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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미군이 철수한다면…공포 확산하는 작동 논리
한국에서 미군이 철수한다면…공포 확산하는 작동 논리
  • 최성희
  • 승인 2021.10.08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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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말하다_『존재권력』 브라이언 마수미 지음 | 최성희, 김지영 옮김 | 갈무리 | 400쪽

팩트 체크 없이 위협을 정치·군사적으로 활용
막연한 공포가 사실로 둔갑하고 점차적 확대

이 책은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독자층을 형성해왔던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가 자기가 해온 이론적 작업에 대하여 ‘존재권력’(Ontopower)이라는 개념을 부여한 중간결산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얼마 전에 20주년이 된 미국의 9·11 사건 이후 전개된 정치·외교적 상황에 대한 분석과 미국의 패권주의적 군사정책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시작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실질적인 정치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매우 이론적이기도 하고 매우 현실적이기도 하다. 마수미는 저자 서문에서 이를 두고 “이 책은 매우 사변적이기도 하고 매우 실용적이기도 하다”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의 이전 책들에 비해 훨씬 ‘실용적’인 면에 치중돼 있다. 예를 들어 2장에서 그는 푸코의 권력이론들에 대한 논설을 보론 형식으로 덧붙이고 있는데, 이는 이론적인 논의에 현실적인 면들이 치여서 밀려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로 비친다.    

정동이론에 관심을 가진 인문학 연구자인 나로서는 사실 이 책의 이론적인 면에 더 관심이 갔다. 정치와 외교는 포털사이트의 뉴스거리에서 자주 접하긴 하지만 은연중에 그것은 나의 연구 영역이 아니라고 선을 긋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마수미의 글들은 전쟁과 정치 및 외교가 기후와 날씨 또는 전염병과 다른 영역의 일이 아니며, 현대 사회에서 그것들은 같은 프로세스 상의 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런 주장은 미국의 대통령 선거, 부시의 이라크 공격, 아프가니스탄과 북한과 미국의 관계 등에서 그 연결성들을 조목조목 따져보는 것으로 설득력을 얻는다. 

 

한 스펙트럼에 존재하는 정치·기후·전염병

알카에다가 뉴욕의 중심가에서 고층빌딩을 폭파시킨 사건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부시의 이라크 공격과 아프카니스탄 공격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비판은 많이 있어왔다. 부시는 그들의 위협을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증폭시켜 자신의 재선에 이용하였다. 그런 군사적 공격들을 정당화하면서 부시가 사용하던 어법은 “(그들은) 할 수 있었다면, 했었을 것이다”는 이중가정법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팩트 체크’(fact check)가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아니, 그럴 생각도 아예 없었을 수 있다. 9·11로 인해 사람들이 겪었던 충격과 공포는 부시의 이런 말이 사실로 느껴지게 만드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이처럼 ‘느껴진 실재(felt reality)’가 사실(fact)로 둔갑한다. 즉, 마수미가 말하는 “정동 사실(affective fact)‘이다. 부시는 재집권을 위해 그런 원리를 잘 이용하였고 그의 목표는 권력이었지만, 그 뒤에서 작용한 것은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경제 세력이다.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 1956~ )는 캐나다의 철학자이자 사회 이론가이다. 마쓰미의 연구는 미술, 건축, 문화 연구, 정치 이론, 철학 분야에 걸쳐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마수미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에 대해 언급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책의 출간을 하루 앞두고 아프가니스탄을 탈레반이 접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현재로선 결과적으로 미군의 철수가 너무 성급한 것이었다는 평가가 대세를 이룬다. 무엇보다 민간인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는 점에 대해 비난받고 있다. 탈레반의 잔혹하고 구시대적인 행태들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면서 미군의 주둔은 오히려 필수적인 게 아니었나는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존재로까지 확장되어가고 있다. 이미 정동의 논리가 작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남한에서 미군을 철수한다면 한국도 아프가니스탄처럼 될 것이라는 말들이 떠돈다. 정말 그럴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아프가니스탄의 사례가, 탈레반이 남한과 북한의 관계양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탈레반에 대한 공포는 북한에 대한 공포의 확대에 이용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공포는 정동 사실이 되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 마수미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런 것이 선제의 작동논리이고 존재권력의 작동방식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북한이 아니라 북한을 위협의 대상으로 만드는 존재권력의 작동 논리이다. 
   

‘존재권력’이란 무엇인가?

마수미는 후기에서 ‘존재권력’이 푸코가 『생명권력의 탄생』(The Birth of Biopolitics)에서 대강 가설만 세우고 지나간 ‘환경적 권력’environmental power)‘을 발전시킨 것임을 밝히고 있다. 푸코의 권력양식 3총사, 즉 주권권력, 규율권력, 생명권력이라는 권력 이론들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다가 현대 시대에 맞춰 성숙한 것이 자신의 존재권력 이론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푸코가 ‘환경적’이라고 표현한 권력 양상은 신자유주의의 출현과 함께 등장한 현 시대의 지배적 권력 체제의 특징을 의미한다. 즉 “환경에 작용을 가하여 그 변수들을 체계적으로 조정하려는 통치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환경은 인구에서 발생하는 위험이나 사건과 관련된 환경을 말한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사진=위키백과

그리고 마수미는 현시점에서 환경과 권력의 관계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자연 자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권력은 전쟁터의 적이나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기후를 모두 무차별적 위협으로서 동등하게 취급하며 대처하기 때문이다. 부시 정권 이후 두드러진 미국의 권력 작용 방식에서는 항상 ‘잠재적 위협’을 상정하는데 그 위협에는 카트리나 같은 우발적인 자연 재해까지 포함된다. 그래서 그 권력의 양상은 비단 군사/민간 영역의 구분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기후로까지 이어지는 스펙트럼을 보이며, 여기서 문화와 자연은 ‘상호 포함(mutual inclusion)’의 관계를 띠게 된다.   

권력 연속체의 양 끝에 더 이상 유기적 개인의 신체와 인구라는 종적 존재를 놓지 않고, 일단 거칠게 어림잡아, 전쟁과 날씨를 둔다면 대체 자연이란 무엇인가? 환경을 특징짓는 우발적 사건들이 초기에 결정되는 수준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독특하다면singular, 즉 한 세기에-한번-있을-법한 허리케인이 자가증식적으로 형성되는 만큼이나 독특하다면 어떤가? 환경성(environmentality)은 규범화조차도, 그리고 그것과 결부된 권력의 생명정치적 메커니즘도 넘어서지 않는가? (40쪽)

마수미의 이 질문은 권력이 대상으로 삼는 위협의 성격이 어떻게 권력의 성격과 연결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밑그림 그리기라고 할 수 있다. 존재권력은 “편재적으로 포괄적”이면서도 “그 포괄적인 것이 스스로를 독특한 것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위협에 대해서 발생하는 권력 양상이다. 그런 위협에는 허리케인 같은 산출된 자연(natured nature)이 포함되며, 그런 자연의 모습을 띤다. 이는 자연적이면서 문화적이다. ‘기후 재앙이,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자연과 문화 중 어느 영역에 속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져보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런 점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 현상들은 인간의 문화에서 비롯되어 자연에서 발생하며 그것은 다시 인간 사회뿐만 아니라 다른 삶들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자연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다. 혹은 자연과 문화, 둘 다이다. 일종의 뫼비우스 띠인 셈이다. 마수미는 이런 점을 결과로서 나타나는 산출된 자연과 생성이 일어나는 원영토로서의 산출하는 자연(naturing nature)에 대한 집중적 논의를 통해 논증하고 있다. 이는 자연적인 것이 곧 문화적인 것이라는 기존의 사회구성주의 이론들과는 대별된다. 그런 이론들에서는 자연과 문화의 구분이 여전히 대립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마수미는 이제 문화적인 것, 사회적인 것, 인위적인 것이라는 범주적 대립을 넘어 ‘자연’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즉, 순수하고 단순한 자연의 영역이란 없다고 주장한다. “이제 삶의 전반적인 환경은 그 자체로 복잡할 뿐만 아니라 복잡하게 상호연결된 하위체계들로 구성된, 매우 복잡하고 체계적인 위협 환경으로서 나타난다”(59∼60쪽)고 보기 때문이다. 

 

산출된 자연과 산출하는 자연, 자연을 재정의 하라

위협은 도처에 만연해있고, 그 원천을 감지하기 불가능하며, 인간적이지도 자연적이지도 않으며, 갑자기 나타나는 성격을 띤다. 이러한 ‘무차별적 위협’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 위협이 자연적인 것이든, 정치사회적인 것이든 권력이 대응해야 할 과제로 부상하며, 권력은 한 사건이 미처 사건으로 결정되기 ‘이전의’ 시초에, 그것의 잠재성에 대해 가해져야 할 것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어떤 사건의 ‘이전의’ 시간에 대해 가해진다는 점이 존재권력의 가장 큰 특징이다. 존재권력은 시간성의 활용에 있어서 어떤 권력 양태보다 더 적극적이다. 마수미는 이를 ‘선제성(preemption)’이라고 부른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존재권력은 곧 선제권력이다. 그는 서문에서 “존재권력은 이전 권력들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제성이라는 새로운 발판 주변에 이전 권력들을 재조직, 재통합하며, 그런 과정에서 그것의 대상과 작동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존재권력은 일종의 변화하는 ‘권력의 생태학’을 의미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존재권력은 선제권력이다

선제권력이란 말하자면 ‘선수치는’ 권력이다. 그것은 어떤 움직임이 미처 존재가 되기 전의 상태에, 즉 그 잠재성에 조치를 취한다. 어떤 위협이 뚜렷하고 현재적인 위협으로 드러나기 전의 시간에 대해 작동하여, 그 위협을 가시화 시킨다. 이처럼 존재권력은 어떤 존재를 억압하거나, 규율하거나, 집단적으로 조절하거나 하는 부정적인 권력이 아니라,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수미는 이를 “향하는-권력”(power-to)이라고도 표현한다.  

“생명이 막 움직임을 시작하며 아직 있는 듯 없는 상태로(barely there) 존재가 되려는 찰나, 세상의 구멍에서 자신을 넌지시 암시하는 창발을 조장하고 방향 짓는 권력이다. 그것은 존재하게 만드는 적극적인(positive) 권력이다.” 

존재권력(ontopower)에 ‘onto-’가 붙은 이유는 존재론(ontology)에서처럼 존재의 의미와,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onto’의 의미가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권력은 방향성을 결정짓는 힘을 행사하면서 존재를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 있는 듯 없는 듯, 갓 출현하기 시작한 움직임(마수미는 이를 ‘날 활동’(bare activity)이라 부른다)에 방향성을 부여하여 권력의 행사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마수미는 ‘존재권력’ 그 자체에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의미는 없다고 본다. 다만 현 시대에서 존재권력의 속성과 그 작동논리를 가장 잘 파악하고 그 프로세스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쪽이 신자유주의적 자본가 세력과 신보수주의 세력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은 그 두 세력의 존재권력적 프로세스를 잘 파악하는 것이 그에 대응하기 위한 시초 작업이라는 생각에서 쓰여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마수미의 후속 저작인 『불안의 원리』(The Principle of Unrest)(2017)는 ‘운동(movement)’에 초점을 맞추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성격을 면밀하게 파고드는 시도이다. 마수미는 ‘모든 것이 운동이다’고 말할 정도로 움직임을 강조해온 이론가이다. 그런데 우리 삶과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이러한 운동(말하자면, 요즘 자주 언급되는 ‘모빌리티’이다)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선점하려고 한다. 그것은 막-형성 중인 잠재태의 출현 수준에서 작동하는, 단지 이미 생겨난 존재들을 관장하는 권력이 아니라 ‘존재하게 만드는 권력’, 즉 ‘존재권력’들이다. 마수미가 사용하는 운동이란 말은 단지 공간적인 움직임만이 아니라 질적인 움직임까지 포함한다. 이처럼 운동을 중심에 두고 사유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권력 역시 출현의 수준에서 작동하는 ‘집단적’ 운동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이것을 일종의 활동가 철학(activist philosophy)‘이라고 본다.    

 

 

최성희 
부산대 강사·영어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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