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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현대 사회의 양면성 - 『불안한 현대사회』(찰스 테일러 지음, 이학사 刊), 『소유의 종말』(제러미
[테마]현대 사회의 양면성 - 『불안한 현대사회』(찰스 테일러 지음, 이학사 刊), 『소유의 종말』(제러미
  • 교수신문
  • 승인 2001.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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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12 16:34:26
정태석 / 동해대·사회복지학

최근에 번역 출간된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 사회’와 제러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은 현대 사회의 변화 양상들이 지니는 양면성에 주목하면서 바람직한 변화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게다가 모두 현대 사회의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 문화적 해결책에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테일러가 현대성(modernity)의 철학적 논쟁─현대와 탈현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맥락에서 이론적인 논증에 주목하는 반면에, 리프킨은 사회과학적인 맥락에서 현실적 설명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간에 차이가 존재한다.(‘불안한…’에서는 모더니티를 현대 사회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책이 현대성 논쟁의 맥락 속에 있다는 점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잘못된 용어 선택이다). 이것은 아마도 철학자와 사회과학자간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대화적 관계’ 통한 불안의 극복
테일러는 현대성의 양면적 성격을 동시에 파악하고 전통으로의 복귀나 탈현대성을 주장하는 시도들과 거리를 두면서 현대성의 긍정적 측면들을 되살려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하버마스(포괄적 합리성)나 기든스(고도 현대성)의 전략과 맥이 닿아있다. 그는 개인주의, 도구적 이성의 지배, 정치적 무기력은 현대성의 불안의 세 근원으로 보고 이것들은 각각 삶의 의미 상실(도덕적 지평의 실종), 도구적 이성 앞에서 삶의 목표의 소멸, 자유·자결권의 상실이라는 불안 요인들로 나타난다고 본다.
테일러는 자기 성취(self-fulfillment) 또는 자기 진실성을 추구하는 개인주의 문화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현대성에서 자기 성취와 같은 개념들 뒤에 숨어 있는”, 자기 진실성의 이상이 안고 있는 ‘도덕적 힘’을 발견하고자 한다. 자기 진실성으로부터 도덕적 이상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 의식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는 자기 성취라는 개인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현대성의 옹호자나 자기 성취를 이기주의, 도덕적 해이, 자기 도취로 비판하면서 객관적 이성에 의존하려는 현대성의 비판자 모두와 거리를 둔다.
그는 자기 진실성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인간 생활의 기본적 조건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 특성’에 주목한다. 아노미나 와해를 추구하는 개인주의가 아닌 도덕적 이상으로서의 개인주의는 개인들이 마땅히 어떻게 남들과 함께 살아야만 할 것인가에 대한 견해들을 제공해야만 하는데, 테일러가 제시하는 것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차이의 인정과 균등한 기회를 요구하는 공정성의 원리, 그리고 사적인 영역에서 정체성을 구현해 내는 사랑의 관계이다. 이것들은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의 ‘의미 지평의 공유’를 요구한다. 말하자면 가치 평가의 공통성을 확대·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의미 지평을 공유하는 과정은 상호 대립적인 관점들 사이에서 자기 진실성의 의미를 획득하려는 설득과 투쟁의 과정이다. 고립적 원자주의나 도구적 이성의 지배라는 비관적 관점에서 벗어나 자기 진실성의 이상을 긍정적으로 밀고 나가려는 내재적인 추진력과 요구들을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념들의 투쟁은 사회조직의 방식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 여기서 테일러는 다시 하버마스와 기든스를 따라 시장의 효율성과 국가(정부)의 평등주의적 개입이 균형을 이루는 상태를 지향한다. 그리고 국가와 시장의 합동 작전에 대처할 수 있는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민주적인 통제력에 희망을 걸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성의 불안을 어떻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은 보다 구체적인 현실 분석을 통해서 가능한데, 리프킨의 글은 바로 이런 점을 보여준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글로벌화, 정보화, 자동화의 진전은 경제적 영역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과 문화의 영역까지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여기서 정보화 시대의 글로벌 경제와 사회적 삶이 과거로부터 연속적인가 단절적인가 하는 점은 오랜 논란거리였다. 그런데 리프킨은 변화의 연속성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과도하게 극적이고 단절적인 모습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리프킨은 새로운 세계에서 “시장은 네트워크에 자리를 내주며 소유는 접속으로 바뀌는 추세”라고 말한다. 한 때는 물적 자본의 소유권이 근간이었지만 점점 주변적 지위로 밀려나고 반면에 지적 자본이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된다. 새로운 시대에는 소유권보다 접속권, 이용권이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재화 경제에서 서비스 경제로의 이행, 제품 주기의 단축, 리스, 렌탈 산업의 활성화 등에 따라 기업이나 소비자들은 이제 소유권을 가지려고 하기보다는 접속권을 확보하려고 한다. 이에 따라 판매자와 구매자의 재산 교환은 네트워크 관계로 이루어지는 공급자와 사용자간의 단기 접속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경제활동과 인간의 삶이 한층 자유롭고 평등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해 리프킨은 명확한 대답을 유보한다. 미래는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접속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거대한 미디어·통신 기업의 전지구적 독점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접속의 시대에 착취가 오히려 심화되고 경제적, 사회적 격차가 심화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접속의 시대’에도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원리가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제품의 감량화, 물리적 내용을 대체하는 정보, 서비스의 비중 증대, 소형화 등에 따른 경제 생산물의 물질성 감소, 부동산 소유의 감소, 리스 산업, 아웃소싱 등은 변화된 환경 속에서 경제적 효율성과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변신을 보여줄 뿐이다. 거대 자본들은 여전히 방송 주파수, 광섬유 케이블, 통신 위성, 콘텐츠, 상표권, 지적재산권, 정보기술 등을 소유하기 위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접속이 소유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접속을 위한 새로운 소유가 생겨나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의 사적 소유와 이윤추구 논리는 변하지 않았다. 경제 생산물의 물질성 역시 질적으로는 감소했지만 양적으로는 감소하지 않았다. 온라인 거래 뒤에는 여전히 거대한 상품의 이동 과정이 뒤따른다. 네트워크는 확장된 시장인 것이다.
게다가 디지털 통신 기술의 발달과 문화 상업주의의 시대가 열리면서 일상생활과 문화가 급속히 상업적 영역에 포섭되고 있다. 기업들은 소비자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마케팅 전략으로서 ‘소비자 공동체’를 형성하여 인간관계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고 한다. 공론장의 활성화 가능성으로 기대를 모았던 인터넷은 금새 ‘상업광고의 경연장’이자 욕망의 해방구가 되어 파편화된 문화의 소비를 부추기고 있다. 테일러와 리프킨은 ‘의미 지평의 공유’와 ‘공동의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하는 공동체에 기대를 걸고 있지만, 정보 공유권은 제한되고 있으며 ‘중요하지만 상업성은 없는 사유’가 배제됨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공유된 이해와 가치의 형성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네트워크는 확장된 시장
문제는 접속의 시대에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이제 상품화를 통한 이윤추구의 영역을 문화와 일상생활로 확산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환경파괴로 이어진다. 이러한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는’ 문화 자본주의의 환경 속에서 공동체적인 인간관계는 어떤 운명을 맞을 것인가. 현대 사회에서도 자기 진실성의 이상을 추구하면서 문화적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설득하고 투쟁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이들이 아마도 현대 사회의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역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비관적인 변화 상황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존재 조건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딜레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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