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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비평_피나 바우쉬의 ‘러프 컷’
무용비평_피나 바우쉬의 ‘러프 컷’
  • 허명진 무용평론가
  • 승인 2005.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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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몸의 펼침 속에 되살아난 한국

영화 ‘그녀에게’는 춤으로 시작해서 춤으로 끝난다. 마이크를 통해 증폭되는 체념의 신음소리, 그리고 열을 지어 춤추는 엉덩이들의 씰룩거림에 실린 삶의 낙천성, 이 각각의 장면들은 영화의 앞뒤에서 어떤 형언할 수 없는 몸의 느낌들을 불러내 온다. 바로 이 잊기 어려운 장면들은 세계적인 거장 피나 바우쉬가 안무한 ‘국가/도시 시리즈’ 중 하나로서, 포르투갈을 소재로 한 1998년도 작품 ‘마주르카 포고’의 일부다. 그리고 역시 그 시리즈의 대열에 드디어 한국도 열세 번째로 동참하게 됐다. 6월 22일부터 나흘간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러프 컷 Rough Cut’이 바로 그것이다.

피나 바우쉬의 춤연극, 이른바 ‘탄츠테아터(tanztheater)’는 세계 공연예술계의 흐름을 이해하는 주요 키워드 중 하나다. 새로운 경향이라고 주목받는 오늘날의 안무가들을 보노라면, 탄츠테아터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을 찾기란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바 있는 빔 반데키부스나 시디 라르비 셰르카위 등 최첨단의 춤작가들이 영상이나 음악을 끌어와 제나름대로 차별화를 꾀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탄츠테아터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만큼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는 뛰어넘기 힘든 큰 산맥의 하나로서 여러 봉우리들을 품으며 여전히 도도하게 버티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러한 현상이 가능한가. 피나 바우쉬가 선취한 것이 바로 ‘생활세계’였기 때문이다. 몸으로 경험하는 구체적인 삶과 일상, 사람마다 다른 천차만별의 시각이 살아 숨쉬는 날것 그대로의 세계는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과도 같은, 거칠지만 비옥한 창조의 원천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탄츠테아터는 이같은 보고에 접근하는 물꼬를 튼 셈인데, 그러기 위해 새로운 차원에서 춤과 연극을 바라보고 결합시켰다. 탄츠테아터에서 춤과 연극은 몸과 몸이 살아내는 삶에 가까운 의미다.

이미 익숙해져 굳어진 감각에 안주하는 세계가 아닌, 낯설고도 불편할 수 있지만 감각을 갱신시키는 습관 이전의 세계, 표현된 것 이전의 先표현의 세계에 처음 노출됐던 피나 바우쉬의 관객들은 심히 반발하기도 했다. 무용에 대한 기존의 통념에 반하는 그것은 20세기 현대무용의 지평을 단숨에 넓혀버린 일대의 사건이었다. 춤과 연극을 넘나드는 이 독특한 장르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인간의 실존적 불안과 고뇌를 포착하면서 출현한 독일 표현주의의 세례를 받았지만, 그와는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신표현주의’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의미작용의 측면에서, 추출과정을 거쳐 다듬어진 동작을 통해 고정된 의미나 내면을 전달하려는 표현주의와 달리, 신표현주의는 변화하는 구체적인 맥락들을 겹치면서 의미의 변주를 즐긴다. 즉, 반복과 차이 가운데서 의미가 생성되는 것과 같다. 또한 이러한 과정 속에 형성된 개개의 여러 사태들은 일관된 서사 없이 마치 ‘해프닝’처럼 이미지로 나열되거나, 혹은 마치 삶 그 자체의 모습처럼 서로 포개어지고 꼴라주 되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또한 매체에 있어서, 획일적인 기준에 맞춰진 몸보다는 우리의 일상과 가까운 다양한 몸을 선호하며, 무대 역시 실제의 연장인 것처럼 젖은 흙(‘봄의 제전’, 1975)이나 발목까지 차 오르는 물(‘아리안’, 1979), 수천 송이의 카네이션(‘카네이션’, 1982) 등으로 온통 뒤덮인다. 심지어 닭이나 셰퍼드의 실물이 무대를 활보하기도 한다, 이리하여 춤은 좀더 삶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피나 바우쉬의 작업은 인종이나 성차별(‘푸른 수염’, 1977), 사랑과 상실(‘카페 뮐러’, 1978), 불안과 슬픔, 고독 등 인간과 그들의 관계를 주제로 한다. 여기서 그녀의 관심사는 스스로 늘 밝히듯이 ‘어떻게 움직이느냐보다는 무엇이 움직이게 하는가’이다. 피나의 작업에서 무용수들은 단순한 공연자를 넘어서서 함께 작업하고 관점을 제시하는 공동작업자들이며, 그들이 내놓는 것을 취사선택하고 편집하는 일이 피나의 몫이다. 1986년부터는 세계 각국에 체류하면서 그곳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어오고 있는데, 로마를 소재로 한 ‘빅토르’를 시작으로, 홍콩(‘유리청소부’, 1997), 부다페스트(‘푸른 대지’, 2000), 브라질(‘물’, 2001), 일본(‘천지’, 2004) 등을 거쳐갔다.

서울에서 세계초연을 가진 피나 바우쉬의 한국 소재 신작 ‘러프 컷’은 한국에 대한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점을 모두 노출시킨 작품이었다. 1, 2부로 나뉘었는데, 전반부에서 한 문화의 특수성이 어떻게 보편적으로 승화되어 갈 수 있는 지가 면면이 드러난 점이 흥미로웠으나, 후반부에서는 그들 나름의 시각이 보다 강하게 표출된 듯 싶었다. 앞부분의 모티프들이 뒷부분에서 조금씩 다르게 반복되면서 그 어조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고, 어떤 점에서는 서구적 시각과 내부자적 시각이 충돌을 면하기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영화에서 첫 필름 편집본을 의미한다는 ‘러프 컷’이란 작품에는 이전 작품에 비해 춤이 많다는 점이 우선 눈에 띈다. 그들의 춤이 한국춤은 아니었으나, 그에 대한 자신들의 느낌을 표출하고 있다고 여겨진 것은 어쩌면 음악 때문이었을 수 있다. 가야금이나 타악 등 전통악기에 의해 연상되는 전통춤의 정서, 가령 한이라든가 신명 등이 그들의 이질적인 춤사위에 대입되어 보이는 것은 이채로웠다. 한 외국의 무용관계자가 한국에 대한 첫인상으로, 한국은 ‘춤의 나라’라고 하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이들도 그 점을 알아차렸던 것일까. 우리 고유의 것이 그들 안에서 발효를 거쳐 새로운 몸의 펼침으로 되살아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 한국적 맥락의 특수성들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양태로 타자와 공유할 수 있도록 거듭났다. 굿의 종이꽃은 그것을 태워 끄는 자나 불을 끄기 위한 물 양동이를 하나 둘씩 개입해 들어주고 받쳐줄 때 공동체적 나눔을 보여주는 듯하며, 김장담그기나 등목은 놀이의 천진함을, 이윽고 물로 흥건한 바닥을 사우나 수건으로 훔칠 때는 노동이 곧 놀이임을 상기시켰다. 어느 단원의 말처럼, 이러한 작업을 ‘풍경을 보고 추상화로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면, 그 추상화란 구체성 안에 숙성되어 담긴 보편성을 의미할 것이다.

인간과 그 관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은 한국 여성의 강인함을 날씬한 핸드백 속의 더럽혀진 목장갑으로, 혹은 얹혀 있는 무거운 통나무를 굴려서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긴 머리채 등으로 드러낸다. 또한 한국 남성 특유의 끈끈한 커넥션이나 과시욕, 소심함은 쉽게 거절 못하고 끌려 다니는 광경이나 베일 쓴 여성들의 시선을 받으며 동작을 맞추거나 집단 발레를 하는 남자들 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간 군상들은 거대한 흰 암벽을 배경으로 때로는 산악인들이 줄에 매달려 오르내리는 가운데, 때로는 봄꽃 핀 산야, 파도치는 바다, 사랑스러운 계곡물, 네온사인과 불꽃놀이의 빛을 투사하는 영상을 깔고서 무대 도처에서 펼쳐진다.

짝짓기를 강요하는 사회, 지나친 정감과 유대가 꼭 행복하지만은 않은 집단성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때, 그것은 어쩌면 서구인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반성과 겹치지도 않나 생각된다. 그러한 시각의 강한 표출은 이런 작품의 성격상 다소 의외였고 내부자적 입장에서는 거북했을지도 모르겠다. 전체적으로 쉴새 없이 바쁜 걸음이 발꿈치에 라이터 불 댄 듯한 속도감은 거의 맹목적이다. 달리는 호랑이 등에서 내리면 큰일 날 듯한 이 속도감은 무엇 때문일까. 여기에 답하기엔 피나의 체류는 너무 짧았던 것일까, 아니면 좀더 여운을 남기고 싶어서였을까.

허명진 / 무용평론가

필자는 월간 ‘몸’지에 ‘최근 유럽춤에 대한 몇가지 경향’으로 등단했다. ‘몸’지, ‘문화예술’ 지 등에서 평론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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