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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동향: 헌법 개정 논의 발화
학계동향: 헌법 개정 논의 발화
  • 신정민 기자
  • 승인 2005.08.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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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국민, 소수자인권 등 주제 다양... 성급한 명문화에 대한 우려도

최근들어 헌법 개정논의가 정치권 차원을 넘어 학계로 불붙기 시작했다. 현행 헌법은 광복 이래 9번째로 1987년에 개정됐다. 그 후 18년이 지난 지금, 개정논의가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그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은 우리사회의 문제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법학계는 물론이고, 사회․정치․철학계, 시민단체 등 개정논의는 활발하다. 문제제기에 있어 탈국가, 소수자인권, 지방자취 등 헌법 조문의 구체적인 부문까지 거론되고 있다.   

지난 7월 ‘헌법개정,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한국공법학회(회장 홍정선)의 연차학술대회와 ‘87년 체제의 극복을 위하여-헌법과 사회구조의 비판적 성찰’이라는 주제로 열린 창비․시민행동 공동심포지엄에서는 현행 헌법에 대한 학계의 성향과 고민이 그대로 드러난다. 

첫번째 논의주제로 떠오른 것은 정치권에서 논란의 대상이었던 정치제도 및 행정과 관련된 개헌 논의다. 대통령 중임제 여부나 내각제, 그리고 중앙정부 중심의 지방자치제도 개편 등이 그것이다. 법학자들의 개헌 인식은 지난 공법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도회근 울산대 교수(헌법)의 발제문에 비교적 잘 드러난다. 도 교수는 법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헌법개정의 쟁점과 과제’를 발표했는데 “응답자들은 지방자치 확대권과 군인군무원의 국가배상권을 제외하면 개정반대 의견이 지배적”이라고 정리했다. “현행 헌법의 문제이기보다 헌법 운영방식의 문제로 불순한 개헌론에 대한 학자들의 경계”라며 이 문제에 대해 함구해온 법학자들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짚어보였다.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소속 학자들은 소수자 인권 등과 관련해 좀더 세밀하게 파고든다. 이상수 한남대 교수(기초법), 김승환 전북대 교수(헌법), 조국 서울대 교수(형법), 강경선 방통대 교수(헌법), 오동석 아주대 교수(헌법) 등이 여기에 속한다. 김승환 교수는 “독일기본법은 나치 독일의 역사에 대한 반성에서 ‘국민’이 아닌 ‘인간’으로, 성별, 종족별 등의 평등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한국의 헌법에서는 해석의 개방성에 기대야한다”라며 1949년에 제정된 독일기본법이, 오히려 1987년에 개헌된 한국의 헌법보다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잘 보장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장애자나 노약자, 여성 문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된 동성연애나 트렌스젠더의 문제도 점점 논의의 장에 들어서고 있다. 조재현 천안대 교수(헌법)는 최근 동향에서 “트렌스젠더는 이미 1980년대 독일에서 확립됐고, 동성애의 경우 미국에서는 사회적 결합체로, 네덜란드는 혼인의 형태로 사회적 지위를 인정하는 추세지만, 국내에서 이와 관련한 입법차원의 논의는 전무한 실정”이라고 말한다. 조 교수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한국과 이들 선진국의 성적 소수자의 현실을 비교해볼 때 한국의 논의가 그다지 늦어보이지는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법학계의 이런 논의는 사회철학계를 비롯한 시민단체에서의 활발한 운동과 개헌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인적에서 상당 부분 연계돼 있다. 시민단체 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곳은 ‘함께하는시민행동’이다.

창비와 공동심포지엄을 개최한 데 이어, 헌법다시보기 팀을 구성해 홈페이지를 문화, 평화, 생명(가칭), 여성, 자치 등 분야를 나눠 구체적인 텍스트 분석과 비판, 대안을 내놓고 있다. 정선애 시민행동 정책실장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헌법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결성됐으며, 헌법에 대한 논의의 지평 확대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기획했다고 전한다. 참여하는 학자들도 홍윤기 동국대 교수(철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정태호 경희대 교수(헌법), 한상희 건국대 교수(헌법)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이들 학자들의 생각은 이미 지난번 공동 심포지엄 발표에서 대부분 드러났다. 박명림 교수는 “헌법의 주체를 정치권 중심에서 시민사회로, 주제를 권력구조 중심에서 헌정체제 전반에 대한 개혁으로 전환하기 위해 개헌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주장한다. 또한 홍윤기 교수는 “1987년 개헌이 6월항쟁의 직접적인 소산이라기보다는, 절대왕조체제를 벗어난 과도기 정치세력들의 권력협정”이라고 그 한계를 지적한다. 이어 홍 교수는 ‘국민’ 개념에서 ‘시민’ 개념으로 헌법에서 규정한 사회구성원 개념을 전화시켜야 한다”라며 엘리트적이고 폐쇄적인 국가주의 극복논의를 펼친다.

홍 교수의 시민론은 페미니즘계의 시각과도 연결된다. 정희진 서강대 강사(여성학)는 “급격한 사회구조적 변화가 여성에 의해 주도되고 있지만, 현행 헌법이 남성국민적, 혈연적, 민족주의적이며 서구중심의 근대성 담론을 여과없이 차용했다”라고 비판한 뒤 “비국민적 시각에서 헌법의 논의가 필요하다”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논의에 참가하지 않는 대부분의 법학자들은 이런 개정움직임에 대해 유보적이다. 그 이유는 헌법이 다양한 법적 주체들에 따라 해석을 다양하게 할 수 있게 충분히 추상적이고 불확정적으로 서술돼 있어서 굳이 개헌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상희 교수는 “개헌보다는 기존 헌법을 해석하고, 싸워가는 과정이 더 필요하다”라고 전한다. 또한 일부에서 제기하고 있는 거친 개헌론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이국운 한동대 교수(헌법)는 “헌법은 법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최근 헌법에 대한 논의의 풍성함은 좋은 현상이지만, 현행 헌법이 문제 있다고 극복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은 과잉”이라고 말한다. 또한 정태호 교수는 “일부 학자나 시민단체의 견해가 헌법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만, 현행 헌법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검토가 선행된 가운데 문제제기가 이뤄져야한다”라며 성급한 명문화 요구는 지양해야할 점으로 지적한다.

강경선 교수는 “각계각층의 관련자들을 모아 의견을 수렴하고, 학자들을 중심으로 장기적인 헌법연구의 논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라며 학계 차원의 주문을 던졌다.

최근 제기되고 있는 개헌논의는 총론부터 각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능동적인 것이었든, 아니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든 간에 기성의 사회적 합의를 제대로 분석하고 그것이 갖는 사회적 역할을 음미하는 과정을 갖지 못한채, 시대적 흐름과 새로운 이념만으로 또 다른 합의를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법생산과 원칙 자체에 얽매이기보다는 민주적 가치를 제도화·내면화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화두가 던져지길 기대해본다.

신정민 기자 jm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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