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5:15 (금)
영화를 넘어 詩가 되고자 하는 욕망
영화를 넘어 詩가 되고자 하는 욕망
  • 황혜진 영화평론가
  • 승인 2005.06.0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평: 김기덕 영화의 미학

한국영화 관객 점유율이 50%대를 넘나드는 시대가 되었다. 멀티플렉스와 블록버스터, 팝콘과 콜라가 빚어내는 흥청거림이 영화 관람을 하나의 이벤트로 경험하게 한다. 영화가 깊이 없는 후기산업사회의 특징을 증거라도 하듯이 평평한 스크린 속으로 관객의 욕망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 관한 담론의 생산도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에서 진지한 비평, 심지어 사이버 공간에서의 ‘꼬리말 영화평' 쓰기에 이르기까지 영화를 보고 읽는 행위는 일상세계의 경험을 구성하며 나아가 지적이고 정치적인 담론과도 연결된다. 물론 이것이 모든 세대를 포괄하는 경험은 아니다. 한국영화산업의 외형적 성장은 대체로 15세 관람가 등급의 가벼운 기획영화가 주류를 이루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수년 간 한국영화가 그리고 있는 가파른 상승곡선은 작은 영화가 내는 비주류의 목소리를 억압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렇듯 할리우드의 시스템을 닮아가는 한국영화계의 풍경 속에서 김기덕 영화는 도드라진 형태와 색감으로 인상적인 순간을 창조하고 있다. 감독 자신은 늘상 중심으로부터의 소외감을 이야기하지만 그의 영화는 데뷔 이래 크고 작은 논쟁의 중심에 존재해 왔다. 몸집 불리기와 그에 상응하는 마케팅의 고도화라는 영화산업의 환경에서 수공업적 생산을 통해 국외자의 미학을 의제화하고 있는 김기덕의 영화는 주목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그의 영화는 영화의 예술성에 대한 고전적 질문과 함께 한국사회를 가로지르는 비평적 사유의 차이를 드러낸다.

영화의 예술성에 대한 질문이 여전히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답을 찾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현실사회의 완고함이 언제나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절망에 이르게 하는 장벽들은 시대 혹은 공간을 달리 하며 사회구조의 여러 층위에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장벽의 존재가 현실의 안과 밖, 그 다름을 인지하게 한다. 예술은 언어와 계급, 성별과 종교, 민족과 국가 등, ‘나’ 혹은 ‘우리’의 정체감을 구성하는 상식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세계를 의심의 눈길로 돌아본다. 거칠게 말해 영화 역시 다른 장르와 같이 위반의 시선을 바라본 세계를 재현함으로써 예술의 위치에 오른다.  

물론 영화의 예술성을 자로 잰 듯 평가할 기준은 없다. 여기에도 역시 권력과 지식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칫 진기함이 새로움의 대명사가 되고 나아가 엽기가 독창성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김기덕의 영화가 걸어 온 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데뷔작은 그 해의 가장 독창적인 영화로 평가되었는가 하면 이후 유사한 소재와 이미지를 보여준 영화들은 약간의 옹호와 함께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 <섬>이나 <나쁜 남자>에서 보여준 반페미니즘적 표현이 비난의 주 원인이었지만 역사성의 결여(<수취인불명>에 대한 비평적 호의와 비교해 보라) 역시 때때로 언급되었다. 기대를 갖고 지켜 보았지만 단지 ‘센 영화’로 밖에 구분될 수 없는 불운이 김기덕 영화의 운명일 수도 있었다.   

국제영화제의 인정이 개별 영화의 미학적 성취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사마리아>, <빈집>으로 이어지는 해외에서의 잇다른 호평은 확실히 김기덕과 그의 영화를 구해냈다. 여기에 국내에서 이루어진 강한 비평적 지지의 입장이 더해지며 김기덕은 12번째 영화 <활>을 선보였다. 메이저 배급 시스템의 바깥에서 단관 개봉을 하며 전국을 돌겠다고 선언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초기 영화에서부터 지속되어 온 경향이지만 최근 영화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이와 같은 특징은 현실사회로부터의 탈출의지를 공공연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가 주체를 구성한다고 할 때, 김기덕이 창조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주체되기를 거부한다. 언어/주체를 버림으로써 김기덕 영화의 주인공들이 얻게 되는 것은 현실로부터의 자유이다. 이 자유는 무엇보다 몸을 해방시킨다. 피 흘리는 육체의 재현이 불편함을 유발시키는 것이 사실이지만 몸은 <파란대문>과 <섬>을 거쳐 <빈집>과 <활>에 이르면 언어의 부속물이 아닌 영혼과 물질이 공존하는 장으로 등장해 근대적 억압으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데카르트 철학이 정초시킨 서구의 근대적 인식론이 몸에 대한 공공연한 거부를 표명한 것을 기억해 보자. 중심에의 진입을 꿈꾸는 대신 아예 울타리 밖에서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하는 편을 선택한 김기덕의 인물이 근대의 호명, 즉 이성의 언어를 통해 합리성에 이르라는 사명을 거부한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있겠는가?

몸을 매개로 한 폭력의 재현 역시 예정된 여정을 통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내 몸에 가해지는 듯  느껴지는 김기덕 영화의 폭력은 <달콤한 인생>(김지운)의 양식화된 폭력과 확연히 구별된다. 그것은 마치 대낮에 헤집어진 자궁을 목도하는 공포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김기덕은 중심의 기대, 즉 엽기적 스타일리스트의 자리에 오래 머물기보다 스스로의 욕망을 보다 보편적인 미학 안에 담으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의 최근작들이 드러내는 폭력은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것을 소유하거나 자학하기 위한 형식이 아니다. <사마리아>에서 복수를 꿈꾸는 아버지는 여전히 폭력으로 세계를 응징하지만 적어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빈집>에 이어 <활>은 폭력을 지우고 거기에 일종의 도(道)의 개념을 세우고 있다.

몸의 단련이 근대적인 육체의 매끈함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몸의 합체로서의 인간을 어떤 궁극적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 <빈집>의 청년이 수행(?)을 통해 유령되기에 성공했듯이 <활>에 등장하는 노인은 그네를 탄 소녀 너머로 활을 쏴 점을 친다. 이것은 혼자만의 해탈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완벽한 믿음이 존재해야 가능한 것이다. 활 쏘는 행위는 이제 육체의 단련이 아니라 마음과 만나고 그것은 한편으로 음악이 된다. <활>은 또 <빈집>과 같이 유령되기의 또 다른 예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토록 욕망하던 소녀와 결혼한 노인은 그녀의 몸을 현실적으로 소유하는 것의 한계를 알고 영원히 관계 맺기 위해 유령되기를 선택한다. 물리적으로는 제로의 존재이지만 노인은 소녀와 성교하고 자신의 제국이었던 배를 떠나는 소녀와 함께 할 것이다. 관계의 영원성에서 구원을 찾고자 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남성은 이제 한결 성숙해졌다.   

사유하는 인간을 탄생시켰지만 동시에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분리시킨 근대적 인식론은 결국 자본을 정당화하고 모든 것을 규율화하고자 한다. 의미의 재배치를 통해 기존의 언어에 흠집을 내는 시의 언어는 아마도 가장 순결한 형태로 마지막까지 상식에 저항할 것이다. 김기덕의 영화는 점점 시를 닮아가고 있는 듯하다. 피가학적인, 혹은 반페미니즘적인 언술로 인한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란 쉽지 않겠지만 그는 야심차게도 이러한 범주들을 초월하고자 한다. 굳게 입을 다물고 관객을 매섭게 쏘아보는 인간, 몸과 마음을 함께 지님으로써 근대로부터 탈주하고 있는 한 인간을 바라보도록 주문하면서...

(사진 위에서부터 '악어', '나쁜 남자',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활'의 한 장면)

황혜진 / 영화평론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