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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_고백과 소문
문화비평_고백과 소문
  • 김영민 한일장신대
  • 승인 2005.07.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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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은주는 절대적 타자가 되어 자신을 변명하지 못한다. 살아 있는 전인권은 둘 사이의 고백을 기억하고, 발설하고, 확인하고, 또 그 고백을 탐문하는 세속의 소문들에 의해 시달린다.

고백은 소문의 씨앗이며, 소문은 고백의 매트릭스와 같다. 이 점에 관한 한, 농촌 공동체든 전자정보 사회든 그 본질에서는 대차가 없다. 그러나 고백과 소문 사이의 內緣은 얼핏 이상해 보인다. 우선 그 발화의 형식에서 둘은 극히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고백이 現前하는 진리의 음성화에 의한 특권적 소통방식이라면, 소문은 결국 그 현전이 무작위로 전염되면서 휘발하는 방식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고백이 제도의 문제라는 사실은 공지하는 것이니 각설하자; 우선 그것이 반칙이며 사이비 인식론이라는 점이 중요한데, 이는 소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둘은 타자의 지평과 그 거리를 인정치 않는 자기동일성의 내재화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고백이라는 행위의 특권성은 종교와 연애, 혹은 詩作 등의 형식과 역사를 통해 충분히 밝혀졌다. 그러나 고백이 소문이라는 胎盤을 지닌다는 사실, 고백이라는 제도는 소문이라는 非제도에 의해 역설적으로 성립한다는 사실은 제대로 밝혀진 바 없다.

프레이저(J. Frazer)가 代贖이라는 종교적 상상력을 정신문화적 미성숙으로 보았듯이, 고백이나 소문이 주된 의사소통의 방식으로 득세하는 공동체는 이른바 '미성년 상태'(칸트)에 머문다. 나는 지난 10여년 간, '나의 마음을 말하지 말고 남의 외모를 말하지 마라'고 내 학생들에게 꾸준히 권면해왔다. 이것은 철학과 인문학의 공부가 실천적으로 내려앉으며 결절하는 지점, 그 숨어있는 지평을 발굴해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물론 이것은, '고백을 피하고, 소문을 넘어서라'는 얘기와 맞닿아 있다. 고백으로 연인이 생길 수 없는 것처럼, 소문으로 동무가 만들어질 수 없다.

고백과 소문은 공고한 물질적, 매체적, 제도적 조건 위에서 번창하고, 또 그 나름의 정당화 장치마저 길러낸다. 그러므로 고백과 소문, 혹은 '여론과 사견'(마르쿠제) 사이의 고리를 끊는 일이나, 그 사이에 새로운 대화/공론의 문화를 활성화하는 일은 결심이나 기대보다 쉽지 않다. 고백(마음)도 아니고 소문(스펙타클)도 아닌 발화의 방식으로서의 대화는 음성중심주의적 특권성도 없고 주술적 전염성도 약할 뿐 아니라 그 유지 비용마저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은 대화의 외줄을 타기가 쉽지 않도록 구조화되어 있고, 대신 고백과 소문, 臆見과 광고의 유혹은 사위에서 넘실거린다. 인문학과 철학의 공부가 실패하는 지점은 우선 고백과 소문, 심리와 풍경에 의해 그 언어가 포획당하는 지점이다. 실험삼아서 고백과 소문, 마음과 스펙타클을 배제한 채 대화를 진행시켜보면, 타자와의 팽팽한 긴장과 거리 속에서 교환되는 언어가 얼마나 희귀한 지를 어렵지 않게 납득하게 된다.

고백은 우선 제도이며 사회사이므로, 심리의 내면 속에서 그 진위를 따지거나 헤아리는 짓은 어리석다. 이은주가 이미 고인이라는 사실이 문제의 핵이 아니다; 그녀의 생사와 무관하게, 워낙 고백/소문의 문제는 풀리지 않는 법이다; 그것은 오직 해소되거나 느릿느릿 탕진될 뿐이다. 말하자면, 소문이라는 그 괴물의 에너지가 바닥날 때라야 비로소 고백이라는 스캔들은 餓死한다.

이은주-전인권을 둘러싼 '고백' 논란은 우리 사회의 표층을 지배하는 소문/스펙타클의 메카니즘을 반복한다. 다만, 죽은 사람의 고백이 문제시되었다는 점이 역설적으로 고백의 성격을 감출 뿐이다. 실은, 모든 고백은 죽은 것이며, 따라서 영원한 타자일 뿐이고, 오로지 소문을 통해서만 그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다. 고백은 소문을 가동시키고, 소문은 고백을 확대재생산한다. 문제는 죽은 이은주가 산 전인권만큼 말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인데, 그것은 우리 모두가 고백과 소문에서 자유로워야만 가능해진다.

김영민 / 한일장신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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