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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충수 이화여대 교수] “적절한 한계 있어야 더욱 완전해진다”…죽음 앞 인생이 아름다운 이유
[한충수 이화여대 교수] “적절한 한계 있어야 더욱 완전해진다”…죽음 앞 인생이 아름다운 이유
  • 김재호
  • 승인 2021.10.21 0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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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철학적 생각을 배우는 작은 수업』(칼 야스퍼스 지음 | 한충수 옮김 | 이학사 | 277쪽) 번역한 한충수 이화여대 교수

과학·과학지상주의 구분해야 세계 바로 볼 수 있어
불완전한 인생이라고 이 세계가 결함 있는 건 아냐

“칼 야스퍼스는 과학에 대한 비과학적 맹신, 즉 과학 지상주의를 비판했다.” 칼 야스퍼스(1883∼1969)의 『철학적 생각을 배우는 작은 수업』를 번역한 한충수 이화여대 교수(철학과)는 <교수신문>과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야스퍼스. 그는 독일 바이에른주 공영방송의 텔레비전 대학에서 한 강의의 원고를 묶어 책으로 출간했다. 지난 11일 이화여대에서 한 교수를 만나 칼 야스퍼스의 사상에 대해 들어봤다.  

한충수 이화여대 교수는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에서 하이디거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번역서로 한병철의 『선불교의 철학』, 하이데거의 『철학의 근본 물음』이 있다. 사진=김재호  

이 책을 읽다보면, 야스퍼스의 과학적 소양이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야스퍼스는 우주나 물리학 등 과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야스퍼스가 의사 출신이어서 그럴까? 한 교수는 “야스퍼스에게 상식 이상의 자연과학적 소양이 있었던 것은 그가 의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철학 교수가 되고 난 후에도 물리학이나 화학 등등의 새로운 학문적 성과에 관심을 가지고 지속해서 지식을 쌓아 나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진리의 차원에선 야스퍼스가 철학의 손을 들어주는 것처럼 읽힌다. “진리에 대한 결단은 과학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 결단은 과학 자체를 최고로 선명하게 만들기 위한 기준이 됩니다.”(133쪽) 이에 대해 한 교수는 “과학은 철학을 정립할 수 있는 근본 토대가 된다. 그런 토대가 없는 철학은 죽어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연과학이 삶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과학 지상주의의 편협과 오만으로부터 삶을 지켜주는 것이 철학이라고 야스퍼스는 믿고 있다”라고 답했다. 아울러, 그는 “과학은 철학을 위한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라난 철학은 그 시작점으로 항상 다시 되돌아와 과학이 독단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지킴이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철학은 과학의 독단을 경계하는 지킴이

책에 등장하는 첫 번째 강의 ‘우주와 생명체’를 읽어보면, 과학이 세계를 분열된 것으로 봄으로써 우리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표현이 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종교·철학과 같이 세계를 바라보는 총체성 혹은 보편타당성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한 교수는 “야스퍼스가 우려를 표하는 과학은 고도로 전문화되어 가는 개별 과학”이라며 “근대 과학의 발전으로 세계는 미신과 마법으로부터 풀려나게 되었는데, 야스퍼스는 낡은 마법으로부터 풀려난 세계가 과학 지상주의라는 새로운 마법에 걸렸다고 말한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과학이 절대적인 것이 됨에 따라 실제로 경험하는 많은 것이 부정되기에 인간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게, 어쩌면 더 자유롭지 못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세 번째 강의는 의식과 자아를 설명하는데, 야스퍼스에게서 ‘인간중심주의적 사고’가 느껴지기도 한다. 범우주적 시각에서 인간만이 다른 생물에 비해 특별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한 교수는 야스퍼스의 ‘아우름(das Umgreifende)’ 개념을 설명했다. 아우름은 포괄자(包括者)로도 번역된다. 한 교수에 따르면, 아우르는 방식에는 네 가지가 있다. 현존, 의식, 정신, 실존이다. 현존은 자신의 주변 세계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 의식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것, 정신은 현실을 넘어 상상하는 것, 실존은 자유롭게 초월자와 관계하는 것이다. 

한 교수는 “인간은 이 모든 방식으로 존재하지만, 식물과 동물은 오로지 현존의 방식으로만 존재한다”라며 “인간과 동식물의 아우름의 방식은 분명 다르다”라고 답했다. 그는 이런 점으로 야스퍼스가 인간 중심적인 생각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특히 한 교수는 “야스퍼스의 철학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은 바로 초월자, 즉 신”이라며 “인간은 신과 자유롭게 관계할 때만 인간답게 있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신을 품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신의 인간다움을 비워야 할 것”이라며 “따라서 야스퍼스의 철학은 ‘인간이 중심에 있지 않은 인간주의’를 특징으로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밝혔다. 

야스퍼스는 이 책을 통해 초월적 사랑을 강조한다. 한계상황에 직면하는 인간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한 교수는 인생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이 세계가 결함이 있는 것인지 반문했다. 한계가 있다고 불완전한 것인가? 예를 들어, 고속도로에 속도 제한이 없는 게 더 좋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한 교수는 “오히려 한계가 있는 것이 더 완전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것은 적절한 한계까지도 갖춘 것일 수 있다”라고 답했다. 죽음이 있기에 인간은 삶을 더 천천히 살 수 있고, 그 삶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다. 한 교수는 노부부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답했다. “평생 함께 살면서 아로새겨진 노년의 아름다움에는 한갓 기억 속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보다 더 고운 것이 있다.”

 

신을 품기 위해선 인간다움 비워야

야스퍼스는 여덟 번째 강의에서 ‘심리학과 사회학’을 다룬다. 심리학은 프로이트, 사회학은 맑스로 대표된다. 그런데 야스퍼스는 맑스주의자, 정신분석학자와의 토론을 통해 맑스의 사상과 프로이트의 사상이 왜곡되는 지점을 비판한다. 이에 대해 한 교수는 “과학과 과학 지상주의를 구분한 것”을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마찬가지로 맑스의 사상과 맑스주의, 프로이트의 사상과 프로이트주의도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야스퍼스는 맑스와 프로이트의 사상을 “인간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을 얻을 가능성”으로, 맑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를 “예언자처럼 나타난 비뚤어진 철학이 될 가능성”이라고 적었다.(156쪽)  

아울러, 한 교수는 “야스퍼스가 보편 과학과 전체주의적 과학을 구분한다”라며 “심리학과 사회학은 모든 인간적 현상을 자신들의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기에 보편 과학”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하지만 두 과학이 인간의 본질 전부를 자신들의 연구 대상으로 착각하면 전체주의적 과학이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점을 경계해야 맑스주의·프로이트주의가 “각각의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으로까지 나서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런 해석은 맑스의 사상, 맑스주의, 맑스주의자를 구분해야 한다는 비판과 맞닿아 있다. 

 

맑스의 사상과 맑스주의는 구분해야

야스퍼스의 방송 강연 원고를 담은 이 책의 의의는 무엇일까? 한 교수는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철학 교육을 위해서 텔레비전을 활용한 최초의 독일어권 철학자들 가운데 한 명”이라는 것이다. 둘째, 야스퍼스 철학의 정수를 열세 번의 강의에 온전히 담으려고 했다. 한 교수는 “철학이 다룰 수 있는 모든 주제, 자연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 예술 및 철학 등등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셋째, 제2부 ‘정치에 관해서’가 1960년대 독일의 정치적 상황을 다루는데, 현재 한반도의 상황과 여러 측면에서 비슷해 시사점이 있다. 

『철학적 생각을 배우는 작은 수업』에는 철학에 대한 야스퍼스의 시선이 담겨 있다. 철학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데서부터 우리 인생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철학적 안목을 기르기 위한 첫걸음은 자명한 것에 대해 놀라움을 느끼는 데에 있습니다.”(66쪽) “철학은 미래가 열려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해야 하고, 아무리 그 형태가 찬란하더라도 인간이 만든 것에는 모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은 모든 새로운 구체적 상황에서 책임감을 키워줄 것입니다.”(51쪽)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의사 출신으로서 칼 야스퍼스는 과학적 소양도 매우 뛰어난 듯 보인다. 철학자로서 우주나 물리학 등 과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설명한다. 그런데, 과학과 진리의 차원에선 철학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객관적 사실만으로 가치판단이 어렵긴 하겠으나, 객관적 사실이 가치판단을 위한 시작점이 되는 건 아닐까. 
(133쪽 진리에 대한 결단은 과학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 결단은 과학 자체를 최고로 선명하게 만들기 위한 기준이 됩니다.) 

저도 이 책을 번역하면서 야스퍼스의 뛰어난 자연과학적 소양 때문에 적잖이 고생했습니다. 그가 언급한 과학적 사건에 대해 저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터넷과 도서관의 자료를 바탕으로 이 책에 등장하는 과학적 개념 및 이론에 관한 공부를 먼저 시작했습니다. 그 공부를 바탕으로 많은 역주를 붙였습니다. 저의 주석이 도움이 되어 독자 여러분이 야스퍼스의 생각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하게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야스퍼스에게 상식 이상의 자연과학적 소양이 있었던 것은 그가 의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철학 교수가 되고 난 후에도 물리학이나 화학 등등의 새로운 학문적 성과에 관심을 가지고 지속해서 지식을 쌓아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가 왜 그랬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자님의 궁금증도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 제가 「옮긴이의 말」을 작성할 때 한스 자너Hans Saner가 쓴 야스퍼스의 전기를 신상희 선생님의 번역을 통해 참조했는데, 거기서 한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만 18세 법학과 대학생 야스퍼스가 자신의 진로를 계획한 내용입니다. “‘언제부턴가 법학을 포기하고 의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 앞으로 철학 박사가 되고 싶지만, 그보다는 우선 심리학과 철학을 정립할 수 있는 근본 토대의 하나로서 의학 공부를 심도 있게 하고자 합니다. … 현재 제 계획은 이렇습니다. 11학기에서 12학기 정도에 해당하는 정해진 학기를 마친 다음 국가 자격시험을 보려고 합니다. 그런 이후에도 지금처럼 자신감이 넘치면 정신병리학과 심리학을 전공할 것입니다. … 의학과 자연과학을 섭렵한 저에게는 철학이 살아 숨 쉬게 될 것입니다. 철학은 자연과학의 그릇된 오만과 편협한 생각으로부터 저를 지켜줄 것입니다. 철학은 삶 전체에 내용을 부여해주니까요. 철학은 또한 자연과학적인 사유의 부당함으로부터 저 자신을 지켜줄 것입니다.’”(『철학적 생각을 배우는 작은 수업』, 267쪽) 여기서 야스퍼스가 생각하는 의학 및 자연과학이 철학과 맺는 관계가 보입니다. 과학은 철학을 정립할 수 있는 근본 토대가 됩니다. 그런 토대가 없는 철학은 죽어 있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연과학이 삶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과학 지상주의의 편협과 오만으로부터 삶을 지켜주는 것이 철학이라고 야스퍼스는 믿고 있습니다. 과학과 철학의 관계를 나타내는 그의 말을 하나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과학적 연구는 그 자체로 철학인 것은 아니지만 철학을 위한 상황을 마련해줍니다. 과학과는 다른 근원에서 샘솟은 철학은 각각의 과학의 상황 속에 나타납니다. 철학은 그 상황을 이해하고 밀어붙입니다.” 그러니까 과학은 철학을 위한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라난 철학은 그 시작점으로 항상 다시 되돌아와 과학이 독단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지킴이가 될 것입니다.

△첫 번째 강의 중 과학이 세계를 분열된 것으로 봄으로써 우리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표현이 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종교·철학과 같이 세계를 바라보는 총체성 혹은 보편타당성이 사라졌기 때문인가.
(30쪽 과학에 따르면 세계는 분열된 채 우리 앞에 있습니다. 과학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세계는 더욱더 깊이 분열될 것입니다. 그런데 낡은 세계상으로부터의 자유는 잘못된 과학을 과학적이라고 착각하는 세계상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이 새로운 세계상은 이전의 어떤 세계상보다도 우리의 자유를 더 많이 억압합니다.)

야스퍼스가 우려를 표하는 과학은 고도로 전문화되어 가는 개별 과학을 말합니다. 그러한 과학은 세계를 전체적으로 보려 하지 않고 그 일부에 관해서만 연구합니다. 각 분야의 과학자들은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순수히 자기 분야의 연구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방향으로 점점 더 나아갑니다. 그럴수록 분열된 과학들 사이의 간격은 더욱더 넓어지고 각 과학이 탐구하는 세계의 부분들 사이의 골은 더욱더 깊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세계는 찢어진 채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과학적 세계관 속에 놓인 분열의 문제와 관련해서 야스퍼스는 자유의 억압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때 억압은 근대 과학의 탄생 이전에 없던 것이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있던 것이 더 심해진 것을 말합니다. 근대 과학이 발전하기 전에 세계는 마법에 걸려 있었습니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신화에 보면 날씨의 변화는 신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람을 불게 하려고 제물을 올리거나 비가 오도록 기우제를 지내야만 했습니다. 분명 인간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스인들도 자신들의 신화를 더이상 믿지 않습니다. 근대 과학의 발전으로 세계는 미신과 마법으로부터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스퍼스는 낡은 마법으로부터 풀려난 세계가 과학 지상주의라는 새로운 마법에 걸렸다고 말합니다. 이 새로운 마법은 인간의 자유를 더 많이 억압한다고 합니다. 자연과학이 세계의 모든 사물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됨으로써 과학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과학에 대한 비과학적 맹신입니다. 예컨대 여행을 가서 높은 산이나 넓은 바다를 마주하면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기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운은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므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인정받지 못합니다. 과학이 절대적인 것이 됨에 따라 실제로 경험하는 많은 것이 부정되기에 인간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게, 어쩌면 더 자유롭지 못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식과 자아를 설명하는, 세 번째 강의를 읽다보면, '인간중심주의적 사고'가 느껴진다. (범우주적 시각에서) 인간만이 다른 생물에 비해 특별하다고 할 수 있을까.
(62쪽 생생한 현존(아우름)은 스스로에 대해 모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다른 방식의 아우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리키는 대상을 향하면서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방식의 아우름입니다.)  
 

야스퍼스는 아우름의 여러 방식에 대해서 말합니다. “아우름”은 야스퍼스의 개념 das Umgreifende에 대한 번역입니다. 이 개념은 “무엇인가가 다른 무엇인가를 자기 자신 안에 포함하는 것”을 뜻하는 독일어 동사 umgreifen의 현재분사를 명사로 만든 것이고, “포괄자包括者”로도 번역됩니다. 아우르는 방식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현존現存, 의식, 정신, 실존입니다. 현존은 자신의 주변 세계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이고, 의식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고, 정신은 현실을 넘어 상상하는 것이고, 실존은 자유롭게 초월자와 관계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모든 방식으로 존재하지만, 식물과 동물은 오로지 현존의 방식으로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인간과 동식물의 아우름의 방식은 분명 다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야스퍼스가 인간 중심주의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 중심주의”라는 표현은 여러 맥락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닙니다. 가령 종교와 관련해서는 세계의 중심이 신이 아니라는 인간임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야스퍼스의 철학은 인간 중심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그의 철학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은 바로 초월자, 즉 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신과 자유롭게 관계할 때만 인간답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중심이 되기 위해서 그 핵심에는 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신을 품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신의 인간다움을 비워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야스퍼스의 철학은 “인간이 중심에 있지 않은 인간주의”를 특징으로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세대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 팬데믹에 의해, 무기력감과 우울증 등에 휩싸여 있다. 이를 야스퍼스가 제시한 '한계상황'의 측면에서 어떻게 해석 가능할까? 모든 인간이 한계상황을 피할 수 없는 것일까?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아예 세상에 관심이 없거나 세상을 떠나서 '별일 없이 산다'는 노랫말처럼 살기도 한다.

제가 “한계상황”으로 번역한 독일어는 Grenzsituation입니다.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평범한 수단이나 조치로 해결할 수 없는 이례적인 상황”입니다. 야스퍼스의 철학적 개념으로서 한계상황은 사람이 자기 존재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가 언급한 한계상황에는 고통, 죄책감, 운명, 투쟁, 세계의 불확실성, 죽음 등이 있습니다.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전 세계적인 대유행의 위기도 한계상황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지구적 차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는 계속해서 확산하고 있고, 백신 접종률의 증가와 치료제의 개발에도 감염병 이전의 상황으로 언젠가 돌아갈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세계 곳곳에서 하루하루 늘어가는 누적 사망자 수는 매일같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장시간 노출되면 누구나 우울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 이후 현재까지 그 박멸을 목표로 했지만, 이제는 점차 위드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즉, COVID-19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피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쩌면 평생 마스크를 쓰고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社會적 동물인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교제交際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본질이 절실히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펜데믹이 끝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사교社交를 너무나 필요로 하는 인간의 존재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유로운 실존(혹은 현존)'이라는 표현은 서로 배반적인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현존은 한계상황처럼, 혹은 부처가 말한 "인생은 고통" 속에 있게 되는데, 어떻게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이 책에서 야스퍼스는 자유 개념을 무수히 사용하면서도 그 의미를 명확하게 정의해 놓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 개념은 크게 두 가지 맥락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첫 번째 자유는 정치적 자유입니다. 야스퍼스는 “인간은 정치적 자유와 더불어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자국 안에서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국제적으로 존립하는 인간이” 된다고 말합니다.(115쪽) 이러한 자유는 억압받는 사람들이 투쟁을 통해서 해방되는 것을 말합니다. 야스퍼스도 영국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미국의 독립 전쟁을 예로 언급합니다. 이러한 정치적 자유는 “~로부터의 자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를 향한 자유”도 있습니다. 야스퍼스가 말하는 두 번째 자유, 즉 실존의 자유가 그렇습니다. 그는 실존할 수 있는 인간이 곧 자유라고 말합니다. 또 “자유로운 실존은 스스로가 초월자[신]와 관련된 것을 알고 있고, 초월자에 의해 스스로를” 선물 받는다고 합니다.(64쪽) 이와 같은 자유는 종교적 체험과 관련이 있으므로 성경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뿐인 아들을 신에게 제물로 올리기 위해 희생하려 했던 아버지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행히 천사가 나타나 아버지를 말렸기에 아들은 목숨을 잃지 않았습니다. 살인은 윤리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이지만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희생하라는 신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제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신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기가 속한 사회의 윤리를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자 모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자신은 이집트의 왕궁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았으나 어느 날 신의 명령에 따라 억압받는 자기 민족과 이집트를 탈출했습니다. 모세 역시 이집트 국가의 법을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신을 향한 자유를 보여준 아브라함과 모세 모두 그 실존이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야스퍼스가 지적하는 맑스주의(사회학)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심리학) 비판은 맑스주의자와 프로이트주의자에 대한 비판처럼 읽힌다. 맑스와 프로이트가 전체주의적인 과학이라고까지 자신들의 이론을 주창한 것 아닌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질문과 관련해서는 야스퍼스가 과학과 과학 지상주의를 구분한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과학 지상주의는 과학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며 과학이 알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경향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믿음을 야스퍼스는 과학적 맹신, 즉 과학에 대한 비과학적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맑스의 사상과 맑스주의, 프로이트의 사상과 프로이트주의도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야스퍼스는 전자를 “인간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을 얻을 가능성”으로, 후자를 “예언자처럼 나타난 비뚤어진 철학이 될 가능성”이라고 말합니다.(156쪽) 또 야스퍼스는 보편 과학과 전체주의적 과학을 구분합니다. 심리학과 사회학은 모든 인간적 현상을 자신들의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기에 보편 과학입니다. 하지만 두 과학이 인간의 본질 전부를 자신들의 연구 대상으로 착각하면 전체주의적 과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맑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는 각각의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으로까지 나서게 된다고 합니다. 이 점을 야스퍼스는 경계하는 것입니다.

△과학의 한계, 초월자, 암어문, 실존, 한계상황, 정치적 자유, 죽음 등 야스퍼스의 개념들과 강의를 보면, 기본적으로 이 세계가 불안전하고 파괴적이며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듯하다. 이로써 더 나은 초월적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해석이 맞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 세계를 꼭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해야 할까.

먼저 불완전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 죽음을 맞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불완전한 것이고, 이 세계에는 결함이 있는 것일까요? 반면 의료 기술이 점점 발전해서 인간이 더이상 늙지 않고 아무도 죽지 않는 그런 세상은 완전한 곳일까요?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한계와 같은 상황입니다. 한계가 있으면 불완전한 것일까요? 가령 고속도로에서 속도 제한이 없으면 더 좋을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한계가 있는 것이 더 완전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것은 적절한 한계까지도 갖춘 것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이 없는 인생도 불완전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을 더 천천히 살 수 있고, 그 아름다움도 즐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야스퍼스가 말하는 “초월적 사랑”도 불완전하기에 완전한 것 같습니다. “초월적 사랑”은 metaphysische Liebe에 대한 번역입니다. 글자 그대로는 “초자연적 사랑” 혹은 “형이상학적 사랑”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번역을 하면 도무지 사랑처럼 들리지 않아서 조금 과감한 번역을 시도했습니다. 초월적 사랑은 영원의 하늘로부터 시간의 땅으로 벼락처럼 떨어지고, 그 벼락에 맞은 두 사람은 마치 서로를 오래된 연인 혹은 이미 영원히 사랑한 사이처럼 느낀다고 합니다. 천생연분天生緣分도 초월적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초월적 사랑은 청년 시절에 이미 상대방의 아름다운 육체를 보고 완성되고, 그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단을 통해 부부 사이에서 영원해진다고 합니다. 당연히 청년 시절의 싱그러운 아름다움은 점점 사라집니다. 하지만 평생 함께 살면서 아로새겨진 노년의 아름다움에는 한갓 기억 속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보다 더 고운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 곱디고운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노화라는 소위 불완전한 현상이 상대방을 더 완전하게 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야스퍼스가 인용한 키르케고르의 말을 저도 인용해 보겠습니다. “여인은 나이가 들면서 더 아름다워집니다. 하지만 그 여인을 사랑하는 사람만 그 아름다움을 봅니다.”(213쪽) 첫 번째 문장의 주어가 꼭 여인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함께 늙어 가는 남편의 아름다움 역시 사랑하는 부인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의 의의는 무엇인가.

지금은 텔레비전 혹은 인터넷에서 많은 철학 강의를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야스퍼스의 생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철학 교육을 위해서 텔레비전을 활용한 최초의 독일어권 철학자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이 책은 그가 독일 공영방송의 텔레비전 대학에서 행한 강의의 원고를 묶어 출판한 것입니다. 그의 강의는 매주30분씩 1964년 10월부터 12월까지 13주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책의 머리말을 읽어 보면 야스퍼스가 기쁜 마음으로 시청자들과 소통하려 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방송이라니, 얼마나 멋진 모험입니까! 강연자에겐 얼마나 근사한 일입니까! 저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철학이란 사람다운 사람을 위해, 모든 개인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11쪽) 1965년부터 야스퍼스는 건강이 악화하여 휠체어 신세를 졌고, 1968년에는 기억력 감퇴, 발작, 실어증을 겪었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따라서 『철학적 생각을 배우는 작은 수업』은 그가 최후로 집필하여 출간한 철학책이 되었습니다. 야스퍼스가 어떻게 강의를 진행했는지 궁금한 독자 여러분은 유튜브에서 “Karl Jaspers, Kleine Schule des philosophischen Denkens”를 검색하면“아홉 번째 강의, 공개성Öffentlichkeit”이라는 영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상의 전체 길이는 28분 33초인데, 아쉽게도 강의의 끝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철학적 생각을 배우는 작은 수업』은 머리말, 제1부, 제2부, 3부,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2부 정치에 관해서”를 읽어 보면 1960년대 독일의 정치적 상황이 현재 한반도의 상황과 여러 측면에서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당시 독일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도 유사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꾸준히 정치 문화를 성숙시킨 독일은 통일국가를 이루었고 현재는 유럽연합을 이끄는 지도국의 위치에 있습니다. 이 책은 총 13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섯 번째 장부터 아홉 번째 장까지가 정치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야스퍼스는 1945년부터, 즉 독일의 제3 제국이 몰락한 이후 정치에 관한 저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연합군의 도움으로 새로운 국가를 세우게 된 독일을 위해 그는 저술가로서 자국민의 심정을 대변해야겠다는 확고한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야스퍼스는 미래지향적인 정치의 참된 토대를 마련하고자 정치적 현안보다는 오히려 윤리적 핵심 문제에 대해 성찰하였습니다. 그 성찰의 산물이 집약되어 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그 부분을 읽어 보면 독일에 대한 야스퍼스의 진심 어린 애정과 걱정을 듬뿍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텔레비전 대학의 강의를 준비할 당시 아마도 야스퍼스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음을 예감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 철학의 정수를 13번의 강의에 모두 담으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책은 철학이 다룰 수 있는 모든 주제, 자연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 예술 및 철학 등등을 포함하고 있기에 읽기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야스퍼스는 단순히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려고 하지 않고 시청자와 독자가 스스로 생각하도록 하는 강의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의도가 드러나도록 이 책의 제목에 약간의 의역이 가해졌습니다. 원래 독일어 제목에는 배움을 뜻하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으나 한국의 “주입식 수업”과 구분하기 위해서 “배우는 수업”이라고 옮겼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배우는 일은 누군가가 미리 정리해 놓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분명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황혼이 깃든 대철학자의 생생한 목소리와 함께 철학에 입문하고 싶은 독자는 이 책을 통해서 많은 것을 느끼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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