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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化전략'이 안겨준 정체성 상실
'同化전략'이 안겨준 정체성 상실
  • 정무정 덕성여대
  • 승인 2005.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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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_‘전성우 50년의 발자취’ 展(가나아트센터, 5.27~6.19)

‘전성우 50년의 발자취 1955-2005’는 매우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는 작가를 되돌아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특히, 고희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이번 회고전은 우연히 발견된 그의 미국 유학시절 작품도 포함하고 있어, 그의 작품세계를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장남인 덕택에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할 수 있었던 고미술품을 통해 한국의 미의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었고, 한국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국 유학 길에 올라 서양화가로서 입지를 굳혔으며, 귀국 후 2회의 개인전을 갖고 나서 가업을 잇기 위해 20년간 작품 활동을 접어야 했던 전성우. 지금까지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조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배경에는 이와 같은 그의 인생역정이 자리하고 있다.

전쟁의 북새통 속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을 거쳐 캘리포니아 미술학교와 오클랜드의 미즈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기까지 6년의 기간은 전성우의 화풍이 형성되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가 학창시절을 보낸 샌프란시스코는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으로 일찍부터 동양의 사상과 문화에 노출되어 있던 곳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이러한 문화적 토양 덕분에 뉴욕 추상표현주의의 위세가 미대륙을 벗어나 유럽과 아시아로 뻗어가고 있던 때에도 추상표현주의 양식을 소화해 샌프란시스코 화파(San Francisco School)라는 독자적 화풍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성우가 수학하던 1950년대 후반 샌프란시스코는 문화적으로 과도기였다. 절정에 달한 추상표현주의 양식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고, 추상표현주의 양식에 구상적 요소를 가미한 베이 에어리어 구상회화(Bay Area Figurative Painting)가 새로운 경향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직접성, 즉흥성, 분위기와 감정의 소통과 같은 추상표현주의의 이상을 구상적 요소에 접목시킨 이 새로운 경향을 주도한 인물들은 샌프란시스코 화파 제2세대라 불리는 엘머 비숍, 데이비드 파크, 리처드 디벤콘 등이었다. 이들의 구심체가 바로 전성우가 다니던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였고, 비숍은 그의 스승이었다.

이번에 공개된 그의 유학시절 작품 중 ‘외로운 인물’, ‘캘리포니아 풍경’ 등은 인물과 풍경을 대담하게 압축하고 단순하게 처리한 점에서 비숍과 디벤콘의 영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특히, 추상표현주의의 즉흥성을 보여주는 1954년의 ‘운경’에서 베이 에어리어 구상회화라 할 수 있는 1958년의 ‘외로운 인물’까지의 과정을 보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역력히 드러난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크고 작은 공모전에서 많은 수상경력으로 보상받았다. 이러한 점에서 1950년대 후반의 그의 작품이 갖는 의의는 당대 샌프란시스코 화단과 관련해서 살펴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전성우의 50년대 후반 작품은 그의 철저한 동화 전략의 산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 낯선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이 동화 전략은 그 대가로 정체성의 상실이라는 희생을 요구했다. ‘원숭이’나 ‘외로운 인물’에서 화면을 지배하고 있는 인물과 동물의 애처로운 모습에는 그러한 작가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1965년 1월 볼스 화랑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에 대한 평에서 한 비평가가 “딸기 아이스크림 소다와 같은 경쾌한 색채감각”을 칭찬하면서도 “그는 물감을 잘 다루나 아직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라고 한 것도 주류 사회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정체성을 상실한 작가의 모습을 대변한다.

그가 밀스 대학원 진학 이후 ‘만다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상실한 정체성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만다라’연작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귀국 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귀국 후 제작된 ‘색동만다라’에는 케니스 놀란드나 모리스 루이스의 작품과 동일한 형태와 재료가 사용되고 프랭크 스텔라와 로버트 모리스의 작품처럼 형태화된 캔버스와 3차원의 기하학적 형태가 등장한다. ‘만다라’라는 주제 속에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에서 나타난 다양한 경향을 응집시키려는 듯한 이러한 시도에는 한편으로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신예작가로서 최신의 미술경향을 소개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느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목소리로 미국미술을 자유자재로 요리하려는 자신감도 느껴진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그가 교육자의 길로 들어섬과 동시에 열매도 맺지 못하고 종결되고 만다. 당시 한국화단이 앵포르멜의 포화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팝 아트, 옵 아트, 해프닝 등을 수용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중도하차는 미술계로서는 큰 손실이었다. 두 번째 개인전 이후 “앞으로는 정말 창의적인 실험이 시도돼야겠다. 재료의 제한도 탈피할 것은 분명한데, 그것은 한국풍토에 젖어드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포프나 해프닝이 이 땅에서 부자연스럽고 쇼처럼 여겨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고 한 그의 지적에는 한국미술계의 흐름을 바꿀 야심과 용기가 엿보여 그의 부재를 더욱 아쉽게 하고 있다.

그가 1990년대부터 다시 붓을 잡고 ‘광배만다라’와 ‘청화만다라’와 같은 연작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고 있긴 하나 그간의 공백이 너무 크게 다가온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전성우의 작업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분석과 평가가 이어지길 기대한다.

정무정 / 덕성여대 미술사

필자는 미 씨티대에서 ‘추상표현주의, 앵포르멜, 한국현대미술, 1945-1965’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추상표현주의와 한국 앵포르멜’등의 논문과, ‘신고전주의’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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