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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함석헌 62: 하나님 발길에 채이다
내가 본 함석헌 62: 하나님 발길에 채이다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5.06.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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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묘소를 찾았다. 왼쪽부터 조요한 고 숭실대 총장, 김용준 교수, 노명식 교수, 최진삼 장로(함석헌 선생의 둘째사위). ©김용준 교수 제공 
<나는 빈들에 외치는 사나운 소리/살갗 찢는 아픈 소리/나와 어울려 부르는 너희 기도 품고 무한으로 갔다 내 다시 돌아오는 때면/그때는 이 나 소리도 없이/고요한 빛으로 오리라.>(전집 6:68)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감파리의 선생님의 산소에는 그 어떤 비석도, 묘역을 장식하는 그 어떤 장식물도 없다. 다만 묘앞에 돌단이 하나 높여 있는데 그 돌단은 보통 묘앞에 있는 제단이 아니라 말하자면 돌 책이라고 할까 그 돌단 위에는 책을 펼쳐놓은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고 그 돌 책에는 선생님의 ‘나는 빈들에 외치는 소리’라는 ‘수평선 넘어’라는 선생님의 유일한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위의 시 한 聯이 새겨져 있다.

<영원의 빛 다 내려다 그대들/눈동자에 쏟아넣고/사라지지 않는 향기 받아다/그대들 코에 불어넣어/그대들로 이 역사의 법괴를 메고/요단을 건너는/거룩한 제사가 되게 하기 위해서임을/죽는 순간에도 오히려 그것을/빌며 그 빛을/그 빛을 먹고 죽었음을/그 말없는 시체를 안는 찰나/그대들을 맡아 얻으리라>(전집 6:260)
선생님의 대표적 시라 할 수 있는 ‘大宣言’의 마지막 연이다.

나는 지금 선생님의 임종을 위에서 소개한 두 편의 선생님의 시를 읊음으로써 곡(哭)을 마치고자 한다. 내 서재에 걸려있는 선생님의 전신사진 앞에 매일 아침 설 때마다, 그리고 응접실에 걸려있는 선생님이 평생 즐겨 읊으시던 ‘古木千年枝二三, 天然??向東南 魂衣鳥雀長留巷 影作蛟龍半在潭 老去全身通似竹 春來一面活如藍 平生雨雪經 過盡猶 不回頭說苦甘’이라는 선생님 친필의 한시 액자를 대할 때마다 나는 전신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살갗 찢는 아픈 소리’를 들으며 ‘평생 雨雪에 몸은 지쳐 진하였어도 여전히 쓰다 달다 말하지 않는’ 선생님의 넋을 느끼곤 한다.

여기서 선생님의 장례식을 상세히 소개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하겠다. ‘씨?의 소리’ 1989년 3월호 통권 99호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다만 장례식에 숨어 있는 에피소드 몇 개만 적어 보겠다.

모든 장례식이 그렇지만 어떻게 영결식을 짧은 시간 안에 엄숙하게 끝마치느냐가 큰 과제다. 그래서 순서를 짜다가 문익환 목사에게 조사를 맡기면 틀림없이 긴 조사가 될 것이니 문 목사에게는 조시를 맡기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런데 막상 문 목사님의 조시는 30분이나 계속되는 장문의 조시였기 때문에 고소를 금치 못했던 일이 기억에 남아있다. 모두가 선생님 영정을 향해 서서 기도도 드리고 조사도 읽었는데 안병무 박사는 책 몇 권을 들고 단상에 올라가 조문객을 향해 서서 조사가 아닌 일종의 강연 형식으로 책장을 여기 저기 펼쳐가면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일반 영결식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색다른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국무총리실에서 조사를 꼭 하고 싶다는 전갈이 왔다. 당시의 국무총리인 강영훈 님의 요청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분위기가 현직 국무총리의 조사를 받아들이기에는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그래서 부득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직의 국무총리가 일반 조문객과 같이 앉아서 장장 두 시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을 닦으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모습이 지금도 나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으니 전체편집회의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1989년 3월 11일 이화대학 후문 앞에 있는 한식식당 석란에서 모였다. 자연히 선생님이 돌아가셨으니 함 선생님의 개인 잡지인 ‘씨?의 소리’지를 계속 발행할 것이냐 아니면 중단할 것이냐를 놓고 논의한 결과 만장일치로 ‘씨?의 소리’지는 계속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발행인 선정문제에 들어가 토론한 결과 자연스럽게 장기려 박사님을 모시기로 의견이 모아졌고 편집인에는 김용준으로 가결을 내렸다. 그리고 ‘씨?의 소리’지에 관한 모든 문제는 안병무, 김동길 그리고 김용준 삼인에게 일임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함 선생님의 생신모임 이후에 이상 세 사람은 안암동에 위치하고 있었던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모였고 박선균 목사가 배석하였다. 세 사람이 숙의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장기려 박사님을 발행인으로 모시기를 적극 추진하되 장 박사님이 끝내 고사하실 경우에는 김용준이가 발행인을 맡기로 합의를 보았다. 3월 15일에 박선균 목사가 부산에 내려가서 이와 같은 사연을 장 박사님께 말씀드렸더니 장 박사님은 당신의 건강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발행인 취임을 간곡하게 사양하셨다. 그래서 도리없이 내가 1989년 5월 1일부로 ‘씨?의소리’지 제2대 발행인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내 평생에 함석헌이라는 한 인격을 만났다는 사실은 나의 평생을 통해서 나의 출생 다음으로 나에게는 큰 사건이었고 이미 몇번씩 이야기한 사실이지만 나에게 그 어떤 인격이 있다면 그것은 함석헌이라는 존재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전공분야라고 말할 수 있는 유기화학을 빼고는 모든 것을 함 선생님에게서 배웠다고 몇번씩이나 공언한 바 있었다. 그런 나에게 선생님이 창간하신 ‘씨?의 소리’지 발행인의 자리를 계승한다는 일은 너무나도 벅찬 감격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밝힌 바와 같이 함석헌이라는 거목이 이루어 놓은 ‘씨?의 소리’지를 이어나갈 재목은 결코 아니었음을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결정은 나고야 말았다. 일단 맡고보니 앞이 캄캄했다. 선생님 말씀대로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맡았다고 밖에는 당시의 심정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감상에만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미 4월 18일에 발족한 ‘함석헌선생 기념사업회’를 활성화시키는 일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에는 ‘씨?의 소리 후원회’였던 것을 ‘함석헌선생 기념사업회’로 그 명칭을 바꿨고 ‘씨?의 소리 후원회’ 회장이셨던 장기려 박사님이 회장직을 계승하셨고 기념사업회 운영위원 선정을 위한 전형위원 9명이 이미 선출된 상태였다. 전형위원은 김용준, 김동길, 계훈제, 안이현, 정재현, 이문영, 노명식, 이윤구, 안병무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편집소위원장인 내가 기념사업회 일도 맡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내가 이제는 발행인이 되었으니 기념사업회 일까지 맡는다는 일이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당시의 자세한 경위를 정확하게 여기서는 기록할 수는 없지만 어떻든 ‘함석헌선생 기념사업회’의 운영위원장직을 김동길 박사에게 맡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해서 일정한 절차를 밟아 김동길 박사가 기념사업회의 실질적 책임을 맡는 운영위원장직에 취임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우선 한숨을 돌릴 수 있었고 기념사업회의 후원하에 ‘씨?의 소리’지는 도움을 입을 수 있겠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일은 묘하게 꼬여 나갔다. ‘함석헌선생 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직에 취임한 김동길 박사의 제일성이 의외였다. 지금까지 ‘씨?의 소리’지를 후원하기 위하여 들어온 모든 후원금은 일단 기념사업회에 입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장기려 박사님이 주신 1천5백만원도 일단 기념사업회의 입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기념사업회의 주된 일이란 ‘씨?의 소리’지의 발행을 후원하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이미 없어져도 옛날에 없어진 옛날에 들어온 후원금까지 일단 입금시켜야 한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선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몇푼이 아쉬운 판에 어디서 돈을 구해서 기념사업회에 입금시킨단 말인가.

이렇게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데 부산의 장기려 박사님이 상경하신다는 소식과 더불어 나와 김동길 박사와 같이 조찬을 하시겠다는 전갈이 왔다. 그래서 롯데호텔에서 장 박사님을 모시고 셋이서 아침식사를 하게 되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11월 24일로 추정된다. 그 자리에서 장 박사님은 내가 후원금으로 낸 돈은 ‘씨?의 소리’지 발간을 위해 사용하라고 내놓은 것이라는 말씀을 분명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닌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지 알 수 없으나 일부러 상경하시어 김동길 박사와 나와 아침식사를 자청하시면서 당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주시는 바람에 그때까지 답답했던 나의 마음은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글쎄 지금까지도 그 때의 해프닝은 수수께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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