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07:05 (금)
문화비평_김우중·삼성·황우석, 잔혹한 인질극
문화비평_김우중·삼성·황우석, 잔혹한 인질극
  • 김진석 인하대
  • 승인 2005.06.28 00: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우중에게 국민은 인질이었다. 국민과 국민경제를 인질로 삼아 기업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피같은 국민의 세금이 대우그룹 구조조정을 위해 쏟아 부어졌다. 해외분식회계 40조를 빼도, 공적자금만 30조. 공적자금으로 투입된 돈은 국민 일인당 70만원 꼴이다. 소위 ‘세계경영’이 영업이나 경영 차원에서 새로운 차원을 개척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우는 미국 최대의 부도기업 엔론보다 큰 세계최대의 워크아웃기업이다. 국민 상대의 인질극은 사상 최대규모인 셈이다.

여기서 인질의 의미는 달라진다. 과거 인질은 물리적 폭력을 통해 무고한 사람을 강제로 억류해 자신의 소망을 이루는 일이었다. 그런 정의는 흘러간 옛날의 유물이다. 언젠가부터 인질은 그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폭력을 이용하되, 단순히 강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사람들을 돌리고 또 돌려서 자신의 소망을 이루는 일이다. 새로운 인질들은 어느 정도 자발적으로 인질범에 협조하는 듯하다. 국민은 경제발전을 위해 김우중식 인질극에 이끌려갔다. 울며 겨자 먹기로, 대마불사란 이름으로.

그런데 인질의 의미는 김우중 방식에서 더 폭력적으로 진화하고, 더 애매해진다. 이 경우 처참하게 실패로 끝난 인질극보다 현재 성공적으로 진행하는 인질극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많다. 현재 사람들이 매우 감동하고 열광하는 많은 사건들은 이 인질극으로 이해될 수 있다. 대우는 실패했지만, 현재 ‘삼성’은 그보다 훨씬 세련되고 당당한 모습으로 국민과 국민경제를 인질로 삼아 운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너무 세련되고 당당한 모습이어서 인질극이란 느낌도 잘 안 들 정도다. 국민은 ‘세계적 첨단기업’이란 이름과 상징을 유지하는 데 협조하는데, 그 상징의 효과는 대단하다. 사람들 행동은 울며 겨자 먹기가 아니라 웃으며 겨자 먹기로 진화한다. 외국인 소유 주식이 60% 정도 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도, 국민은 인질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듯하다.

삼성 못지않게 유명한 첨단의 인질드라마는 황우석 신드롬이다. 그 연구는 난치병 환자를 치료한다는 명분을 내건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좋은 일이기에, 그 명분은 당당하다. 그러나 유전자치료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갈등의 골을 줄이기는커녕 확대할 것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자유롭게 이동하지도 못하는 장애인단체의 대표와 암 치료약이 고가인 것에 항의해 싸우는 건강단체의 대표는 황 교수의 명분을 냉소한다. 가난한 환자들은 아직도 그리고 여전히 바닥에서 기거나 뒹굴 것이다. 여기서 보면 ‘난치병환자’는 배아줄기세포연구를 위한 휴머니즘적 인질인 셈이다.

그들과 다른 포괄적 인질은 국민이다. 생명공학연구는 10년 후 국민을 먹여 살릴 첨단연구로 각광받으면서 국민의 입과 미래를 인질로 삼는다. 개인들은 야릇한 기분으로 자문한다. 삼성이나 황 교수가 나를 먹여 살린다고? 심지어 더러운 느낌도 생길 법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잔인한 세계화 시대에 삼성이나 황 교수 연구가 국가 이미지를 제고시킨다는 것을, 그래서 상징적으로 국민의 몸값이 올라간다는 것을 정색하고 부정할 기분이나 기운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선뜻 생기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인질극에 순전히 ‘자발적으로’ 가담하고 협조한다고 허풍떨지는 말자. 설령 자발적 태도가 있더라도 그것이 온통 지배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自意 반의 반, 반의 반의 반으로 협조하는 시늉을 한다. 또 모든 국민국가가 동일하게 인질극을 벌인다고 과장하지도 말자. 강한 국가는 오늘도 약한 국가를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니까.

모든 시스템들은 다른 시스템들에게 서로 인질극을 벌이며, 시스템은 그 안의 개인들을 볼모로 삼고 있어서, 개인들에게는 도망갈 틈이 점점 좁아지는 듯하다. 심지어 인질극은 어떤 다른 것보다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벌어지니, 그 잔인함이란! 그러나 인질들도 그냥 개털로 끝나지는 않는다. 언제든지 깨끗이 인질극을 그만두기는 힘들겠지만, 우리를 옭아매는 인질극을 그만 두는 것도 가능하다. 거기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에 탈을 내는 방식도 충분히 가능하다. 똑똑한 인질이 되자.

김진석 / 인하대 철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강신표 2005-07-12 05:13:18
김진석 교수님,
정신이 번쩍 납니다.
좋은 지적이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자연생태계가 그대 글이 연상 시킵니다. 즉 먹이사슬 말이오. 그속에서 "똑똑한 인질"이 된다는 것은 가능할까요 ?!
그대는 독자를 인질로 삼는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