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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이병진의 서평(교수신문 제362호)에 답한다
반론: 이병진의 서평(교수신문 제362호)에 답한다
  • 이순예 서울대
  • 승인 2005.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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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동일자'는 자본주의 '안'의 타자가 아니다

칸트는 논문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는 주문을 계몽의 제 1 조목으로 내세웠다. 여기에서 용기를 가져야하는 까닭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의 오성을 사용해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릇 한 문장에는 당연히 전제된 조건과 그 언술이 스스로 떠않는 한계가 들어있기 마련이다. 학문은 이 점에서 솔직할 때 오히려 실천과의 관계에서 미덕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가 실천을 지향하는 이론을 구성할 때 삼가야할 점이 있다면, 모든 것을 아울러 포섭하겠다는 ‘선의’일 것이다.

칸트는 논문 「답변」에서 계몽의 조건과 한계를 비교적 세세하게 적시하고 있는 편이지만, 그 역시 이따금 또 너무도 당연한 경우, 생략하기도 한다. 이는 글쓰는 이의 취향이나 세계관에 관련된 문제일 수 있다. 본인이 연구한 아도르노는 이러한 점에서 매우 불친절한 편이다. 아도르노는 자신의 생각을 선언하듯 서술하고 나서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같은 이야기를 비슷한 방식으로 되풀이하는 정도에 머문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선택을 두고 논란이 분분하다. 본인은 아도르노가 개념어의 한계를 부각시키기 위해 ‘불친절함’을 전략으로 선택했다고 받아들이면서 읽었다. 아도르노의 불친절함에는 본인 역시 무척 불만이다. 하지만 칸트의 「답변」후반부에서 맞닥뜨리는 곤혹스러움은 없어 좋았다. 계몽의 용기를 이야기한 철학자가 인간오성의 적용대상을 사안에 따라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으로 구분한 후 “마음껏 성찰하라, 하지만 복종하라!”는 문구로 논문을 마무리한 정황은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연구대상이다.  

칸트의 비판철학이 여전히, 심지어 본인과 같은 한국의 연구자들에게까지 수용되는 까닭은 우리가 당시의 정황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지닌, 타고난 인식능력들을 내적 구조에 따라 분석하고, 각각의 인식능력이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한계를 짚는 과정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푸코는 이를 ‘비판의 태도’라고 명명했다. 독일과 프랑스의 차이를 혁명이라는 역사적 경험의 차이에서 찾는 푸코는 ‘비판’의 핵심은 진리에 대한 관계를 주체가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태도에 있다고 보았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비판적 태도가 역사적으로 관철된 사건이었다. 신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 신과의 관계는 내가 직접 결정하겠다는 태도의 소산이었기 때문이다.

▲아도르노 ©
아도르노 역시 진리와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새로운 진리가 필요한 까닭이 현재 우리가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서 살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비진리’인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면서 ‘진리’를 상정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로 구현된 어떤 원리를 통해 자본주의 현실을 비추어보거나, ‘비진리’가 산출되는 내부의 구조를 파헤치는 일이다. 아도르노는 후자의 방법을 택했고, 비진리인 현실관계를 조건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들이 진리를 추구할 때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말아야할 일 (질풍노도시기 쉴러가 쓴 『군도』에서 프란츠는 인륜마저 개념적 오성의 분석대상으로 삼는다.

그 결과 현실의 모든 것이 ‘적’으로 되고, 한계를 모르는 격정은 파괴를 부른다. 질풍노도를 정리 ․ 극복하면서 칸트가 ‘비판의 기획’을 추진하였음을 상기하자!), 그래서 불가능한 일이 무엇인가를 구분하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이미 너무도 비진리에 닮아있기 때문에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처지는 과거 종교개혁 때보다 더 어려울 따름이다. 우리는 진리를 구체적으로 상정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현실은 비진리라는 인식뿐이다. 사회주의적 전망을 가지고 현실을 부정하면, 부정하는 순간마다 ‘한계상황’이 뚜렷하게 인지될 것이고, “역사적 산물로서 사회적으로 통합되지 않은 타자”가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아도르노에게서 비동일자는 한계개념이 아니다. 『부정변증법』을 본격적으로 논할 수 없는 이 자리에서는 아도르노의 이론이 자본주의에 대한 내재적 비판으로서 독일에서조차 현실 사회주의적 전망을 더 이상 구체적 대안으로 상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훨씬 많이 논의되었고, 밀레니엄 이후 부쩍 증가하였다는 사실만 지적하고 싶다.

이병진은 전통적인 (아도르노의 어법에 따르면 ‘실증’) 변증법적 구도에 따라 비동일자를 이해하고 있다. 이병진이 논평 (교수신문 0월0일자)에서 지적한 <아도르노와 자본주의적 우울>의 ‘근본적인 오류’들은 모두 논평자가 ‘부정변증법’과 ‘실증변증법’을 변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성된 착각들이다. 무엇보다도 비판철학은 반성적 사유를 요청한다. 이때 반성이란 우리의 인식능력을 대상에 적용하였을 때, 그 결과가 정직하게 되돌아옴을 뜻한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이 어떤 방법론을 동원하여 대상에 접근하였는지 스스로 깨닫는다.

이병진은 아도르노가 실증변증법이라고 명명한 정/반/합의 운동과정에서의 반反을 상정하기 때문에 ‘타자’라는 개념을 비동일자로 대치시킬 수 있었다. 실증변증법이든 부정변증법이든 그것이 변증법인 한, 이 운동과정은 모순에 기반하고 있다. 요즈음처럼 자본주의적 질서가 지배적인 관행으로 된 세계상태에서 “동일화사유에 의해 생산되면서 포섭되지 않는” 이질적인 요인들을 사유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기는 힘들다. 문제는 이 ‘다른 것’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사람들 사이를 끊임없이 갈라 남/여, 정규직/비정규직/, 장애/정상 이라는 대립쌍들을 구성해내면서 자기증식에 몰두한다.

그런데 동일화 사유가 ‘신화’라는 별명을 얻은 까닭은 이 사유가 이른바 ‘타자’를 체제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대립을 해소한다고 하면서, 바로 그 동일화하는 움직임을 통해 다시 또 엇비슷한 대립쌍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숙명 때문에 어떨 수 없다. 성장하지 않는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동일화 사유의 신화성이 자본주의적 팽창의 동력이다.

자본주의는 늘 급박하게 움직인다. 자본주의는 가부장적 불평등을 해소해야 생산성 향상에도 바람직하다고 설파하면서 열심히 이런저런 조치들을 만들어 내놓는다. 하지만 남/여 사이의 내적 대립은 오히려 심각해지는 형국이다. 만약 이병진이 이야기하는 “사회적으로 통합되지 않는 타자”를 이런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이 타자는 자본주의의 타자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이질적인 요인들을 체제내적 속성으로 지니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타자로 상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회주의 체제일 뿐이다. 하지만 전자든 후자이든 아도르노는 이런 종류의 타자들을 통해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을 타파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아도르노의 ‘비동일자’는 현실의 움직임이 자본주의적 팽창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사유해야하는가를 묻는 과정에서 도출된 철학개념이다. 이 ‘제대로 된 사유상의 개입’을 철학적 용어로 ‘번역’한 단어로 ‘형이상학’을 선택하였다고 해서 본인이 아도르노 해석의 오류를 범하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병진은 계속하여 두 가지 사항을 더 지적하였는데, 이 역시 ‘미학’과 ‘관념론’에 대한 비아도르노적 구도에서 비롯되는 착각이며, 근본적으로는 ‘비동일자’ 개념을 이해하는데서 드러난 방법론적 혼동의 결과이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정/반/합의 운동과정에 길들여진 우리의 두뇌가 정/반/반의 상태로 운동할 수 있도록 하는, 매우 ‘인위적인’ 계기이다. 이러한 ‘인위성’의 개입을 통해 아도르노는 인식주체가 절대적으로 현실추수적이지 않은 판단을 할 가능성을 찾았고, 인위성을 통한 가능성의 구체적 실현태를 예술에서 찾아보고자 희망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예술을 비진리인 현실을 거스르도록 하는 지킴이로 삼을 수 있으려면, 우리는 모두 철학적으로 훈련되어 있어야만 한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역할분담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아도르노가 비판철학자임을 고려하였을 때 크게 어긋나지 않는 진단이라고 여겨진다. “미학으로의 후퇴”라는 언술로 특징지은 이병진의 두 번째 지적에 대해서는 독일 비판철학의 ‘비판’을 다시 한번 환기하는 일로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아도르노는 철학의 종언을 선언했고, 보다 앞서 헤겔은 예술의 종언을 선언한 적이 있다. 헤겔의 경우에서 조차 ‘예술의 종언’ 테제를 예술의 쓸모없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편협하다. 아도르노와 헤겔은 모두 철학과 예술의 관계를 깊이 천착하였다. 인간이 지닌 이성능력과 감성능력의 가능성에 남달리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 영역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개념과 직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강조점을 부여하였고, 그 결과 상이한 이론이 도출되었다. 아도르노는 강력한 힘으로 감성마저 흡수해 들이는 헤겔의 절대이념에 필사적으로 반발하였다.               

 
철학적 계기인 비동일자는 외부에 타자를 설정할 수 없는 세계상태에 도달하였지만, 그럼에도 변증법적 사유는 포기하지 말아야하는 현대인이 자신을 스스로 타자화하기 위해 필요한 강력한 기제이다. 이 강력함을 본인은 한편으로 ‘형이상학’이라는 용어에 포함시키면서, 형이상학적 작용력 즉 ‘사유상의 개입’이 현실에서 구성체를 산출한다는 ‘관념론적’ 구도에 주목하였다. 아도르노가 현대예술의 새로움에 주목하면서 가능성을 계속 천착할 수 있었던 까닭도 사유가 현실관계에 미치는 작용력에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다.

▲STROZZI, Bernardo (b. 1581, Genova, d. 1644, Venezia) 'Old Woman at the Mirror' c. 1615 Oil on canvas, 132 x 108 cm Private collection ©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우리가 일상을 영위하면서 의지하는 동일화 사유의 관성을 끊임없이, 결국 마지막까지 배반한다. 자본주의는 동일화 전략으로 자기증식을 한다. 이 전략이 현실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까닭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동일화하는 사유를 하기 때문이다. 현대예술은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바로 자본주의적으로 구성되어있음을 깨달으라고 몰아간다. 이를 위해 예술이 자극적인 전략을 쓰는 때도 있다. 스스로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거울을 들이대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거울 속에 비추인 자신의 모습을 대면한 후, 다르게 살겠다는 다짐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 문제는 ‘희망’으로 남을 수도 있고, 강요된 요청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아도르노 이론의 한계와 가능성을 논하려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해야한다. 본인 역시 아직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 채이다. 단지 철학과 예술, 이론과 실천의 복합적인 관계에 대한 비유로 ‘거울’을 제시함으로써 이병진의 세 번째 지적에 대한 반론을 대신하려 한다.   
               
철학적으로 엄밀한 분석능력을 동원하면서도 아도르노는 철학의 완결성이 모든 것에 우선할만한 가치를 지닌다고 여기지 않았다. 개념이 객체에 일치하는가의 문제를 치밀하게 파고들어가다가 모순을 발견하였을 때 아도르노는 철학이라는 학문을 구출하지 않고 현실의 고통에 눈을 돌렸다. 우리의 파악능력이 세계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고통에 차 있다고 진단하였다. 아도르노의 이론적 관심은 바로 삶을 구출하는 데 있다.

어떤 이론의 해방적 기능을 논할 때 이른바 ‘사회비판적’ 관점의 유무를 척도로 삼지 않는 인문학 담론은 불가능한가.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은 ‘사회비판적’이지 않은 비판을 함으로써 철학과 예술 모두를 새롭게, 하지만 ‘정통’으로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이순예 / 서울대․문예미학

필자는 독일 빌레펠트대에서 ‘독일 고전문학에서 조화미 범주의 난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몽, 비판 그리고 예술’ 등의 논문이 있고, ‘아도르노와 자본주의의 우울’(풀빛 刊)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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