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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단 혹은 자유로움...성급한 정치적 편견도
독단 혹은 자유로움...성급한 정치적 편견도
  • 임영봉 중앙대
  • 승인 2005.06.27 0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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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비평세계와 이념성

 

김윤식, 그는 뛰어난 문학비평가이자 탁월한 학문적 성취를 이룬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초인적인 작업의 분량,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유의 폭과 깊이는 김윤식이 가진 명성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그에 대한 물음이 정식으로 제기되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의 논쟁으로 발전해나가고 있다.

나는 이번 논쟁이 한국 문단과 국문학계-특히 학문후속세대들이 김윤식이라는 ‘전통’을 어떻게 계승하고 극복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지금 우리는 ‘김윤식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라는 과제에 직면해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정확한 비판과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문단과 국문학계 내부에서는 그런 문제의식이 전혀 제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김윤식이 <현대문학>을 통해 평단에 데뷔한 시점은 1962년이었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한국 근대문예비평사 연구󰡕가 출간된 것은 1973년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평단이나 국문학계에서 그가 수행해온 여러 가지 작업들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 혹은 본격적인 의미의 논쟁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상식의 차원에서 생각하더라도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김윤식이라는 존재는 문단이나 학계의 안팎에서 ‘매혹’의 대상이거나 ‘인용’의 대상, 혹은 때때로 ‘시기나 질투’의 대상은 되었지만 그가 수행한 비평적 글쓰기나 문학사 연구의 결과와 관련하여 진지하고 엄밀한 의미의 질문 대상으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제삼자의 시각에 설 때 이는 평단과 국문학계의 비생산적인 풍토와 폐쇄적 성격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꼬집어 말하자면 김윤식이라는 존재에 대한 그동안의 침묵은 앞서 거론한 그런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인 비정상적인 성격의 ‘무관심’이 초래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비평가이자 문학사가로서의 김윤식이 가진 문제점에 대한 지적은 그동안 ‘단편적인’ 형식으로, 그것도 대개 ‘외부’로부터 간혹 제기되어왔다. 그 중에서 재미 정신과의사 이중오가 󰡔이광수를 위한 변명󰡕(중앙M&B, 2000)에서 행하고 있는 김윤식 비판은 경청할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김윤식이 오랜 시간을 바쳐 가장 공들여 쓴 󰡔이광수와 그의 시대󰡕(한길사, 1986)에 대해 “움직일 수 없는 편견과 선입견으로 가득 차 마치 학술 서적으로 위장한 정치적 팸플릿을 보는 것 같았다”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중오의 판단에 의하자면, 김윤식은 자신의 취향과 믿음에 의거하여 작업하는 ‘순진한 전문가’로서 그의 연구는 학문적 접근의 보편성과 객관성에 미달하는 ‘졸속한 추론’과 ‘황망한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249쪽) 물론 이중오의 이러한 김윤식 비판은 지나친 측면이 있고 그래서 우리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지만 그가 지금까지 한 번도 정식으로 제기된 바 없는 문제의 핵심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상식적인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거론했다는 사실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중오의 문제의식은 김윤식의 이광수 연구가 보여주는 ‘비과학성’에 초점을 둔 것으로 김윤식에 대해 학자적 양심을 묻는 지경에까지 나아갔다. 물론 비평가이자 문학사가로서 김윤식은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탐구행위를 지탱하는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유지해왔다. 막스 베버의 사회학에서부터 시작하여 헤겔의 역사철학과 미학, 루카치의 초기 문학론, 골드만의 문학사회학, 바흐찐의 소설론, 고진의 근대문학론 등에 걸쳐 있는 철학사상과 문학이론 수용이 그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수행하고 있는 비평적 글쓰기나 문학사 연구는 그러한 방법론적 틀을 벗어난 차원에서 ‘자유롭게’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이중오의 지적처럼 김윤식은 어떤 작가 혹은 작품을 다룰 때 객관적인 논리와 방법에 근거하기보다는 자신의 신념과 가치에 따라 판단하며 따라서 그 결과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기보다는 특수한 주관성, 그러니까 ‘김윤식적인’ 혹은 ‘김윤식다운’ 해석과 판단이라는 느낌으로 강하게 남을 수밖에 없다. 이광수를 비롯하여 그가 정성을 쏟고 있는 작가연구의 분야-임화, 염상섭, 김동인 등에 대한 논의에서 이런 문제는 뚜렷하게 나타난다. 예컨대 󰡔임화연구󰡕는 그가 서두에서 제기하고 있는 바, “임화의 이러한 행적(소년기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임화의 개인사:필자)은 조금도 정치적이거나 혁명적인 것이 아니라 한 소년의 영혼의 갈증의 세속적인 여러 형태의 드러냄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KAPF 조직론에 열중하는 일, 전향하는 일, 남로당 혁명전략에 골몰하는 일이란 영혼의 갈증을 향한 질주의 형식인데, 이 형식의 특이함은 중단이 없다는 것과 공포감이 없다”는 판단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그 본론은 미리 준비된 이 판단을 연역적으로 설명해나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김윤식은 임화라는 존재의 본질을 상상적인 영혼, 즉 ‘문인’으로서의 성격에 두고 그 결론을 그가 시인의 자리로 돌아가는 데서 이끌어낸다. 그렇지만 이 나라 문학사에서 ‘정치’와 가장 굳건하게 연결되어있는 인물 중의 하나가 임화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그가 그려낸 임화의 모습은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

한동안 김윤식은 ‘발바닥으로 글을 쓴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한국 근대문예비평사 연구󰡕 이후 그의 작업은 ‘실증’보다는 ‘해석’을 추구한 것이고 이때 그가 취하고 있는 해석적 관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문이 제기되는데, 특히 작가론에서 김윤식이 보여주는 해석적 관점은 주관적인 감정과 비약적인 논리에 의거할 때가 많다. 이와 같은 문제점은 비평가 백철에 대한 김윤식의 태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백철은 많은 비판의 소지를 안고 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일제강점기로부터 60년대에 이르기까지 누구보다 성실하게 많은 글들을 썼고 문학사적으로도 중요한 여러 국면들과 관련되어있다. 그렇지만 김윤식은 백철에 대해 시종일관 ‘그로부터는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부랑 지식인이니까’라는 사고를 유지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런 김윤식의 판단이 구체적인 논의를 통해 제출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이는 김윤식 자신이 선취하고 있는 판단들이 논의를 요구하는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평가를 대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경우이다.

그 자신이 ‘자의식’이라고 부르면서 스스로 강조하고 있는 이러한 성격의 주관적 의지는 김윤식의 비평행위를 지탱하고 있는 동시에 그의 비평에 대한 매혹적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비평가로서 김윤식이 거둔 성공은 많은 부분에서 비평적 글쓰기 자체가 그런 주관의 모험, 즉 ‘자유로움’을 허용하는 측면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문제는 지속된다. 그가 현장 비평에서 작가와 작품을 선별하고 평가하는 최종적 기준이 이번에는 문학사의 지평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비평가로서 김윤식은 문학사적 관점이라는 객관성을 도입하여 비평의 자유를 스스로 제약하면서 자기 판단의 근거, 합리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때에도 그가 제시하는 문학사의 파악은 여전히 ‘감각’의 차원에 놓여 있는 자의적인 성격을 안고 있다. 김윤식을 지배하고 있는 이러한 의미의 ‘비과학성’은 김현에 의해 일찍이 환기되었다. 김현은 김윤식의 작업이 ‘방법’이 아니라 ‘직감’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지적한 바 있다.

최근에 나는 어느 학회에 나가 ‘문협파’ 연구와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발표 토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내가 제기하고자 했던 문제의 핵심은 ‘문협정통파’라는 용어에 놓여 있었다.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등의 문인그룹을 일컫는 이 용어는 70년대 중반 김윤식에 의해 창안된 이후로 아무런 검토 없이 지금까지 문학사 연구의 키워드로써 구사되고 있다. 그 학회 석상에서 나는 문학사 연구에 있어 대단히 민감하고도 중요한 판단을 함축하고 있는 ‘정통’이라는 단어가 김윤식에 의해 아무런 의미규정 없이 제시되고 또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측면을 강조하면서 그런 용어법이 “객관성을 생명으로 하는 문학사 연구과정에서 선입견이나 오해의 소지로 작용”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궁극적으로 김윤식에 의해 통용되기 시작한 ‘문협정통파’라는 개념이 가진 중요성은 용어법 상의 문제를 넘어서 있는데 그것은 문학사를 평가하는 관점 자체가 거기에 내포되어있기 때문이다. 김윤식은 일찍이 학문의 가치중립성을 스스로 환기시키면서 자신의 공평무사함을 내걸었지만 실제 그의 작업이 보여주고 있는 성격은 다른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문협정통파’라는 용어를 뚜렷한 규정도 없이 김윤식 자신이 제시하고 사용했다는 것은 김동리를 포함하여 조연현, 서정주,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유치환 등이 결집한 문인그룹을 문학사의 주류로 일찍이 인정해 버렸음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사 연구와 관련하여 김윤식은 ‘문협정통파’ 뿐만 아니라 ‘여성편향성’(Female-Complex)과 ‘누이컴플렉스’, ‘현해탄컴플렉스’, ‘해방공간’, ‘고백체’와 ‘내면풍경’, ‘부계문학’ 등 많은 중요한 용어와 개념들을 창안해냈으며 그런 작업들이 우리 문학사 연구의 깊이와 넓이를 확대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협정통파’의 경우가 그러한 것처럼 그것들이 가진 의미상의 외연과 내포는 엄밀한 논의를 통해 수정되거나 보완되어야만 한다.

이 글의 매듭을 짓고자 하는 대목에서 내 머리 속을 떠돌고 있는 망상은 그 누구도 가질 수 없었던 열정으로 평단과 학계의 전무후무한 전통을 쌓아올린 김윤식이 자신의 견고한 믿음에 갇혀 자기가 다루고 있는 작가나 작품에 대해 ‘신’처럼 군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어리석은 생각들이다. 이 물음이 조금이라도 진실성을 띠는 것이라면, 그가 내세우고 있는 가치중립성이란 그런 자신에 대한 자각적 의식의 발로이자 그래서 일종의 책략을 의미할 뿐이다. 만약 김윤식 자신조차 ‘정신주의’ 혹은 ‘초월주의’에 포섭될 수 있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라면 우리는 문제의 근원으로 돌아가 그가 근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엄밀한 것이며 아직도 유효한 것인지를 물어야만 하고 궁극적으로 그것으로부터 비평사의 새로운 전통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임영봉(중앙대 교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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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루 2005-06-27 20:41:17
그가 어느 어느 계보에 서 있어야 직성이 풀리겠는가...
그다운 그는 안되는지...
그것을 받아들이면 안되나.....

X 2005-06-27 18:38:38
이럴 시간에 똑바로 책 읽고 글 좀 써라! 상징 놀음은 그만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