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선학 미술평론가 © |
특히 그의 글 속에 보이는 왕따, 고향 등지기. 은둔, 지방토호, 정치인과 닮은 지역작가, 정보은폐. 짝퉁, 신파조 뽕작, 상업화된 작가들의 권력형성 등의 표현은 분석적이기보다 방담이며, 시니컬하기보다는 감정적이다. 이런 태도는 그가 바라보는 다급한 현실인식에도 불구하고 반론조차 오히려 거북하게 한다. 더구나 구체적 사례로 든 예증들은 지역에 따라 다른 반응이 있겠지만 부산의 경우 그 사례가 너무 단편적이고 협량한 이해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작품 판매나 유통에 끼이지 못하는 대신 주목받고 싶다는 마음이 깔려 있는 까닭에 부산 작가들의 그림은 흔히 광폭하고 생경하고 거친 화폭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고 한다. 지역 작가에 대한 지독한 폄하의식이 아니라면, 그 말을 지독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에게도 대놓고 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또한 “부산의 젊은 작가들은 형상미술로 내몰리고 있거나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이라는 것도 내몰리거나 정체돼있다는 상충하는 내용을 등가로 지적하고 있어 신뢰하기 힘들다. 게다가 형상미술을 부산미술의 정체성으로 삼으려 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적절치 못하다.
그의 지적대로 1990년대 후반 이후 형상미술이라고 부를 만한 작가들의 결속력이 약화되고 개별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정체돼있다는 판단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형상미술이 가졌던 관심이 오늘의 작가들에게는 더 이상 관심거리가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가 판단하기로는 손에 꼽히는 몇몇 작가마저 산적한 현실문제의 시급한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형상미술의 어법을 심화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관심 밖의 경향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 젊은 작가들이 형상미술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은 억측이거나 오판이다. 그리고 설혹 그의 주장대로 그런 경향을 선택했다 해도, 한 작가가 선택하는 작품세계를 팔리지 않으니까 대신 주목받자는 마음으로 광폭해진다는 분석에는 아연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형상미술 활동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한국화단의 구도에 새로운 대안으로 기능하지 못했다. 오히려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군이 지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장을 희석화 혹은 협소화시킴으로써 지역 미술에서 이들의 논의가 활성화되는 것을 가로 막았다는 지적도 있다”라고 한다. 하지만 형상미술이야말로 양 진영으로 나눠진 담론이 새롭게 나아갈 방향을 보여줬지만 자기 진영의 정치적 이념에 열중한 서울 평론가들이 눈여겨보지 못했거나 애써 피하려 한 것은 아닌가 묻고 싶다. 형상미술은 정치가 아닌 일상에 눈을 돌렸고,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 구조가 삶을 어떻게 억압하는지에 대해 다양하게 말해왔다. 그것은 한 가지 장르적 성격을 갖거나 하나의 이념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양한 발언과 체험들을 집단의식 없이 산발적이고 개별적으로 구축해갔다. 도리어 그런 특징은 후기 모더니즘에 자연스럽게 융화돼갔다. 작가들의 세계인식의 유약함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부산 미술에서 주목을 끄는 작가들에게는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형상성을 추구한다는 특징이 보인다. 김종식의 1947년 ‘귀환동포’ 이후 면면히 이어져 오는 형상성과 다양성을 정체성으로 삼으려는 노력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다른 활동보다 널리 알려졌고 돋보였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형상미술은 권력이기보다 한 가지 이념에 대한 다양한 해체에 가깝다. 그리고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들이 활동할 수 없었다는 것도 서울과 대비되는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하나의 중심 이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념의 강제에 저항한 형상미술의 중요한 특징을 이해하지 못한 판단이다.
나는 박영택의 지나친 표현이 우리 미술계의 보편적인 현상을 마치 지역만이 가진 특징판단의 근거로 드는 비논리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국전에 나타났던 권력구조와 다툼을 좀더 천박하게 도식화해서 지역미술에 적용한 것이다. 그런 변별력 없는 지적들이 오히려 논리적 무리와 억측을 낳았다. 비평과 언론, 대학과 각종 공모전, 상업적 성공과 작품의 진정성 문제는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미술계 전체의 문제이다. 그것을 마치 지역미술의 문제인양 하는 지적은 근거 없거나 서울 비평가의 전도된 욕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정 사례가 상징적으로 함축하는 함의의 내용들이 없지 않지만 논리적 무리를 간과하면서 그렇게 지역미술을 묶는 것은 전체주의와 서울 중심주의에 물들어 지역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전형적 한계가 아닌가 한다.
그의 분석은 여전히 서울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는, 서울중심주의 사고를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차제에 서울중심미술계의 욕망을 분석하는 것이 오히려 지역미술과 권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강선학 / 부산시립미술관 미술평론가
협소한 공간에서의 장황한 공방은 솔직히 별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차후에 기회가 되면 그 때 툭 까놓고 함 하죠. 참고로 박영택 선생을 돕고 뭐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개념자체가 머릿속에 있도 않았습니다. 제 견해였으니 오해마세요. 더불어 강선학씨를 불쾌하게 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혹시 기분 나쁘셨다면 이해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