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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비평 : (1) 에세이스트 고종석
문체비평 : (1) 에세이스트 고종석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08.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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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의 사랑 나누기...세상을 담는 거울로

고종석의 글은 참 단아하다. 잘 쓴 그의 에세이를 보면 주둥이가 학의 목처럼 긴 백자풍의 주전자가 떠오른다. 이슬람의 모스크들에 둘러싸인 조그만 찻집에서 박하차를 마셨다는 그의 글 어느 한 구절처럼 고종석의 글엔 희고 푸른 상쾌함이 있다.

端雅는 깔끔하고(端正) 부드럽고 곱다(優雅)는 뜻이다. 고종석은 프랑스에서 언어학을 공부했고 정확한 문장을 구사한다. 그는 교수들을 비판할 때가 종종 있는데 비문투성이인 논문을 자주 예로 든다. “국어학자들도 정확한 우리말을 구사하지 못하며” 그나마 “정과리와 백낙청이 비문이 없다”라고 말한다. 이런 언어에 대한 자의식은 고교시절 아는 형에게 배운 스페인어, 대학 때의 불어원전읽기 동아리, 신문 기자, 프랑스 유학 등을 거치며 점점 단단해지며 글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요소로 자리 잡는다. 거기에 차거나 모자람을 잘 조절하는 테크닉이 더해져서 깔끔하고 우아한 한국어 문장이 탄생한다.

가벼운 ‘주어’와 무거운 ‘서술어’

고종석은 잡다한 주제로 글을 써왔다. “문체란 바로 그 사람”이라는 뷔퐁의 말처럼 고종석은 세상을 넓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박식하다기보다 여기저기 관심이 많고, 교양적이다. 정치비평, 세평, 문화비평, 영화감상문, 풍경에세이, 인물평, 문화계이야기, 언어를 테마로 삼은 다양한 글쓰기의 결과물이 지금 13권의 책으로 나와있다. 아참, 그는 소설가이기도 해서 3권의 소설을 냈는데, 사실 읽어보면 소설과 에세이의 중간이다.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은밀한 생’에 대해 “소설의 옷을 얇게 걸친 에세이”라고 한 평은 그의 소설에도 해당한다. 고종석은 키냐르의 소설을 “말과의 情事”라고도 평했는데, 고종석이야 말로 말의 속살을 헤집는 글을 많이 써왔다. 그 가운데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문학과지성사 刊)은 가시내, 그리움, 놀아나다, 돌계집, 반하다, 샛서방, 흐벅지다 등 ‘사랑과 관계된 말과의 사랑의 기록’이다.

언어에 대한 고종석의 전문성은 문법적 정확성도 있지만, 언어의 쓰임새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풍부하다는 데서 발휘된다. 그의 글을 읽어보면 주어가 가벼운 대신 서술어가 무겁다. 즉 설명이 자세하다는 것. 많은 이들이 화두는 거창하되 나중에 가서 꼬리를 내리거나 물을 흐리는 식으로 넘어가는 데 비해, 고종석의 글은 언제나 딱 부러지는 논리와 설명이 있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어거지가 없다. 조선일보나 거기에 글을 쓰는 손호철 교수를 비판할 때 약간 ‘오버’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글을 쓴다.

고종석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 부르고, 정치적으로는 “희미한 보수”로 자처한다. “나는 최인훈의 회색인에 가깝다. 나는 내 자신이 불행이고 결핍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어떤 그룹에 끼는 것을 싫어한다. 그의 세평은 대개 개체를 존중하지 못하는, 소수자를 무시하는 문화에 대한 비판일 때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고종석표 자유주의의 한쪽 면만 보는 것이다. 그는 또 쾌락을 지향하는 쾌락주의자다. 와인과 담배, 여자들과 술집에서 얘기하길 좋아하는 그의 자유주의적 글쓰기는 “즐기는 삶”을 옹호하는 데 바쳐지기도 한다. 그래서 고종석의 글에서 드러나는 생활의 모습들은 소시민적일 때는 정겹고, 귀족적일 때는 샘난다. 그가 생활인으로서 저지르는 일탈들, 문필가의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들에 대해 털어놓고 한쪽으로는 그것이 자신의 한계임을, 다른 한쪽으로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될 수 있으면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내비치는 그의 글은, 뻔뻔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이 언행일치는 또 다른 덕목으로 읽힌다.

고종석의 글쓰기는 많은 경우 정체성의 글쓰기다. 그의 글에 인물평이 많은 것도 기본적으로 그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삶보다는 주변인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을 동질화하거나 차이짓는 정체성 탐구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책읽기와 글읽기’(문학동네 刊)에서 우리시대의 비평가들에 대한 인물평을 썼던 것. ‘서얼단상’에서 ‘한 전라도 사람의 세상읽기’라고 했던 것도 다 이런 맥락에 비춰서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정체성의 글쓰기를 강행해왔던 것일까. 그것은 기자 출신의 에세이스트로서의 방어논리였을까. 문인과 예술가는 작품으로, 학자는 학문으로 말하면 되지만, 에세이스트가 에세이로 그친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그는 색깔이 있어야 한다. 색깔이 있어야 읽히고 살아남는다.

그는 지식인들과 자주 거리를 둔다. 그런데 개별자인 고종석이 집단에 투신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를 전라도 사람이라 부를 때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서울토박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외가가 전주에 있고, 어렸을 때부터 자주 그곳을 드나들었다는 얘기가 글의 이곳저곳에서 나올 뿐이다. ‘전라도 단상’ 등의 글을 쓸 때 그는 전라도 사람들이 받는 차별을 문제 삼는다. 하지만 그가 직접 불쾌한 일을 당한 적은, 최소한 글을 통해 볼 때는 없다. 고종석은 서울 마포에서 자라고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계속 서울생활을 해왔고 심지어 프랑스에서 5년간 살다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범인 입장에서 볼 때 그는 문화적 수혜자이지 소수자이기 힘들다.

 
정범모 한림대 석좌교수는 소싯적 스승에게 “문장은 橫步에게 배우게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염상섭이 서울, 거기서도 한복판인 종로통에서 중산층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글엔 한국인의 표준적 정서가 담겨있다는 얘기였다. 고종석의 글도 서울토박이의 특징을 갖고 있다. 그의 글엔 문화적 열등감이 없고 맥락이 풍부하다. 공부를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성격의 교양인으로서의 자질이 녹아있다. 이것이 얼마나 수혜인지를 전라도, 전라도 하는 그는 잘 모르는 것 같다. 물론 그의 전라도 타령은 그의 윗세대와 가까운 주변인의 삶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정치적 자유주의자를 내세울 때 그는 “소수자이면서 주변인"일 수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소수자이긴 하지만 주변인"은 아니다. 소수자를 부르짖는 그의 글은 따라서 불편한 느낌을 줄 때가 있다.

‘누이 콤플렉스’가 만들어준 친밀함

고종석의 글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요소는 ‘연애감정’이다. 고종석은 10대 후반 학교를 쉬면서 다녀온 전주 이모집에서의 경험을 두 번이나 소설화했다. 거기엔 ‘혜원이’라는 사촌누이가 나오는데 소설에 따르면 둘은 그 몇 달 사이에 사랑에 빠졌고, 성인이 되고 한참 후에도 여전히 서로를 사랑했다. 이 누이는 그의 다른 소설에서, 신변잡기적 글에서 몇 번이고 변주되는 소재로 쓰인다. 그렇게 못다한 사랑에 대한 욕망을 삭히는 것일까. 고종석은 또한 누이들 사이에서 자랐다. 그의 글에는 누이들에 대한 언급이 유난히 많다. 그 때의 그의 감정은 저 아득한 시절의 임화가 ‘우리 옵바와 화로’라는 시에서 드러냈던 애틋한 동정심과 비슷하다. 그것은 병약한 누이를 맘에 걸려하는 ‘누이 콤플렉스’와도 비슷하다. 자주 고종석의 글은 세상의 누이들을 가상 청자로 정한 듯한 다정다감함에 휩싸여 있다. 누이들을 생각할 때 촉촉이 젖어드는 마음상태가 고종석 글을 가장 따뜻하게 꾸며준다.

타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내는 고종석의 글은 정확하고 날카로운 그의 글의 다른 쪽 날개임이 분명해 보인다. 기자시절 고종석은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학술담당 기자 디디에 에리봉을 모델로 삼았다. “나는 그들처럼, 사회적 방언들이 흩날리는 담론의 만다라를 일상언어로 풀어헤쳐 쉽게 판독할 수 있는 사상의 지도를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글은 기본적으로 대화적이다. 그것은 “잘난 척은 금물”이라는 독특한 윤리의식에서 기인하기도 하고, 그가 강준만, 진중권, 백낙청, 정과리, 김우창, 김현 같은 이들을 모델로 삼고, 그들의 글을 자신의 글에 인용하기를 매우 즐긴다는 것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는 글쟁이는 아무래도 문학평론가 故 김현인 듯하다. ‘김현 생각’이라는 글에서 그는 김현의 청년시절 글을 다시 읽어보면 예전만큼 좋아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본기에 충실하고자 하는 노력

가령 김우창이나 백낙청의 청년시절의 글은 갑년이 지난 그들의 글과 별 차이 없이 단단하고 원숙한 반면, 김현은 거친 문장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본다. 즉 김현의 재능은 다듬어진 재능이라는 것이다. 글을 다듬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그의 찬사는 꾸준하다. 이남호 고려대 교수의 산문집 ‘혼자만의 시간’에 대해 “글쓰기의 욕망을 최대한 억제하고 교과서적 단정함으로 표준적 글만을 모은 그의 책은 문법도 안맞고 논리도 풀어진 되다만 스타일리스트들에게 경종이 될 만하다”라고 평하는 것이 한 예다.

고종석도 김현과 같은 ‘노력파’(?)가 아닐까 한다. 그가 프랑스에 처음 가서 쓴 ‘고종석의 유럽통신’의 편지체 문투는 지금의 세련됨에 비하면 매우 촌스럽고 어색하다. 감정처리가 전혀 되지 않는 곳도 많다. 글의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책읽기 책일기’도 신문에 기사로 쓴 글이라 그런지 거칠고 듬성듬성하다. 하지만 2002년경 어떤 매체에 연재한 ‘고종석의 영화읽기’는 빛나는 언어들을 선보이고 있다. 여기서 그는 진정한 스타일리스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게 영화는 가장 먼저 풍경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고종석의 영화감상문은 줄거리나 작품의 주제의식, 플롯이나 전문적인 장치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그가 받은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중심으로 풀려 나온다. 그 강렬한 인상은 대개 미학적인 충격이기 쉬운데 정확하고 친절한 묘사와 전달을 금과옥조로 삼아온 그의 글쓰기 철학이 묘사하는 영화 속의 한 풍경은 환상적일 정도로 개성적이다.

고종석의 글에도 아쉬운 점은 있다. 그도 여러 글에서 지적하듯 정서의 강조와 스타일의 반복에서 오는 일종의 매너리즘이다. 변학수 경북대 교수는 “비평이 고루함을 면하지 못하는 것은 문체라는 형식을 벗어나지 못한 정서적 글쓰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에세이스트에게 세계는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에 불과”하다고 덧붙이는 그는 에세이의 기능에 대해 회의적이다.

고종석의 글쓰기에서 세계 또한 많은 경우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이 된다. 하지만 독자는 그 1인칭 화자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따라서 그에게는 그가 세상을 담는 거울이 되는 역할변화가 필요한 지도 모르겠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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