효), ‘맑스 역사관 재검토’(이병천), ‘문학의 귀환’(최원식), ‘세계문학사의 전개’(조동일), ‘한국근대사’(강만길) 등 학계의 중진급 혹은 그 이상의 학자들이 우리 지성계의 뿌리가 좀더 깊게 자리잡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했었던 걸로 기억됐다. 다른 한편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서중석), ‘사건의 철학’(이정우)과 비교적 젊은 학자에 속하는 이진경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진경), ‘과학기술의 사회학’(이영희), ‘과학지식과 사회이론’(김경만) 등도 우리 학계의 중요한 작업으로 지목되었다.

이 시기 지성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문제적 인물로는 장회익, 백낙청, 최장집 등 이제는 원로급에 속하는 학자들 뿐만 아니라, ‘학벌없는 사회’론을 펼치는 철학자 김상봉, 맑스주의자 이진경, 백영석, 그리고 조희연 등이 꼽혔다.

지성사에 영향을 미쳤던 사건으로는 13명의 학자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와 확산, 이를 둘러싼 논쟁을 꼽았다. 6·15 남북정상회담과 통일담론 활성화(7), IMF 위기와 구조조정(5), 페미니즘 논쟁(4), 식민지근대화 논쟁(4), 디지털 혁명(5), 박정희 개발독재 논쟁(2), 문민정부 출범(3), 월드컵(2), 탈민족주의 논쟁(3), 보수세력의 소수화/주변화(3) 등이 엎치락 뒤치락 이어졌다.

대학사회도 제도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학부제가 시행되었고, 학자 및 논문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교수직을 얻기 힘들어지면서 박사실업자들이 양산되는 문제가 여전히 현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학문적 사건이라 할만한 것은 대중문화론이 확산되었다는 것, ‘한국사회의 이해’ 국가보안법 위해 사건, 민족담론에 대한 여성학의 가열찬 도전, 이문열 등의 극우논객 전면 등장, 한국적 철학 모색 활발, 진보-보수 논쟁의 재현, 해외 지역연구 확대,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 확산으로 이와 관련된 연구 및 연구단체 증폭 등이 언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학술진흥재단의 연구프로젝트 사업의 시행과 이것이 점점 권력화되는 문제(4)를 꼽았다. 그리고 인문학과 기초과학의 위기, 삶의 질에 대한 고민이 모든 학자들에게 동시에, 서로 다른 방향에서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정치적인 사건들도 많았다. 3당합당, 노동자 총파업,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도래, 국보법 철폐 투쟁, 황석영의 방북사건, 노사모의 들불같은 확산, 촛불시위 등을 통한 시민들의 직접적인 정치참여가 한데 뒤섞여서 돌아갔으며, 민주주의의 심화와 이것을 연결시키려는 논의들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나 특별한 담론의 구심점을 만들지 못하고, 분과 학회들이 흩어져서 이슈파이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마지막 시기를 장식한 것은 역시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였다. 많은 이들이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중요한 비중을 두고 있는데, 한국적인 것의 완벽한 보편화가 주는 충격이 그만큼 컸다는 것과 향후 이것이 우리 사회가 안고 가야할 중요한 논쟁점을 포함하고 있다는 판단이 작용하는 듯 보였다.
정리: 강성민·이은혜 기자 editor@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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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 2005-08-24 03: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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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지성인에 의한 비전임 시간강사제도 도입 및 석.박사 대량양산 과 시간강사제 도입 후,전국대학 8만7천여명의 강사 착취사의 면면은 구태여 피하고 있다.
현재.

2중적인 지성인사 일 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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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제대 전체교원 12만1100명 구성 현황
전임 교원/지성인? 5만402명
비전임 교원 9천602명
비전임 시간강사 6만1094명(강사 의존율 50.45%)-월평균 강의료금 50만여원-----착취하는 대학인-지성인 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