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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62] 콩방디트, 국가안에서 더 큰 사회적 자율성을 추구하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62] 콩방디트, 국가안에서 더 큰 사회적 자율성을 추구하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10.2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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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콩방디트
콩방디트(2012)=위키미디어
콩방디트(2012)=위키미디어

장 프레포지에는 <아나키즘의 역사> 제4부 ‘아나키즘 주변’의 ‘야생적 좌파’라는 글에서 앞에서 언급한 상황주의, 프랑스 1968혁명 그리고 프로보스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세 가지와 아나키즘의 관련성, 상호의 유사성과 상이점에 대해 면밀히 분석하지 않아 20세기 후반에 발생한 가장 아나키즘적인 현상에 대한 이해는 놓치고 있다. 

1960년대의 가장 큰 유럽 혁명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학생 반란이었다. 이 혁명은 공장 점령을 촉발시켜 역사상 가장 큰 총파업을 초래했다. 그전까지 서구에서는 고전적인 혁명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 2012)이 말한 것처럼 1968 프랑스 혁명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이 발생한 직후 드골 대통령은 독일에 있는 프랑스군을 국경으로 가도록 명령하고 군대를 파리로 이동시켰다. 

프랑스에서의 68혁명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리옹대학(1968)=위키미디어
리옹대학(1968)=위키미디어

혁명은 한 순간의 해프닝으로 끝났기에 과연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공장을 점령하는 동안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일하지 않았고 파업위원회를 자주관리기관으로 바꾸는 데에도 실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혁주의적인 일반노동연맹(Confederation Generale du Travail)이 10% 임금 인상안을 받아들이고, 드골의 새로운 선거 제안에 의해 파업은 끝나고 학생들은 휴가나 ‘행복한 나의 집’으로 떠났다.

심지어 독일 시인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그(Hans Magnus Enzensberger, 1929~)는 그것이 “세계은행의 부장들과 동독 슈타지 당원들을 위한 일”이라고 비판했을 정도로 부정적인 이미지도 없지 않았다. 나아가 미국의 CIA가 베트남전쟁에 반대한 프랑스를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벌인 일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1871년 파리코뮌 이후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봉기였고 파리코뮌과 마찬가지로 명백히 아나키즘적 성격의 혁명이었다. 프랑스 아나키스트 역사가 장 메트론(Jean Maitron, 1910~1987)은 그것이 명백한 아나키즘 혁명이라고 했다. 당시 아나키즘에 관한 베스트셀러를 쓴 다니엘 게랭(Daniel Guerin, 1904~1988)은 그것이 '뿌리 깊은 아나키즘적 영감'에 의한 '모든 권위의 거부'라고 썼다.

그는 특히 대학과 공장에서 메아리친 자주관리의 요구를 아나키즘적이라 강조했다. 영국의 톰 네인(Tom Nairn, 1932~)은 봉기에 대한 분석에서 “1871년의 아나키즘은 자본주의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여 실패했다. 반면 1968년의 아나키즘은 우리가 거의 손에 넣을 수 있는 미래 사회를 바라보았기에 성공할 것 같았다.”고 했다.

현대사회, 소비사회, 기술사회에 대한 어떤 반란

68혁명의 문구(사실적이어라,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위키미디어
68혁명의 문구. "사실적이어라,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위키미디어

이처럼 1968년 혁명은 아나키즘의 거대한 부활을 예상하게 했지만 조직적인 사회 운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마치 갑작스런 아나키즘 해일이 국가를 휩쓸겠다고 위협했지만, 그것이 올 때와 같이 너무나 빨리 가라앉은 꼴이었다. 운동의 슬로건은 의심할 여지없이 아나키즘 전통에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았다. “상상력에게 권력을,” “신도 없고 주인도 없다.” “더 많이 소비할수록 수명이 줄어든다.” “금지를 금지하라,” “현실적이 되라.”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등등.

주로 경제적 부족을 극복하는 데 관심을 두었던 과거 혁명과 달리 풍요로운 사회에서 프랑스 68혁명가들은 일상생활의 변화에 몰두했다. 그들은 자아해방을 사회적 해방의 기초로 보았다. 반란은 학생들에 의해 시작되어 대중 운동으로 발전하여 전통적인 계급 분열을 가로 막았고, 국가에 대한 저항에서 곧바로 국가에 대한 직접적이고 영구적인 논쟁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 소동은 1966년에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정부가 후원하는 학생회를 파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 생겨났다. 

튀니지 출신의 프랑스 상황주의자인 무스타파 캬야티(Mustapha Khayati)는 소비자 사회라는 스펙타클의 희생자인 노동자와 학생 간의 혁명적인 동맹을 촉구하는 책 <학생의 빈곤>(De la misere en milieu etudiant consideree sous ses aspects economique, politique, psychologique, sexuel et notamment intellectuel et de quelques moyens pour y remedier)을 발행했다. 그러나 학생 운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문서는 1968년 6월 13일부터 14일까지 점령된 소르본대학의 공개 집회에서 발행된 호소문이었다.

학생은 '소비 사회의 룸펜프롤레타리아(lumpenproletariat) 노동자이기 때문에 '학생 문제라는 것은 없다'고 했다. 그 투쟁의 세계적 차원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연대가 제3세계의 룸펜프롤레타리아에 대항한다'라는 명제로 인정되었다. 무엇보다 '모든 형태의 폭력과 억압을 그 존재의 토대와 생존의 수단으로 배제할 수 있는 힘'이라는 목적의 수단을 강조했다. 

학생들은 개인의 자유, 욕망의 순수함, 창의력의 기쁨, 놀이, 행복을 재확인했다. “나는 내 욕망의 현실을 믿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내 욕망을 받아들인다.” “자유는 우리의 욕망에 대한 의식이다.” 당시 프랑스의 아나키스트들은 <사회주의냐 야만이야>(Socialisme ou Barbarie)와 <흑과 적>(Noir et Rouge)과 같은 잡지를 중심으로 소그룹을 구성했다. 독단주의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아나키스트 연맹을 떠나 현대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당시 프랑스에서는 조직된 아나키즘 운동이 없었다.

그러나 개별 아나키스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3월 22일 운동과 국제 상황주의자라고 불리는 반권위주의 그룹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조직에 속하지 않은 익명의 분노한 군중은 그들의 기원을 분명히 알지 못한 채 아나키스트 정서를 표명했다. 

반란의 요람인 낭테르대학에서 형성된 3월 22일 운동의 아나키즘적 추진력은 자발성, 즉흥 연주 및 자기표현의 축하로 이루어졌다. 참가자들은 어디에서나 영구적인 축제에 참여하고 있다고 느꼈다. 집회에서 그들은 '집회의 감각'에 의해 결정을 내리고 권력 장악이 아니라 권력 해체를 추구했다. 그들은 두 초강대국이 모두 같은 국가자본주의의 변종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기존 사회의 모든 형태의 억압에 도전했다.

그들의 전술, 슬로건 및 선전은 이 같은 도전 와중에 발명되었다. 그들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투쟁에서 그들의 행동이 '모범'이라고 보았다. 드골이 올바르게 관찰한 바와 같이, 그들은 '동쪽 공산주의자든 서쪽 자본주의자든 간에, 현대사회, 소비사회, 기술사회에 대한 반란'이었다.

지도자 없는 운동의 한 대변인

콩방디트(1968)=위키미디어
콩방디트(1968)=위키미디어

운동에는 지도자가 없었지만 언론은 다니엘 콩방디트(Daniel Cohn-Bendit, 1945~)를 대변인으로 보았다. 그는 당시 23세의 낭테르대학 사회학과 학생이었다. 운동의 전형인 그는 자신을 아나키스트이자 '리버테리언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쿠닌이지만, 그는 트로츠키와 마오 그리고 마르쿠제로부터도 지적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다. 그의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와 국가에 대한 반대, 소비에트 공산주의에 대한 비난, 노동자의 자주관리에 대한 옹호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학생봉기 직후 그의 형제인 가브리엘(Gabriel)과 함께 <좌익급진주의 : 좌익의 대안>(Le Gauchisme, remede a la maladie senile du , 1968)을 내어 3월 22일 운동의 아나키즘적 의미를 끌어냈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은 레닌주의자와 스탈린주의자 모두 볼셰비즘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이었으며, 특히 러시아혁명 기간과 그 후의 아나키스트에 대한 억압에 초점을 맞추었다. 동시에 그것은 학생들이 혁명적 활동을 하며 조직력의 필요성을 어떻게 인식하게 됐는지에 대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실제 그들은 혁명적 지도력의 필요성과 당의 필요성에 도전했다. 왜냐하면 후자는 필연적으로 인민의 자유를 '당에 동의할 자유'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이들의 도전은 학생들이 지역 활동위원회에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개발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노동조합의 화석화 된 구조를 우회하기 위해 등장한 방대한 노동자위원회 체인을 환영했다.

그들 권고의 아나키즘적 성격은 미래의 운동은 '혁명 주류 내부의 정치 흐름의 다원성과 다양성'을 존중·보장하고 어떤 종류의 계층 구조 형성에도 반대하며 모든 공장과 기업이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혁명은 '당신이 스스로 혁명을 만든다‘(C'est pour toi que tufais la revolution')와 같은 추상적인 이상이나 정당을 대신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콩방디트는 그 후 독일에서 녹색당의 활동에 뛰어들었지만 리버테리안적인 젊음을 완전히 앓지 않고 계속해서 국가의 범위 내에서 더 큰 사회적 자율성을 추구하고 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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