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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함석헌[63]: "信天翁, 저는 이 새가 좋습니다"
내가 본 함석헌[63]: "信天翁, 저는 이 새가 좋습니다"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5.06.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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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첫 번째 해직을 당하고 집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어느 날 전화가 걸려 왔다. 그러니까 1976~1977년경이 아니었을까. 받고 보니 해동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전혀 의외의 전화였다. 사연인 즉 그 회사에 나와서 사원들을 상대로 교양강좌를 해달라는 청탁이었다.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래서 재차 되물으면서 당시의 나의 처지를 설명하고 정중히 거절하였더니 상대방의 반응이 더욱 의외였다. 전화를 걸고 있는 당사자가 사장이며 나의 모든 처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에게 교양강좌를 부탁한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더 이상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약속된 날에 회사에 나갔더니 사장 임석하에 백명 정도의 사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장님이 직접 노트에 나의 강연내용을 메모하는 것이 아닌가. 강사료도 당시로서는 특별한 예우를 받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새삼 생각해보니 나의 10년 가까운 해직기간 동안에 처음이자 마지막인 의외로운 이벤트였다. 내가 심의석(沈宜錫) 사장을 처음 만나게 된 내력은 이러했다. 당시의 나의 형편이 형편이었던 만큼 때때로 심사장을 머리에 떠올리면서도 그와의 접촉은 해직기간 동안에는 다시 없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기억도 거의 뇌리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로부터 두 번째 전화를 받은 것은 1984년에 완전 복직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나의 고대 연구실에서 그를 반가이 맞았다. 복직되면서 마땅히 그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전화라도 한번 걸었어야 할 내가 아니었던가? 나는 미안한 마음과 반가운 마음이 뒤범벅이 되면서 그를 맞이했다.

전라남도 순천 출신의 말하자면 전라도 엘리트에 속하는 분이었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한 재무부 관리였던 그는 아마 그대로 관리생활을 계속하였더라면 지금 쯤은 전직 정관으로서 사계의 권위를 누릴만도 한 그런 분이었다. 그런데 처남이 연소하였던 관계로 빙장되시는 분의 간곡한 부탁을 물리치기가 어려워 나를 초청하였을 당시에는 처가의 회사 사장직을 맡고 있을 때였다는 것이다. 처남이 충분히 성장하였기 때문에 그 자리는 처남에게 넘기고 자기는 지금은 <해동문화사>라는 출판사를 자영하고 있는데, 첫 사업으로 고등학교 학생들의 대학입시용 서적을 기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난처한 일이었다. 공과대학 교수가 나설 땅이 아니었다. 과학논술을 위한 대학입시용 녹음 테이프 제조는 더더욱 아니었다. 나의 난처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심사장님은 바로 사태 파악을 한 듯 하였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청탁이 있다는 것이다. 출판사로서 무게 있는 책을 내고 싶으니 나보고 원고를 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사연으로 나의 첫 저서라고 할 수 있는 <科學人의  歷史意識>이라는 저서가 <해동문화사>에서 나왔고 다행스럽게도 출판협회의 <오늘의 책>에 뽑혀서 귀한 상패도 받았다. 이어서 <과학은 무엇인가>라는 두 번째 저서도 <해동문화사>에서 나왔다.

<씨?의 소리>지 1989년 5월호 <씨?의 소리 소식> (p.192)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다.

 

<운영위원회 발족-위원장에 심의석사장- 「씨?의 소리」는 이번에 계회·판매 광고 등 운영전반을 담당할 기구로 운영위원회를 설치하고 운영위원장에 전 해동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 사장 심의석(沈宜錫)님을 선임하였다. 또한 회계 일체를 담당할 운영위원에 공인회계사 이강진(李康鎭)님을 선임하였으며 앞으로 각 분야별 운영위원을 선임해 나갈 예정이다.>

 

지금도 때로는 옛 지기(知己)와 같이 만나고 그간 지내온 일을 서로 나누며 한 때를 즐기고 하는 사이로 지내고 있지만 <씨?의 소리>지를 맡아서 초창기에 그야말로 어찌 할 바를 몰라 우왕자왕하고 있을 때 실질적으로 <씨?의 소리>지 판매에 전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시고 도와주신 심의석님께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씨?의 소리>지 1989년 11·12월 합병호 <씨?의 소리 소식>(p.195)란에 <기념사업회 운영위원회 모임>의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지난 10월 19일 오후 6시 김동길 박사댁에서 함석헌선생, 기념사업회 제1회 운영위원회가 열렸다. 운영위원 총 23명 중에서 13명이 참석했다.
운영위원장 김동길박사 사회로 시작한 동 운영위원회는 씨?의 소리 발행인 김용준박사의 씨?의 소리 상황보고에 이어, 자유로운 분위기 가운데 토의가 있었다.
김용준 박사는 보고를 통해 “씨?의 소리가 1988년 12월호로 복간한 이래 현재까지 11회 발간(10월호까지)되는 가운데 5천여만원의 후원금으로 유지되어 왔으며 후원금 중에는 본인도 천여만원을 입체해 넣었고 현재 월 5백여만원의 적자를 보고 있다”고 하면서 씨?의 소리에 대한 좋은 방향을 의논해 달라고 했다.
이어서 운영위원회 토의 결론은 아래와 같다.
①「씨?의 소리」는 전국적 규모로 확대하기보다는 동인지 방향으로 현실대로 조정해 나간다.
② 「씨?의 소리」적자 및 부채 관계는 90년 1월호까지 운영위원들이 월 25만원씩 2회 협조하기로 한다.
③ 기념사업회 기금은 기금대로 계속 확장 운동을 펴나간다. (참석자: 김동길 이문영 공덕귀 김용준 심의석 백종무 이태영 계훈제 조형균 이윤구 위경선 정상복- 최진삼 김종영 박선균 박영자 배석)>

 

지난 번에 소개한 장기려박사님과의 조찬모임이 있기 전의 운영위원회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로 기념사업회의 활동은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회현동 사무실도 1989년 말에 철수하고 쌍문동 함선생님 댁 지하실을 개조하여 사무실로 사용하면서 많은 분들의 후원금으로 <씨?의 소리>지 발행을 근근히 이끌어 가고 있었다.

 

<선생님, 저는 이 새가 좋습니다. 신천옹(信天翁)이라 이름한 이유는 이 놈이 날기는 잘해 태평양의 제왕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고기를 잡을 줄을 몰라서 갈매기란 놈이 잡아먹다가 이따금 흘리는 것을 얻어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 일본 사람은 그 새를 아호도리, 곧 바보새라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유는 이 바보새란 이름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 사는 꼴도 바보새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해방 후의 제 살림은 그렇습니다. 마음은 푸른 하늘에 가 있으면서 밥벌이할 줄은 몰라 여든이 다 되어 오는 오늘까지 친구들의 호의로 살아가니 그 아니 바보새입니까? 제가 이북 하늘을 바라보며 가슴 속에는 여름 구름산 같이 떠오르는 말을 품으면서도 말해줄 어느 얼굴 하나를 못 찾아내서 발바닥을 치며 퍼득이는 것도 이 하늘 바라기와 갈매기의 관련 비슷한 무슨 미묘한 모순이 있어서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이것은 또 왠일입니까? 그렇게 말은 할 것이 있는 데 바라보고 할 얼굴을 못찾아내어서 안절부절하고 있는 제 머리 속에 갑자기 어디선지 ‘남강 선생님 영 앞에’ 하는 소리가 살별처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저 자신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분명 선생님의 영이 바보처럼 가엾어 퍼득이는 제 꼴을 보시다 못해 오셔서 계시해 주신 것이라고 밖에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이 자식아, 말할 데가 없으면 왜 나한테 못하느냐?”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영입니다. 일순간에 무지한 뱃꾼놈의 갑판 같은 이 서울의 학대와 모욕을 다 잊고 태평양의 상공을 날게 됐습니다. “이제 둥지 안에 누워 자는 고운 새끼를 먹일 것 얻노라고 해가 멎도록 골몰하게 다니던 늙은 비둘기의” “훨 훨 훨 날아와서 벅벅 구르르”하는 인자한 눈동자와 음성이 들려 옵니다.> (전집 5: 349-350)

 

내가 20년 3개월 동안 <씨?의 소리>지를 맡아 발행하는 동안에 선생님 돌아가신 사건과 그 일주기 추도식이야 말로 가장 큰 행사가 아닐 수 없다. 일주기 추도식은 수유리 한국신학대학원 강당에서 500여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당연히 기념사업회가 주최한 것이지만 여러 가지 관계로 결국 나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씨?의 소리>지 1990년 3월호에 자세히 당시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그날의 모든 식순을 상세히 소개하는 것은 생략하겠다. 다만 가족 대표로 나온 함선생님 둘째 사위 되시는 최진삼 장로님의 인사의 말씀에서 위에 소개한 <남강 선생님 영 앞에>라는 선생님의 글의 일부가 낭독되었는데  당일의 순서 중에서 가장 나의 가슴을 울리는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의 마음을 그대로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아 다시 한번 선생님의 모습이 그리워 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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