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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키’가 된 신익희, ‘윤산온’이 된 맥퀸
‘시니키’가 된 신익희, ‘윤산온’이 된 맥퀸
  • 김성희
  • 승인 2021.10.12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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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의 North Face ⑧

한국인의 영어 이름 표기는 제각각이다. 로마자 표기법이 있지만, 여권에 인쇄되는 자신의 영어 이름 정도는 누구나 직접 만들 수 있다. 이름의 영어 표기법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얼마 전 국가대표에서 은퇴한 배구선수 김연경의 영어표기는 Kim Yeon Koung이다. ‘경(Koung)’의 표기가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이것은 자신의 선택이기 때문에 그런 로마자 표기가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백여 년 전 미국에 처음 발을 내딛었던 한국인, 아니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은 자신의 이름을 Rhee Syngman이라고 표기했다. 몇 십 년 후 춘원 이광수는 Yi Kwang Soo라고 자신의 이름을 영어로 썼다. 하지만 미국에 정착한 그의 후손들은 Yi 대신 Lee라는 표기법을 선택했다. Rhee든 Yi든 아니면, 훗날 ‘이(李)’의 일반적인 표기법 중 하나가 되는 Lee든 영어 이름 표기는 그 시작부터 선택의 문제였다. 

그래서인지 해방기 정치지도자들의 영어 이름 표기법은 개성이 넘쳤다. 김구처럼 영어권에서 생활한 경험이 없는 이들의 이름은 Kim Koo나 Kim Ku로 매우 평범했지만, 영어권에서 공부했던 이들의 이름은 매우 창의적이었다. 가령 와이오밍대와 컬럼비아대에서 수학했던 조병옥은 자신의 이름을 Chough Pyong Ok이라고 썼다. Cho나 Jo가 아닌 Chough라고 자신의 성(姓)을 표기한 점이 흥미롭다. 언더우드의 후원으로 미국의 로노크대와 프린스턴대에서 각각 학사와 석사학위를 마친 김규식의 로마자 표기법도 특이했다. 그는 Kimm Kiu-sik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표기했다. 일반적으로 쓰는 Kim에 엠(m) 하나를 더 붙인 것이었다. 

신익희
신익희

그러나 신익희보다 창의적이고 그래서 충격적이기까지 한 로마자 표기는 없을 것이다. 신익희는 자신의 이름을 P.H. Sinicky라고 썼다. 자신의 이름 신익희와 폴란드계 성(姓)인 시니키(Sinicky)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해, 자신의 이름을 아예 성처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시기와 해방기 지식인의 자의식과 자부심이 Rhee, Chough, Kimm, 그리고 Sinicky와 같은 특이한 이름 표기로 드러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전주 이씨, 한양 조씨, 청풍 김씨, 평산 신씨, 모두 대단한 삼한갑족의 후예들이었지만, 신대륙에서 창성창본하는 기분으로 자신의 영어 성(姓)을 만들며, 그곳에 적응하려고 했다.

한국인이 미국이나 영어권 국가에 갔을 때, 자신의 이름을 로마자로 표기했듯, 미주나 유럽에서 온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한글이나 한자로 표기하려고 했다. 그들도 한국 땅에서 창성창본을 한 것이다. 1970~1980년대 한국의 대중가요를 영어로 번안·번역하여 해외에 소개하는 데 기여했던 레이먼드 설리번 신부는 반예문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었다. 한국식 이름을 가진 그는 절반은 한국인이었다. 임실 치즈의 아버지로 알려진 지정환 신부의 본명은 디디에 엇세르스테번스이었다. 발음하기 어려운 자신의 긴 이름을 한국식으로 고쳐 그는 지정환이라고 한국식 이름을 사용했고, 스스로 임실 지씨라고 했다. 

조지 섀넌 맥퀸
조지 섀넌 맥퀸

그런데 지난 세기 외국인들이 새롭게 창성창본을 할 때 본관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곳은 아마 평양일 것이다. 한국 기독교 문화의 중심이었던 평양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들은 한국식 이름을 사용하곤 했다. 대표적으로 평양 숭실전문에서 가르치다 후에 서울 연희전문의 초대 이과대 학장이 됐던 아서 베커(Arthur Lynn Becker)는 베커를 백(白)으로 아서를 아덕(雅德)으로 바꿔, 자신을 백아덕이라 칭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였던 조지 섀넌 맥퀸(George Shannon McCune)은 윤산온(尹山溫)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었다. 윤(尹)은 맥윤(McCune)에서 온 것이고, 산온은 그의 미들네임인 섀넌에서 온 것이었다. 그는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추방당하기 전인 1936년까지 숭실전문의 교장으로 활동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현재 영어권 국가들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로마자 표기법이 백아덕의 사위이자 윤산온의 아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평양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조지 매커피 맥퀸(George McAfee McCune)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숭실전문에서 가르치다 미국으로 돌아가 1937년 맥퀸-라이샤워 로마자표기법을 만들었다. 한때 부산이 푸산(Pusan)으로, 광주가 쾅주(Kwangju)로 표기됐던 것은 평양 출신 맥퀸이 만든 표기법의 영향이었다. 

언어가 바뀌면 이름도 바뀐다. 그리고 정체성도 새로운 세계와 교섭하며 변화한다. 

김성희 숭실대 한국기독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연세대 언더우드국제대학,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한국문학과 영어논문쓰기 등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문학이론, 북한문학, 동아시아 냉전 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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