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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_비평, 혹은 위기론
문화비평_비평, 혹은 위기론
  • 김영민 한일장신대
  • 승인 2005.06.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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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치마를 입어본 것은 스무살 무렵이었다. 치마를 걸치는 순간은 몹시 불안정하고 돌연한 허전함의 느낌이 전부였지만, 곧 그것은 어떤 논리적인 문제로 직감되었다. 치마는, 특히 치마가 지닌 그 텅비고 열린 개방성은, 옷이라는 관심과 관행의 풍경을 지배하던 남성적 이치가 고스란히 허물어지는 체험의 공간이었다. 이른바 그것은 위기의(critical) 공간이면서, 스무살의 한국 남자가 습관적으로 조회하고 귀속하는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비평적(critical) 공간이기도 했다.


역시 스무살 무렵의 여름, 어느 섬에서 교회의 대학부 봉사활동을 벌이는 중에 이른바 '노방전도'에 나서게 되었다. 나는 조장으로 동료 두명과 팀을 이뤄 어촌 마을을 잠시 배회하다가 마침 노인 한 분이 대청에 나와앉아 있는 집에 찾아들었다. 여든은 족히 넘어보였고, 곰방대를 물고 있는 품이 마치 세속을 달관한 듯했다. 인사를 건넨 뒤, 두서없이 '예수교'의 '진리'를 끄집어내려는 차, 그 노인은 나지막하지만 묵직한 음성으로 담박 나를 제지했다. 요컨대, 먼저 수수께기 하나를 내겠으니 내가 맞히면 교회에 나오겠지만, 아니면 시끄럽게 굴지 말고 그냥 가라는 것이었다. '태초에 짐승이 한 마리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는 게 그 수수께끼였고, 나의 어색한 묵묵부답 앞에 노인은 '소(牛)!'라고 뜬금없지만 단호하게 외쳤다. 어느 종교의 진리를 설파하려는 스무살의 젊은! 이에게 던진 팔십 노인의 '소(牛)!'는, '소오오오!'라는 그 황당한 기표의 물질성은, 당시 내 내면의 풍경을 지배하던 종교적 관행과 이치, 그리고 그 사적 열정의 규칙이 고스란히 허물어지는 외상적 체험의 공간이었다. 물론 그것은 상상의 임계(critical) 공간이면서, 판박이처럼 복제되던 종교적 태도와 담론의 외부로 내던져지는 새로운 비평적(critical) 공간이기도 했다.


수년 전의 어느날 오후, 아파트 구내를 바삐 지나가던 내게 열살 남짓의 여아 셋이 바투 다가섰다. 그 중 한 애가 나를 올려다 보며 물었다. "아저씨, 미국사람이에요?" 나는 실소를 금치 못하며 한국사람이라고 다짐을 두자, 애들은 미리 내기라도 한 듯 서로 천원짜리 지폐를 주고 받는 것이었다. 나는 나를 보지 못하며, 자아의 그 상식적 암연 속에서 타자들은 자아의 일차원적 풍경 속으로 내재화된다. 자아라는 구심으로 동화하는 지식의 체계 역시 그 체계 속의 지식으로 복무하면서 그 한살이를 마감한다. 지식은 자아와 더불어 생기지만, 바로 그 자아와 더불어 지식은 타자를 지우는 절망의 이름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타자(Je est un autre)'라는 랭보식의 명제는 현대 인문학의 기본이 될만하고, 내가 '벌레'(카프카)나 미국인으로 둔갑하는 그 타자의 위기(critical) 체험 속에서 낡은 자아의 거울상(mirror-image)을 부수고 나오는 미래의 윤리, 그 비평적(critical) 공간의 묵시가 발설된다.


바디우(A. Badiou)의 말처럼, 타자는 필경 '좋은 타자'로 변질하면서 자아 속으로 회수된다. 마찬가지로, 스펙타클 사회의 현란한 문화적 다양성은, '거울사회(mirror-society)의 나르시시즘이 제 몸피를 불리면서 얻는 최후의 알리바이일 뿐이다. 타자가 드러나는 계기는 다양성이 아니다. 일찍이 TV의 황홀한 다양성을 '깡통'에 비겼던 시인 곽재구의 통찰처럼, 일률성과 私通하는 다양성이 오히려 우리의 일상이다. 그 다양성은 문화 시대의 마지막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으로, 타자들을 내치는 공교한 자기차이화의 뱃살일 따름이다.


다양성은 외부성이 아니며, 過食으로 배살이 터지지 않는다. 배는 그 뱃속의 다양성을 고스란히 안은 채 쳐질 뿐이다. 썩어도 그 배가 터지지 않는다는 사실 속에 진정한 위기의 실체가 있다. 무릇, 비평(critique)은 위기론(criticology)이다.
김영민 / 한일장신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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