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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로 전락한 비평...인위적인 浪漫의 사회
소비자로 전락한 비평...인위적인 浪漫의 사회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06.08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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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 여름호 리뷰

‘문학과사회’가 특집으로 ‘2000년대 문학의 새로운 모험’을 준비했다. 2000년대에 등장한 젊은 문인들을 90년대와 구별해 새로운 세대적 특징을 부여하려는 적극적인 의도가 읽힌다. 이광호는 소설에 “무중력 공간이 탄생”했다고 선언한다. “무중력 공간의 글쓰기는 가벼운 문학을 추구하는 게 아니다. 그곳의 글쓰기는 가벼워야 한다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강박도 없고 다만 자기 미학의 자립성과 개체의 모럴을 스스로 구축하는 글쓰기가 있을 뿐”이라고 진단한다. 이런 “리얼리즘 문학의 어떤 기본적인 규율과 현실의 중력도 발본적으로 무시하는 서사적 상상력”이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 그는 “80년대적 경험의 부재”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손쉬운 합리화일 수 있다. 그런 무중력을 납득시킬만한 작품의 내적 동기가 읽혀지지 않는다면 비판해야 옳은 게 아닐까. 하지만 이광호는 이것에 대한 평가를 유보한 채 그 가능성들만을 묘사해나감으로써 2000년대 소설들의 낯선 서사공간을 인준해주는 데 그친다. 박민규, 정이현 등의 소설을 ‘백수들의 수다’로 파악하면서 “황당한 언어구사를 통해 강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는 전략”이라는 풀이를 내놓은 정혜경, 편혜영의 소설이 “인간 문명의 진화과정 전체를 역주행하는 한 극단적인 종말의 비전”을 보여준다는 박혜경의 진단은 전반적으로 과잉돼 있다. ‘강고한 세계’라는 인식도 너무 추상적이고, 종말의 비전이라는 것도 무책임한 수사로 읽힌다. 결론적으로는 조명된 젊은 문인들이,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문학적 존재로서의 특징이 있는 것인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문학·판’이 특집으로 준비한 ‘문학과 진정성-이 오래된 거울이 비춰주는 것’은 질문이 그리 애절하지 못한 것 같다. 문학적 진정성이 “독창성, 문학의 역사에 대한 인식” 등으로 나열되는 김태환의 진단이나, 90년대 미술담론의 지형도로 진정성의 흔적을 유추하는 김장언의 글 또한 질문이 던진 파문을 별로 넓히지 못했다는 판단이 든다.

뉴 제네레이션을 기도한 ‘문학과사회’와는 다른 방식으로,‘문학동네’는 젊은 필진을 적극 끌어들이고 있다. 첫 페이지를 장식한 제1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자 안보윤 씨는 명지대 문예창작과 대학원에 재학중인 학생으로 81년생이다. 맨 뒤쪽에 모여서 상반기에 출간된 소설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는 이들은 국문과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석박사생들로 대부분 70년대 중반 이후 생들이다. 386 이후 세대가 문학권력 및 세대론적 투쟁으로 주류 잡지들과 벽을 쌓고 지냄에 따라 벌어진 현상이다. 젊은 필진들과 편집위원들이 사제지간인 경우도 있고, ‘문학동네’에서 명지대 출신이 계속 등단하는 것도 편집위원들이 해당 대학에 출강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왜 글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가. 인적 네트워크를 모르고서는 정확한 관찰이 힘들 정도로 요즘 문예지들은 인맥이 작용하는 것 같다. ‘문학과사회’, ‘문학동네’가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반면, ‘문학·판’ 여름호는 중년들로 여유로운데, 김주연, 최윤, 김혜순, 장경렬 등의 문인들이 편안하게 에세이를 싣는가 하면, 박성원, 정영문, 김혜순, 함성호 같은 이들도 보인다. 이들은 ‘문학과사회’와 밀접하다. ‘문학·판’의 편집인은 ‘문학과사회’의 前 주간인 소설가 이인성 씨다. 그리고 편집위원은 김병익 씨의 딸인 문학평론가 김예림 씨, ‘문사’의 단골필자 성기완 씨가 포함돼 있다. 이번 특집 ‘문학적 진정성’에서 서론을 쓴 이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인 문학평론가 김태환 씨다. ‘문학과사회’가 그 육체를 연장시킨 셈이다. 

인맥이 나쁜 건 아니다. 다만 그것이 문예지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문지4K(김병익·김주연·김치수·김현)나 최근의 ‘비평과전망’ 동인만 해도 이들이 끌어모은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주체적으로 지면에 참여했다. 그런데 요즘은 작가와 평론가, 평론가와 평론가들의 관계가 상당히 위계적이고, 참가하는 문인들도 간택되어 전시된다는 느낌이다. 꼼꼼한 텍스트읽기의 고단함을 쉬어가게 해주는 문인들 사이의 고만고만한 에피소드도 요즘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故 김현이 박상륭론을 쓰면서 박상륭이 캐나다로 떠나기 전 흙을 한줌 씹어 삼켰다는 일화 같은 건 요즘 기대하기 힘들다. 한술 더 떠서 최근 평론들은 작품을 쓴 현실의 작가를 ‘주체’라는 철학적 용어로 대치시키고 개별적 작가를 일반화 속에서 희석시킨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를 성찰하기 위한 주체 담론이 철저한 가상공간에서의 텍스트주의로 변질되는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이에 비해‘창작과비평’이 그나마 이름에 값하는 글을 보여준다. ‘갈림길에 선 한국 시와 시비평’이라는 단단한 특집에서 최원식은 좋은 시를 알아보는 “귀명창”의 실종하고 있다며 “문학의 위기의 최후단계로 시의 대중화 현상이 재래했다”고 진단한다. 그는 “시란 이미지를 타고 가는 것이지만, 이미지 범벅이 되면 안된다”는 김지하의 말에 동조하면서 非詩的 현상을 질타한다. 나아가 이를 비평가의 임무 소홀로 연결시킨다. “대체로 서양에서 빌려온 준거에 입각해 시집을 부적절하게 單數化”한다는 비판은 통쾌하다. “비평이 단지 순종적 소비자로 전락”할 때 비평의 위기가 발생한다며 “過恐의 소비자는 으스대는 감독자의 쌍생아”라고 관찰한다.

이어지는 나희덕의 글은 최근 “자연의 매트릭스에 갇혔다”라며 서정 경향의 시인들을 몰아부친 김수이에 대한 항명이다. “시인들이 기억작용을 통하여 삶의 재생을 꿈꾸는 건 그들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주어져 있는 가능성을 붙잡으려는 노력”이라고 옹호한다. 기억이라는 것이 시적 개인에게 얼마나 숭고한 질료인지 역설되고, 각 시인마다 기억이 어떻게 다른지 현명하게 분별하고 있다. 다만 시작행위를 지나치게 철학화하는 감도 있다. 이와 관련 계간평을 쓴 박형준 시인이 “요즘 시들의 낭만적 상상력은 너무 인위적”이라고 발언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고통과 관념, 유희에 매몰돼” 있고, “표현의 화려함과 환유적 사고, 무의식에 대한 과다한 집착은 전시대와 독립된 미의식을 창출하려는 조급증의 반영”이라고 비판한다. “잎과 가지만 보며 앞으로 내달리면서 뒤로 모습을 드러낸 자신의 뿌리를 간과하는 태도는 지나치게 인위적이라 새로운 미적 가치가 태어나기 어렵다”라고 마무리 짓는다. 선배시인의 충고에 가까운 박형준 시인의 평이 오늘날 시에 대한 그 어떤 비평가의 발언보다 더 울림이 큰 것은 도대체 누가 시를 비평해야 할까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제시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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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05-06-12 16:25:54
시정의 인물 비평치곤 뭔가 역사적인 듯보이고 '발견'도 있고,
그런가 하고 보면, 가자님의 중요한 통찰마저 무색하게 하는
인물놀음이 논지를 가리네요.

누가 어디서 왔고, 누가 누구의 씨이고, 학생이고,
참으로 유치합니다. 차라리 한 두 작품 골라서 칭찬을 하든
비판을 하든 하시죠. 뭡니까. 유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