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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정진규의 시와 시론 연구』(정효구 지음, 푸른사상 刊, 388쪽, 2005)
서평: 『정진규의 시와 시론 연구』(정효구 지음, 푸른사상 刊, 388쪽, 2005)
  • 이숭원 서울여대
  • 승인 2005.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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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 한술에 '융통무애'가 가능한가

全作 시인론에 담긴 신념

정효구의 ‘정진규의 시와 시론 연구’는 자못 경이로운 책이다. 문단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시인에 대한 본격적인 시인론이 시도된 적이 거의 없는 평단에 현역 시인의 시세계를 집중 조명한 책을 내는 것은 용기에 속하는 일이다. 아주 솔직하게 얘기하면, 정진 규와 비슷한 시작 경력과 문단적 위상을 지닌 동년배의 시인들은 이러한 저서 출간에 대해 격려와 축하의 메시지를 보낸다기보다는, 일부는 선망의 표정을, 대다수는 의혹과 질시의 눈길을 보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집중적으로 논문을 발표하여 한 권의 책을 엮게 된 데는 저자의 확고한 신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정진규 시인은 1960년 약관 21세의 나이로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고 20대 중반부터 ‘현대시’ 동인으로 참가하여 활발한 문단 활동을 벌였다. 45년의 시력 기간 동안 12권의 시집을 간행하였으나 그의 시세계를 집중 조명한 본격 평론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런 마당에 그의 시세계와 시론을 집중 조명한 단독 전작 연구서가 나왔다는 것은 분명 놀라움을 살만한 일이다.

그러면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이러한 기획을 묵묵히 실천한 저자의 신념은 무엇인가? 서문에 의하면, 自生, 自發, 自律, 自由, 自遊, 自然의 삶에 대한 소망을 지닌 저자에게 정진규의 시는 충만감과 행복감과 생동감을 안겨 주었으며, 자신의 소외를 치유해 주는 효과까지 얻게해 주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저자는 정진규의 시가 “화려한 율동의 시인들에 비해 크게 조명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테마나 진실성 그리고 형상화의 수준에 있어서 시사적으로나, 시대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상당히 중요한 의미와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정진규 시세계의 키워드에 해당하는 시어들을 구체적인 작품 속에서 적절히 추출하여 내포적 의미를 규정하고 그것이 시의 문맥 속에 어떻게 활용되고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가를 세밀하게 분석한 정 교수의 작업은 전작 시인론의 모범적 사례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특히 정진규 시의 에로스 지향성이 지닌 생명적 의미를 밝힌 부분이라든가, 섭식과 생식, 감각, 살과 뼈로 이어지는 몸의 수사학과 그 수사학이 치유의 생태학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밝힌 부분은 정 교수의 치밀하고 독창적인 분석력이 눈부시게 점화된 대목들이다.

이러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보완되어야 할 몇 가지 사안들을 껴안고 있다. 정진규의 시 연구라는 표제를 달았으나 제6시집 ‘연필로 쓰기’ 이전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는 점, 정진규 시의 테마나 진실성에 대해서는 깊은 분석을 보여주었지만 형상화의 수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으며, 시사적·미학적 의의에 대해서도 충분한 분석을 보여주지 못한 점 등은 차후에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또 ‘전일성’의 명확한 개념이 무엇인지, 자연과 ‘자연성’은 어떻게 구분되는 것인지, ‘몸적 세계’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이들에 대한 보완적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개념의 불투명성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들이 있다.

책의 첫 페이지에서 세포의 분열이 전일성을 해체하거나 불안하게 하는 속성을 지니며, 세포는 전일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 이면에 분열을 치유하거나 분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숨어 있다고 설명하였는데, 이것은 생명체의 실상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이다. 모든 생명체는 목숨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끝없이 세포 분열을 하며, 분열이 멈추거나 분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생명의 종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이상태인 전일성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도달하기 어려운 전일성의 세계에 정진규 시인은 어떻게 그리 쉽게 진입하여 ‘虛’의 진면목을 보고 ‘절대자유’를 느끼고 ‘완전한 융통무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萬魚寺?라는 시는 처음에는 법당 앞의 검은 돌들만 보았는데 “공양 한술 얻어먹고 나와보니” 물고기의 바다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시에 대해 저자는 “전일성의 세계를 물고기가 되어 유영하는 시인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묘사되어 있다”고 설명했으나 과연 전일성의 세계라는 것이 공양 한술 얻어먹고 나오면 도달될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요컨대 저자가 느낀 정진규 시의 황홀한 감동이 만인의 공감으로 확대되기 위해서는 통과해야 할 몇 개의 매개적 사항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고, 그러한 매개의 고리들을 순차적으로 풀어갈 때 저자의 주장이 더욱 확실한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숭원 / 서울여대,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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