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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63]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 아나키즘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63]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 아나키즘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11.01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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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폴 마라
아나카시스 클루츠
장-프랑수아 바를레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들라크루아 작품). 사진=위키미디어

지금까지 우리는 프랑스의 중요한 아나키스트들을 살펴보았다. 이어서 그들과 함께 활동했던 여타의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프랑스 아나키즘 운동을 살펴보도록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불경건한 라블레(Rabelais)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모토를 만들고 라 보에티에(la Boetie)가 자발적 노예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 이래로 아나키즘 정신은 프랑스에서 강력했다. 푸아니(Foigny)와 페넬롱(Fenelon)의 반권위주의적 유토피아 이후에는 모렐리(Morelly), 멜리에(Meslier), 디드로(Diderot), 루소(Rousseau) 같은 철학자들의 아나키즘 사상이 뒤따랐다. 그들은 모두 불만의 분위기를 촉발시켰고 결국 프랑스 혁명으로 정점에 달했다. 

프랑스 혁명은 19세기 좌파의 많은 논쟁과 투쟁의 맥락을 설정했다. 처음에는 아나키스트와 연방주의자, 권위주의자와 중도주의자 사이에 투쟁이 있었다. 권위주의적인 자코뱅의 손에 처형되기를 기다리면서도 인간의 완전성과 자유롭고 계급 없는 사회의 가능성을 믿었던 콩도르세는 놀라운 돌연변이 계획, 즉 모든 노동자들 사이의 거대한 상호부조 연합을 제안했다. 온건한 지롱드(Girondins)는 자코뱅 파리로부터 프랑스를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연방주의를 옹호했다. 파리가 선거를 위해 행정적으로 조직한 '구' 또는 '구획'에서 발전된 보다 혁명적이고 자발적인 연방주의 형태였다. 이로부터 파리 코뮌이 등장했다. 

1871년 3월 19일 바리케이드, 1871(아르노 뒤르벡 작품). 사진=위키미디어

자코뱅의 지배를 대체한 많은 대중 조직과 혁명위원회도 생겨났다. 코뮌 스스로가 입법화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동안, 일종의 연방주의적 직접민주주의 요구가 남아 있었다. 상호주의와 연방주의는 나중에 프루동 체제의 쌍둥이 기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의 원리가 프랑스 혁명의 행위에서 기원한다고 확신했다. 아나키스트라는 말은 반대자들에 의해 여전히 리버테리언과 권위주의자 모두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었다. 영국에서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은 반혁명적인 <아나키적 오류>(Anarchical Fallacies, 1791)에서 프랑스의 인권 선언을 공격하여, 그것이 단일 지배자의 오래된 폭정을 집단적 아나키의 새로운 폭정으로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위주의적인 자코뱅이 돼버린 아나키스트

상퀼로트는 프랑스혁명기의 의식적인 민중세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퀼로트(반바지)를 입지 않은 사람 곧 긴바지를 입은 근로자라는 뜻이며, 귀족과 구별하여 사용되었다.
상퀼로트는 프랑스혁명기의 의식적인 민중세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퀼로트(반바지)를 입지 않은 사람 곧 긴바지를 입은 근로자라는 뜻이며, 귀족과 구별하여 사용되었다. 사진은 '상퀼로트 분장을 한 가수 슈나르(브와이유 작품)'이다. 사진=위키미디어

자코뱅은 상퀼로트(sans culottes)를 아나키스트라고 불렀지만, 후에는 자신들을 대체한 독재자들에 의해 아나키스트라고 불렸다. 그러나 1793년 봄과 여름에 거리로 나섰던 혁명적 폭도인 상퀼로트는 엄밀히 말해 아나키스트가 아니었다. 그들이 지롱드를 전복하고 자코뱅 독재를 도왔기 때문이다. 일단 권력을 잡은 로베스피에르는 이 별명을 사용하여 좌파를 공격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부심의 용어로 채택되었다. 1793년 9월 프랑스 남부에 있는 보케흐(Beaucaire)의 상퀼로트는 협약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가난하고 덕 있는 상퀼로트이다. 우리는 직공과 농민의 연합을 형성했다. … 우리는 우리의 친구가 누구인지 안다. 성직자와 귀족, 봉건 제도에서 우리를 구한 자들은...아나키스트라는 귀족 분파로 마라주의자라고 불렀던 자들이다.” 

마라(Jean-Paul Marat, 1743~1793)는 1789년 혁명을 촉구하고 '인민이 귀족의 멍에를 꺾었다. 같은 방식으로 그들은 재물을 깨뜨릴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극도로 권위주의적이었다. 1795년에는 그들이 권위주의적인 자코뱅을 아나키스트로 부르자, 이후 그 용어는 의미의 탄력성을 발전시키기 시작해 다음과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즉 '아나키스트'란 범죄로 뒤덮이고, 피로 물들고, 강간으로 살찌운 사람들로 그들이 만들지 않은 법과 그들이 다스리지 않는 모든 정부의 적이며, 자유를 주장하고 전제를 행하며, 형제애를 말하며 형제를 살육하는 자들이다. 실천적으로만이 아니라 이론상으로도 아나키스트적 결론에 도달한 대중지도자들, 특히 앙라주(Enrage) 중에는 의회정치를 거부하고 직접행동을 실천하며 경제개혁을 모색한 혁명가들이 있었다.

아나카시스 클루츠. 사진=위키미디어
아나카시스 클루츠. 사진=위키미디어

그들의 지도자 중 한 명은 아나카시스 클루츠(Anacharsis Clootz, 1755~1794)였다. 알베르 카뮈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세계의회를 옹호한 최초의 사람인 그는 세계 연방주의자이자 국제주의적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인류의 웅변가", "인류의 시민", "신의 개인적인 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롱드파인 자크 피에르 브리소(Jacques Pierre Brissot, 1754~1792)가 1793년에 체포되었을 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시행되지 않는 법, 힘이 없고 멸시를 받는 당국, 처벌되지 않는 범죄, 공격받는 재산, 개인의 안전 침해, 부패한 사람들의 도덕, 헌법도 없고, 정부도 없고, 정의도 없는 것이 바로 아나키의 특징이다.” 

개인의 안전과 사람들의 도덕성에 대한 언급을 제외하고, 이 정의에는 적어도 어느 정도 진실의 요소가 있었다. 앙라주 중 최고는 코뮌 총회의 일원이 된 시골 성직자 자크 루(Jacques Roux)였다. 그는 왕을 단두대까지 호송하고 상점에서 물건을 압수하는 것과 같은 군중의 직접적인 행동을 촉구한 사람이다. 그는 또한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연결한 최초의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한 계급의 사람들이 다른 계층을 굶어 죽게 할 수 있다면 자유는 공허한 유령에 불과하다. 부자가 독점을 통해 그 동포의 생사권을 행사할 수 있을 때 자유는 공허한 유령일 뿐이다.” 자코뱅은 그가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정부는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자코뱅이 승리를 즐기기 전에 자살했다. 그러나 그의 리버테리언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마라와 같이 루는 여전히 극도의 권위주의자였다. 

 

혁명의 혼돈 속에서 아나키즘에 접근한 바를레

장=프랑수아 바를레. 사진=러시아 위키피디아
장-프랑수아 바를레. 사진=러시아 위키피디아

프랑스혁명 기간 동안 아나키스트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장-프랑수아 바를레(Jean Varlet, 1764~1837)였다. 그는 지역의 절대적인 주권을 주장했다. 그는 테러 당시 투옥되었지만 생존하여 자코뱅 독재정권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는 혁명적 정부를 마키아벨리즘의 걸작이라고 하면서 이성적인 존재에게 정부와 혁명은 양립할 수 없고 사람들이 자신들과 대립한 영구적인 반란 상태에서 대표단을 세우려 하지 않는 한 이는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그의 주장은 유럽 대륙 최초의 아나키즘 선언문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라쿠스 바뵈프(Gracchius Babeuf)로 알려진 프랑수아노엘 바뵈프(Francois Noel Babeuf, 1760~1797)는 완전한 평등을 요구하고 사회의 주요 질병의 원인으로 사유 재산을 공격하면서 모든 것이 공유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크로포트킨은 바뵈프의 음모가 1866년에 설립된 국제노동자협회에 직접적으로 침투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바뵈프는 혁명적 독재에 의해 운영되고 그의 '평등 공화국'을 낳는 국가를 기대했기 때문에 결코 바를레와 같은 아나키스트가 아니었다. 

 

혁명이후 흩어진 아니키즘 운동과 프루동의 등장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사진=위키미디어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사진=위키미디어

프랑스는 여러 면에서 역사적인 아나키즘 운동의 요람이었으나 그 씨앗은 프랑스 혁명 동안 흩어졌고 1840년대에 노동자들 사이에서 새롭게 자라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조직화된 아나키스트 운동의 '아버지'인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을 배출했다.

프루동은 19세기 후반에 발전한 다양한 아나키즘에 영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연합한 상호주의 노동자들이 제1차 국제노동자협회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세기말에 프랑스는 상징주의와 후기인상주의 작가와 예술가들 사이에서 테러리스트 '선전'의 최악의 사례와 아나키즘의 위대한 상상적 개화를 목격했다. 그것은 또한 아나키즘의 가장 건설적인 형태 중 하나인 아나코-생디컬리즘을 일으켰다. 

처음으로 자신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도발적으로 아나키스트라고 부른 프루동은 <재산이란 무엇인가?>(1840)에서 “당신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했다. “나는 아나키스트입니다. 당신이 정부를 희생시키면서 풍자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최소한은 아닙니다. 나는 방금 당신에게 나의 사려 깊고 진지한 신앙 고백을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질서의 강력한 지지자이지만, 나는 그 용어의 완전한 의미에서 아나키스트입니다!”

그리스어에서 나온 아나키라는 단어를 인식하고, 프루동은 사람에 의한 사람의 통치를 억압으로 거부하고 사회가 질서와 아나키의 결합에서 최고의 완전성을 발견할 것이라 주장했다. “인간은 평등 속에서 정의를 추구하고, 사회는 아나키에서 질서를 추구한다. 이 명백한 역설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오로지 인공 정부가 없는 사회만이 자연 질서와 사회 조화를 회복할 수 있다.”

프루동은 일반적으로 어원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an-archy'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는 아나키를 '완전한 자유의 상태'로 정의했을 뿐만 아니라 '질서와 동의어인 절대적 자유'로 언급했다. 그는 때때로 아나키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여 '산업 제국'의 완전한 자유방임, '상업 자본주의의 아나키' 및 '아나키 자본주의'를 언급하면서 재산 및 착취와 연관시켜 잠재적인 혼란에 부가했다.

말년에 그는 더욱 조심스러워졌고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기보다는 '연방주의자'라고 부르기 좋아했다. 그의 후계자들도 스스로 아나키스트라고 부르지 않고, 노동생산물의 상호 교류라는 원칙에 따라 ‘상호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바쿠닌은 아나키즘을 프루동주의라고 부르고 이를 광범위하게 발전시켜 극단적인 결과를 낳았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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