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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연구 +3 -3
융합연구 +3 -3
  • 오상현
  • 승인 2021.11.03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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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저는 물리학 박사과정생입니다. 얼마 전 작가 이상의 연작시 "삼차각설계도"와 "건축무한육면각체" 일부를 4차원 기하학과 물리학으로 해설한 논문을 냈습니다. 그 융합 연구 과정에서 제가 만난 세 가지 행운과 세 가지 장벽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제가 불평이 많은 사람인지라 행운보다 장벽 얘기가 긴 점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첫 번째 행운은 교수님과의 수평적인 협력과 열린 소통입니다. 덕분에 연구에 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스스럼없이 제시하고 논의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여러 중요한 발견이 창발했습니다. 두 번째 행운은 무지에 의한 창의성입니다. 시에 관한 기존 연구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행운은 적절한 여유입니다. 이 연구를 시작할 때에 마침 대학원 입시 등이 마무리된 상황이라 본업(물리학)이 아닌 ‘딴짓’을 할 여유가 있었습니다.

제가 마주한 첫 번째 장벽은 자료 접근성이었습니다. 선행 연구를 열람하고 검토해야 하는데, 대학 졸업 후 해외에 나와 있는 저로서는 한국 학술지 열람 권한이 없어서 매번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런 접근 장벽을 낮추기 위해 오픈 액세스와 출판 전 논문(preprint) 움직임이 더 확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상의 작품은 저작권이 소멸된 지 이미 30년 이상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원본과 번역본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온라인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돼있지 않아, 매번 여러 책을 뒤적이고 검증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써야 했습니다. 한국 문학의 연구 촉진과 대중의 문화 향유를 위해 적어도 저작권이 소멸한 유명 문학 작품들의 데이터베이스를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장벽은 저널의 경직성이었습니다. 국문학 전공자에게만 투고 자격을 준다든지, 저널에서 아래아한글 형식(.hwp) 원고만을 투고 받는다든지 하는 경우가 있어 그런 제한이 없는 저널을 찾았습니다. 찾은 저널 중에서는 오픈 액세스를 지원하는 곳을 추려 투고했습니다. 완성된 논문을 워드(.docx) 형식으로 제출한 뒤에는, 출판사에서 그것을 다시 아래아한글로 변환하는 바람에 여러 수식과 벡터 이미지 등이 깨져서 급한 수습을 해야 했습니다.

다른 분야 연구자, 다른 문서 형식 등에 대한 지원이 문학 연구에서 이제까지 크게 필요하지 않았을 수 있겠지만, 융합 연구의 관점에서 보면 아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융합 연구 논문의 출판을 용이하게 만들 수 있는 시스템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 장벽은 소통이었습니다. 논문의 주요 아이디어는 3차원 구면좌표계와 그것의 4차원 일반화(generalization)에서 시작합니다. 처음엔 이러한 전문적 내용에 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하고 구체적인 설명은 참고문헌으로 돌려 논문을 간결히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논문이 추후 국문학 저널에 투고될 것이라는 점, 쉽게 열람·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 참고문헌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논문의 간결함은 결과적으로 진입 장벽을 높일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뼛속까지 이공계인인 저로서는 설명의 적절한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 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지식의 저주, curse of knowledge).

이때 비이공계인이신 교수님과의 논의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해를 돕기 위한 여러 그림 자료를 만들고 개념을 설명하는 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였습니다. 또한 논문의 주요 내용을 쉽게 요약·정리하는 강연 형식의 동영상도 만들어 논문과 함께 공개하였는데, 논문보다 접근과 감상이 용이하다는 장점 덕분에 대중의 큰 관심과 이해를 받았습니다. 소통이라는 장벽은 앞서 언급한 다른 두 장벽보다 상대적으로 잘 극복했다고 하겠습니다.

돌이켜보니 융합 연구를 해내기 위해선 아직 여러 행운이 따르고 여러 장벽을 극복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더 적은 행운이 따르더라도, 더 적은 장벽을 극복하더라도 융합 연구를 진행하고 출판할 수 있는 환경이 널리 조성되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오상현 University of California, Merced 물리학 박사과정생
중력렌즈효과를 활용한 암흑물질 분포 측정 등에 관해 연구 중이다. 얼마 전 작가 이상의 시 일부를 기하학/물리학적으로 해석한 융합 연구 논문(「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삼차각설계도」와 「건축무한육면각체」의 연결, 그리고 차원 확장-」)을 출판해서 관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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