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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이라는 질병
파시즘이라는 질병
  • 정과리 / 서평위원·연세대
  • 승인 2001.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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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수상]

수년전부터 지식 사회의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내 안의 파시즘’은 한국사회와 한국지식인들의 생각의 구조에 대한 가장 도전적인 문제제기라 할 수 있다. 처음에 그것은 군국주의의 압제를 겪은 근대 한국인의 체내에 스며든 파쇼적 체질의 정화라는 수준에서 제기된 듯하다. 그러나 운동의 과정에서 그것은 한국인들의 근본적 신념 체계에 대한 도전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것은 근 백 여 년 동안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민족주의적 사유 자체에 혐의를 걸게 된 것이다.

김철·신형기 교수 등이 상재한 ‘문학 속의 파시즘’(삼인 刊)은 그러한 운동의 날카로운 예각을 보여주는 책이다. 여기에서 민족주의는 폭넓게 해체되고 비판된다. ‘폭넓게’라는 말은 문제의 민족주의가 복합적 층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한국의 정체성을 고수하려는 본능적 정신 기제이기도 하고, 동시에 근대화에 대한 갈급한 욕망이기도 하면서 또한 근대를 뛰어넘고자 하는 낭만주의적 동경이기도 하다. 이 다기한 태도들이 ‘민족’의 이름으로 한꺼번에 용인되는 정황, 그것이 한국문학 혹은 한국사에 대한 담론들을 지배해 온 정황이라면, 그 때 ‘민족’은 그 양상들과 별도로 나름으로 주조되어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저 위에 홀로 군림하는 상상적 상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상상적인 것의 상징적 지배를 밑받침하고 있는 요소들을 대충 요약하자면, 자기 동일성에 대한 집착,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어떤 드높은 경지에 대한 열망, 이 집착과 열망을 하나의 이론으로 세우는 호전적(남성적) 심미주의, 그리고 그것에 부추김 받고 동시에 그것을 강화하는 집단 최면 혹은 집단적 용인으로 간추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다시 요약하자면, 송상일이 “국가가 황홀에 빠지면 홀로코스트를 부른다”(‘국가와 황홀’, 문학과지성사)고 말했을 때의 ‘국가’와 ‘황홀’의 결혼, 즉 민족의 절대화와 황홀의 전체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또다시 줄이면, 그것은 결코 도달되지 않는 이상적 자아에 대한 전면적·환각적 선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도달되지 않는? 그렇다. 결코 도달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에 대한 갈망이면서 동시에 절대의 濫造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작가 클라우디오 마그리스(Claudio Magris)는 하이데거와 한나 아렌트의 불행한 사랑을 다룬 ‘키취와 열정’(‘유토피아와 환멸’, 불역본, L’arpenteur, 1999)이라는 글에서 파시즘적 사고를 ‘키취’적 취향으로 파악한다. 절대에의 감각이 한 치만 비켜서면 곧바로 절대에 대한 과장과 제스처로 떨어지고 그만큼 세속적 욕망의 장마비로 홍수진다는 것이다.

필자들이 섬뜩하게 제기하는 것처럼 한국의 지식사는 제 안에 이 무서운 파시즘을 양육해 온 것일까. ‘내 안의’ 파시즘은 그러나 그것을 때려 잡을 괴물로 보지 않고 치유해야 할 자신의 질병으로 본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건강한 사회를 향한 소망의 실행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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