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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그에 대한 오해와 진실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그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장세윤
  • 승인 2021.10.06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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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지난 8월 15일 밤 저명한 독립군 사령관 홍범도(1868∼1943) 장군의 유해가 서거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8월 18일 국립 대전현충원 제3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동안 유명인사들은 물론, 많은 국민들이 홍장군 묘역을 방문, 참배하여 국내외에 상당한 감동과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일부 인사들은 홍장군의 행적과 유해 봉환의 타당성 여부, 대한민국장 추서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일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에 홍범도 장군의 생애와 독립운동 등에 대해 연구해온 연구자의 한사람으로서 나름대로 간단한 의견을 밝혀보고자 한다.  

사진 속 하단에는 러시아어로 홍범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홍범도 장군은 만주 대한독립군 총사령군으로서 봉오동 전투 등에서 최대의 승전을 기록했다. 사진=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일찍이 고려 말의 관료이자 문호인 이색(李穡)은 문장이란 바깥으로 드러냄인데,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마음의 드러남은 시대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또 문장은 말의 정화(精華)인데, 말은 꼭 마음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 행동한 사실의 열매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홍범도는 독립전쟁 당시에 어떤 말을 했던가?

홍범도는 1919년 12월 발표한 대한독립군 대장(大將) 명의의 유고문(喩告文)에서 “당당한 독립군으로 몸을 빗발치는 총알과 포탄 사이에 던져서 반만년 역사를 영광되게 하며, 잃어버린 국토를 회복하여 자손만대에 행복을 주는 것이 우리 독립군의 목적이오, 또한 민족을 위하는 본의(本義)이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1920년 중반 중국 동북(만주)의 독립전쟁 과정에서 자신의 독립군 부대를 후원하는 동포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국권회복을 뜻한 이래로 이미 10년의 세월을 보냈으며, 독립의 의군(義軍)을 일으켜 한족(韓族)의 독립을 힘써 외친 이래 1년 반을 지냈다. (중략) 우리들 의로운 독립군 부대들은 일의 성공과 실패를 따지지 않고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평소의 의지 관철에 분투함으로써 우리 한민족 독립을 최후까지 힘을 다하여 외쳐, 죽은 뒤에야 그쳐야 한다는 것을 항상 부하에게 훈시하고 있다.” 

홍범도 장군의 말이 들려주는 진실

한편, 주위의 동료와 친지, 홍범도와 싸웠던 일본군은 그를 어떻게 평가했던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후원한 간도 국민회장 구춘선(具春先)은 그의 인품과 헌신, 애국정신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홍범도 장군의 마음속에는 오직 나라가 있을 뿐이고, 자기 몸과 가정은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온갖 정성을 다하고 마음과 몸을 다하여 독립운동에 열성을 다하여 죽은 후에야 그칠 정도로 헌신하고 있으니, 우리 동포 모두가 숭배하고 믿지 않는 자가 없을 지경입니다.” 

홍범도의 애국심과 연변지역 한인 동포들과의 깊은 유대관계에 대해 일본 정보 당국은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다. 홍범도가 1920년 6월 초 봉오동전투를 눈앞에 두고 부하 2명과 함께 부근의 산봉우리에 올라 멀리 보이는 조국 내륙지방을 보며 “내 몇 년 만에 고국산천을 바라보는 것이냐”하고 긴 한숨을 쉬며 눈물을 흘렸다는 보고가 있다. 

이 비밀보고는 “홍범도의 애국심의 깊이에는 우리도 경복(敬服)할 수밖에 없다”고 했으며, 중국 연변(북간도)지역 한인 동포들이 그를 숭배하는 것이 매우 심하고, 북한 및 연변지방 지리에 밝기가 마치 신(神)과 같다고 보고했다. 더구나 1920년 10월 청산리독립전쟁 당시 그와 싸웠던 일본군은  “호걸의 기풍이 있어 김좌진과 같은 부류의 인물이 아닌 듯하고…… 일반 조선인, 특히 그 휘하에 있는 자로부터 신과 같은 숭배를 받고 있다”고 매우 높이 평가했다.

 

일본군도 홍범도 애국심에 존경심 드러내

또 다른 일본군 기록은 “10월 하순 이도구 어랑촌(漁朗村) 및 봉밀구(蜂蜜溝)에서 일본 군대에 대하여 완강히 저항한 주력 부대는 독립군이라고 불리는 홍범도가 인솔하는 부대였다고 한다. (중략) 그가 독립군 각파가 항상 행동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의사 소통이 안되는 것을 개탄하여, (중략) 단독 행동으로 함경남도 삼수(三水)·갑산(甲山) 방면으로부터 국경을 습격하여 여론을 환기하고 독립군의 기세를 보이겠다고 한 분격적 열정은 그의 성격을 엿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라고 매우 호의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홍범도의 말과 문장, 구춘선 등 독립운동 지도자의 평가와 일반 한인 동포들의 인식, 그리고 적인 일본 당국의 평가 내용을 주목하고, 그 의미와 시사점을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는 1927년 결국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지만, 그의 애국심과 민족주의자적 면모는 위의 언설과 주위의 평가로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최근 일부 인사들이 제기한 홍범도의‘자유시사변(1921년 6월 28일)’가담설이나‘자유시 학살' 개입설, ‘한국독립군 대학살’,‘독립군 학살 공모’등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홍범도 관련 독립군부대는 이 사변의 피해자라 할 만했다. 이 사변 당시 홍범도는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하면서 매우 안타까워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한 나중에 관련 독립군 재판위원의 1인으로 참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재판으로 실형(징역형 2년)을 받은 독립군은 3명 뿐이었다.       

독립군 학살이나 개입은 전혀 사실 아냐

1987년 10월 개정된 현행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前文)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분명히 하고 있다.

꼭 이 헌법(전문)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동안 정부와 관련 기관, 일부 기념사업 단체, 일반 국민 대다수, 학계 일각에서도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정통성’을 강조하면서 편향된 역사인식과 기억,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20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전후하여 ‘임시정부 법통론’이 다시 조명되기도 했다. 한편 북한에서는 널리 알려진 대로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매우 편협한 역사인식이 북한현대사의 주류로 강조되고 있다.     

이번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계기로 20세기 전반 일제강점기, 아니 독립전쟁기에 우리 민족이 전개했던 다양하고 치열한 독립운동, 민족해방운동의 다양한 실상과 관련 인물, 단체 등을 객관적으로 재평가하고, 그동안 배제하거나 도외시했던 계열이나 인맥, 관련 지역은 없었는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중국 동북이나, 중국 관내지역에서 중국공산당 세력과 연대하여 투쟁한 세력, 사회주의계열 운동, 러시아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 등에 대한 심층적 연구와 교육이 절실한 실정이다.

유명한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저서 『혁명론』에서 혁명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야기하기(story-telling)”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이야기하기는 기존의 이해를 넘어서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행위의 한 형태라고 규정했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일종의 ‘혁명’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분명 그러한 독립운동 관련 활동과 인물, 사건들에 대한 조명은 사실 또는 진실을 ‘이야기’하기로부터 시작되고 확산, 전승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계기로 우리는 홍범도와 관련된 개인, 또는 집단 ‘서사(敍事)’적 측면에서의 왜곡되지 않은 역사적 사실, 진상 파악과 참된  ‘이야기하기’, 그리고 그 이야기의 전파와 확산, 후세 교육 등을 중요한 과제로 검토, 추진할 수 있다고 본다. 

 

 

장세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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