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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패러다임, 역사관, 서사 구조
디자인 패러다임, 역사관, 서사 구조
  • 최범
  • 승인 2021.10.21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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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파노라마 ⑬
원형-진보-순환사관이 공존하는 디자인 역사
한국 디자인은 아직 원형사관적 패러다임에
네덜란드의 디자인 그룹 ‘드로흐 디자인’의 통나무 벤치. 생태와 순환 등 포스트모던 디자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가장 강렬하게 보여준다. 사진=드로흐(Droog)

역사 속의 디자인 패러다임들은 각기 고유한 역사관과 서사 구조를 가진다. 장식미술은 원형사관(history of archetype), 모던 디자인은 진보사관(progressive history), 포스트모던 디자인은 순환사관(circular history)과 연결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관들은 일정한 서사 구조를 통해서 디자인에 대한 당대의 인식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디자인 패러다임의 역사는 곧 디자인 사유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주요 디자인 패러다임의 역사관과 서사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장식미술과 원형사관

장식미술은 장식을 주된 조형 문법으로 사용하는 디자인 패러다임이다. 장식이란 대체로 전통사회에서 종족이나 신분의 표지로 작용하는데, 문양을 기본 요소로 삼으며 그런 점에서 다분히 원형적인 성격을 지닌다. 심리학자 칼 융에 따르면 원형(archetype)이란 집단 무의식을 구성하는 보편적 상징이다. 그런 점에서 원형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면, 장식은 변화를 기본 속성으로 하는 역사의 본질에 어긋난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 장식은 변화한다. 장식미술의 역사는 장식이 역사적으로 변화해왔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장식과 장식미술 역시 인간 역사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장식은 상징을 통해 사회적 질서를 고정하는 기능을 하므로 동적(動的)이기보다는 정적(靜的)이다. 그래서 장식미술은 전통 신분 사회를 대표하는 조형이 되는 것이다. 20세기의 모던 디자인이 장식을 부정하는 것은 근대 시민사회가 전통사회의 앙시엥 레짐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의의를 지닌다. 물론 현대사회라고 해서 장식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장식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살아 있다. 하지만 그 기능은 이전과 같지 않다.

 

모던 디자인과 진보사관

장식미술이 원형사관의 시각화라면 모던 디자인은 진보사관과 선형사관(linear history)의 시각화이다. 모던 디자인은 역사가 진보한다는 믿음에 기반하여 디자인이 그러한 진보의 조형적 기능을 담당할 것을 약속한다. 모던 디자인은 디자인의 창조에 대한 기원(origin) 서사, 엘리트 디자이너라는 영웅(hero) 서사, 조형적 합리주의를 통해서 완벽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이상향(utopia) 서사, 그리고 합리적인 디자인에 의해 타락한 예술을 구원할 수 있다는 구원(salvation) 서사 등을 갖추고 있는데, 20세기의 합리주의 디자인이 그 역사관이나 서사 구조에서 기독교와 완전히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둘이 디자인과 종교라는 문화적 형식의 차이를 떠나서 역사의 일직선적인 진보 이념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그러한 진보에 대한 믿음은 회의에 부쳐지게 되고 진보사관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역사관과 그에 기반을 둔 디자인 패러다임이 등장하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그것이다.

 

포스트모던 디자인과 순환사관

모던 디자인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포스트모던 디자인은 ‘성찰적 디자인(reflexive design)’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역시 ‘성찰적 근대성(reflexive modernity)’의 일환을 이룸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포스트모던 디자인은 모던 디자인이 부정했던 장식을 다시 도입하는 등, 그 역사관에서 순환사관적 특성을 보인다. 영국의 문화 평론가인 피터 퓰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보존적(conservationist)이고 복구적(recuperative)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디자인은 순환(circulation), 회복(restoration), 재생(regeneration)을 강조한다. 네덜란드의 디자인 그룹 드로흐 디자인(Droog Design)의 <통나무 벤치>는 포스트모던 디자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아무튼 포스트모던 디자인의 등장으로 인해 디자인 역사는 다시 커다란 순환의 원을 그리는 듯하다.

 

한국 디자인의 패러다임
장식미술, 모던 디자인, 포스트모던 디자인으로 이어지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일단 서구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한국에는 이 세 가지 패러다임이 공존한다. 이는 물론 서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디자인의 역사적 패러다임들은 단순히 통시적으로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공시적으로 중첩되어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디자인 역사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과학 혁명을 통해서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 되면 기존의 정상과학이 통째로 부정되는 과학 역사와는 다르다. 그러니까 한 시대를 대표하는 디자인 패러다임은 다른 패러다임들과 공존하되, 다만 그것이 상대적으로 지배적일 뿐이다.  

동시대에 여러 패러다임이 공존한다는 점에서는 한국 디자인 역시 서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한국 디자인이 서구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전통사회의 장식미술이 제대로 극복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 디자인에도 모던과 포스트모던 패러다임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은 한국 사회와 문화에 뿌리내리고 있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 덮여 있을 뿐이며 정작 그 밑바탕에는 전통적인 장식미술 패러다임이 여전히 강고한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 디자인의 패러다임은 여전히 원형사관적 사고방식에 묶여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최범 디자인 평론가 
디자인을 통해 사회를 읽어내는데 관심이 있으며, 특히 한국 디자인을 한국 근대의 풍경이라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평론집 <한국 디자인 뒤집어 보기> 외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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