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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은 많은데 '대들보' 빠져 아쉽다
기둥은 많은데 '대들보' 빠져 아쉽다
  • 황희숙 대진대
  • 승인 2005.05.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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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다시 과학에게 묻는다』전영삼 지음| 아카넷 刊| 307쪽| 2005

과학철학에도 화려한 시절이 있었다. 모든 형이상학, 아니 더 정확히는 형이상학적-반과학적 사유에 기생하는 야만을 제거하려는 목표 아래 결집했던 비엔나 실증주의자 이래 과학의 동적 본성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해준 칼 포퍼와 파이어아벤트, 라우든에 이르기까지 과학철학의 업적은 눈부시다. 20세기 초 논리경험주의와 중반 이후 후기실증주의를 거쳐 세기말 가까이에 이르는 동안, 과학철학은 과학을 이해하는 중심 통로였다. 많은 과학자와 일반인이 과학철학자의 해명에 귀기울였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철학은 더 이상 그런 위상을 누리지 못한다. 과학사와 과학사회학 등 과학에 대한 경험적 연구들이 활성화 됐으며, 과학철학은 과학의 분과를 따라 전문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편 40여년 전 스노우가 당시의 인문적 전통과 과학의 대립을 비판하며 예상했듯이 두 문화의 간극을 넘어서려는 이른바 ‘제3의 문화’도 싹트고 있다. 예를 들면 도킨스이나 굴드, 험프리 등 저명한 과학자들은 인문지식인의 매개 없이 스스로 매력적인 글쓰기를 통해 대중과 만나고 있다. 이들의 대중적인 과학저술은, 일찍이 과학의 인문학적 이해를 위해 애썼던 메다워나 브로노프스키가 미처 다 숨기지 못하고 드러냈던 인문학자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보상해주고도 남을 만큼, 지적이며 흥미롭다. 지금 과학철학은 일종의 위기에 처해있다. 과학에 대해 알고 싶은 대학생들, 일반인들에게 과학철학은 일차적으로 떠오르는 분야가 아니다. 지금 과학철학이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최근 우리 학계는 세기 전환기 과학자와 과학학자들 간에 벌어진 ‘과학전쟁’의 함의를 논의하는, 또한 IT산업과 유전공학의 눈부신 발전을 비평하는 연구업적들을 간간히 만나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전영삼 박사의 ‘다시 과학에게 묻는다’는 자못 곤궁해 보이는 21세기 과학철학의 자리를 성실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과학연구가 이룬 그간의 성취를 반영해 ‘과학철학’의 분석적 논의들과 ‘과학지식 사회학’의 경험적 연구들을 과학철학의 관점에서 포섭하고 있다는 특징이자 장점을 갖는다. 메타적 연구와 과학의 실제 연구내용 간의 괴리를 막기 위해 과학사의 많은 사례들을 본문에 인용하는 것도 좋은 점이다. 1부에서는 알레르기 내성 실험을 들어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과학의 방법을 설명하며, 2부에서는 과학적 작업의 본질에 대해 특히 이론구성에 대해 해명한다. 3부에서 사실의 사회적 구성과 이론 선택과 사회적 이해관계 문제 등 최근 떠오르고 있는 논쟁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평자는 특히 분석적 과학철학의 내용을 다루는 2부를 재미있게 읽었다. 

생각해 보면 그간 번역서는 많았지만, 우리 학자가 직접 쓴 충실한 과학철학 입문서는 거의 없었다. 이렇게 공들여 충실한 내용을 갖춘, 더구나 조리 있고 온건한 언어로 잘 씌여진 이 책은 과학철학 연구뿐 아니라 과학철학의 교육에도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한두 가지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먼저 관찰(가능성) 개념 또는 관찰/이론 이분법 그리고 관찰의 이론의존성 개념 등 과학철학의 대단히 중요한 주제들이 너무 간략히 다뤄졌다는 것이다. 저자가 한슨에서부터, 반 프라센 그리고 기리와 라투르까지 수많은 학자를 다루고 있으면서, 사상사의 지형도 위에 더 뚜렷할 몇몇 과학철학자들과 그들의 주장을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은 유감이다. 노이라트와 콰인의 ‘전체론’이나 거기서 파생되는 ‘미결정성논제’도 나타나지 않는다. 퍼트남이 환기시킨 바 우리 시대의 ‘과학주의scientism’에 대한 우려도 없다. 이렇게 콰인, 퍼트남, 심지어 구성주의 철학자인 굿맨의 이름과 주장이 이 책에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것은 놀라웠다. 평자가 보건대 2부와 3부 속의 논의들은 상당부분 연관될 수 있는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다뤄지지 않고 있는데, 위 세 명의 과학철학자들의 이론은 카르납, 헴펠의 논의들과 쿤이며 블루어, 콜린스 등의 논의를 연결해주는 가로 들보의 역할을 하는 업적들 아닐까. 

 
또한 후반부 과학지식 사회학 부문에서 저자가 아주 짧게 과학과 성별의 문제를 언급하고 지나가지만, 이는 ‘과학에 대해 사회가 상관이 있는가’라는 3부 전체의 물음에 비추어 좀더 확대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단순히 (여성)과학자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과 이성의 남성성, 과학의 성적 메타포를 문제 삼는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입장을 포섭하는 연구는 우리 시대 과학학의 가장 특별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황희숙 / 대진대 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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