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0-07-03 17:35 (금)
그들은 여인들을 어떻게 비틀었는가
그들은 여인들을 어떻게 비틀었는가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5.05.3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이의 예술_(2)비스듬히 누운 누드

▲조르조네, '풍경 속의 잠자는 비너스', 1508-1515, 유화, 108.5*175cm ©

서양미술에서 비스듬히 누운 누드는 흔한 주제다. 서있는 누드와 앉아 있는 누드에 비하면 비스듬히 누운 누드는 에로틱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고 요염한 여인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은 대개 비스듬히 누운 누드다. 누워서 몸을 비틀어야 요염한 자세가 되기 때문이다.


여인의 누드를 에로틱하게 표현하는 것은 베네치아의 전통이었다. 베네치아 화파는 조형적 형태를 중시한 피렌체 화파와는 달리 색채를 중시했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베네치아의 뛰어난 화가는 자코포 벨리니였고, 아들 젠틸레 벨리니, 조반니 벨리니와 사위 만테냐의 작품 구성은 대부분 그에게서 유래한다. 이들 중 가장 재능있는 화가는 조반니 벨리니(1430(?)~1516)며 인물과 풍경, 빛과 공간의 조화로 회화에 기여했다. 조반니의 문하에 조르조네(본명은 조르조 바르바렐리, 1476(?)~1510)와 티치아노(1488(?)~1576)가 있었고, 특히 조르조네의 차분한 색조, 빛, 대기 표현의 효과는 베네치아 회화에 전환점을 마련했는데, 색채, 분위기, 비례를 이용해 인물과 풍경이 한 덩어리처럼 일체가 되는 새로운 기법을 창조했다. 그렇지만 서명과 제작연도를 적은 작품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아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조르조네의 위치에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게다가 30대 초 병으로 요절한 후 작업실에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많은 작품을 젊은 티치아노를 비롯한 제자들이 완성했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럽다.


티치아노가 완성시킨 조르조네의 ‘풍경 속의 잠자는 비너스’는 현실 세계와는 동떨어진 전원에서의 시적 혹은 이상적인 모습이다. 비너스를 잠든 모습으로 묘사한 화가가 과거에 없었으므로 미술사학자들은 조르조네가 16세기에 새로운 신화적 주제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조르조네는 1499년 베네치아에서 발간된 ‘히프네로토마키아 폴리필리’에서 비스듬히 누운 비너스 목판화를 보고 영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와 로마미술에서 비너스가 비스듬히 누워 잠든 모습을 발견할 수 없으며 고대 문헌에도 잠든 비너스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최후의 로마 시인 클라우디안이 399년 두 친구의 결혼을 위한 축시에서 잠든 여신을 언급한 적이 있다. 축시를 청년과 처녀들이 신부의 방 앞에서 노래로 부르는 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관습이었다. 비너스와 큐피드는 후기 라틴 문학에서 의인화한 사랑으로 결혼 축시에 종종 등장하게 됐다. 문헌상으로는 잠든 비너스는 클라우디안으로부터 비롯했으나 회화로 출현하게 된 것은 조르조네에 의해서였다.


▲티치아노 ©
티치아노는 1535~40년에 ‘주피터와 안티오페’를 그렸는데, 사티로스의 형상을 한 주피터가 왕의 딸 안티오페에게 다가가는 장면이다. 안티오페는 주피터로부터 쌍둥이를 낳게 된다. 티치아노는 1574년 필리프 2세의 비서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을 가리켜 “풍경과 사티로스를 배경으로 벌거벗은 여인”이라고 했다. 이 작품이 프라도 궁전에 오랫동안 장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라도의 비너스’라고도 한다. ‘풍경 속의 잠자는 비너스’를 완성시킨 경험이 있는 티치아노는 조르조네와는 달리 신화 속에 비스듬히 누운 비너스를 삽입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베네치아 미술의 최고 전성기를 주도한 티치아노는 벨리니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스승보다는 조르조네의 서정적 양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조르조네가 1510년에 죽고 스승 벨리니가 1516년에 타계하자 티치아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공식화가에 임명됐으며, 이런 과정에서 조르조네의 지배적인 영향에서 점차 벗어나게 됐고 자신만의 독자적 기법을 형성하게 됐다. 1530년을 기점으로 그의 양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전의 활기 넘치는 표현이 좀더 억제된 명상적인 색조로 달라졌으며 구도에서도 대담함이 감소됐다. 1530년대에 그의 명성은 전 유럽으로 확산됐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
이탈리아 제후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티치아노는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와 그의 부인 초상을 그렸다. 프란체스코의 성격은 매우 거칠고 급했으며 추기경을 맨손으로 때려죽인 적도 있다. 베니스에 궁전을 갖고 있었고 1538년 10월에 죽었는데 독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티치아노는 공작의 아들 귀도발도 델라 로베레를 위해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그렸는데, ‘풍경 속의 잠자는 비너스’와 거의 동일한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조르조네의 시적 분위기는 좀더 직접적인 관능 면에서의 호소력으로 대체됐다. 티치아노는 여인의 오른손에 비너스를 상징하는 장미를 들게 했다. 누드는 아름다움의 이상을 반영한 것이며 전성기 르네상스의 전형적인 에로틱한 모습이다. 여인의 이마가 넓은 것은 당시 드문 경우다. 이탈리아 대부분의 여인은 검정색인데 금발이라서 여인이 당시 최신 유행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귀도발도의 나이는 스물 다섯이엇고 티치아노는 그의 나이에 두 배가량이었다. 귀도발도는 이 작품이 자신의 애인을 그린 것이라서 소중하게 보관했다고 전하지만 일설에 의하면 티치아노가 자신의 애인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19세기에는 그림의 모델이 귀도발도의 어머니 엘레오노라는 유머가 떠돌았고 티치아노가 그린 그녀의 초상과 닮았으므로 유머는 신빙성이 있었다. 그러나 세 가지 설 모두 증명되지는 않았다.


앵그르, '그랑드 오달리스크'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신고전주의자이며 동시에 낭만주의자 앵그르(1780~1867)에게 영감을 줘 1814년에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그리게 했다. 오달리스크는 터키 황제의 후궁을 말한다. 앵그르의 낭만적 정신은 초기에 유복한 사람들의 주문을 받아 그린 초상화에 나타났고, 초상화는 정교한 선의 아름다움과 표현력 있는 윤곽으로, 형태를 나타내는 기능을 넘어서 그것 자체로서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지녔다. 이는 앵그르의 생애 전반에서 회화의 본질을 이루는 양식이 된다. 로마대상을 수상해 정부의 장학금으로 로마에서 유학할 때 그가 가장 선호한 주제는 여인의 누드였다. 1814년에 그린 ‘그랑드 오달리스크’에서 이탈리아의 영향이 두드러짐을 본다. 이 작품에 감동한 피카소는 1907년에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모사했다.


비스듬히 누운 여인의 누드는 마네에게도 중요한 모티프가 되어 1863년에 ‘올랭피아’를 그렸다. 이 작품은 1865년의 살롱전에 소개된 후 문제작으로 스캔들을 일으켰는데, ‘올랭피아’를 사람들은 “고양이와 함께 한 비너스”라고 했다. 마네는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다. 그는 1856년 이탈리아를 두 번째 여행할 때 우피치 뮤지엄에서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모사했다. 그는 티치아노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여신을 상징하는 비너스 대신 모델을 침대에 누이고 옆에 흑인 하녀를 세웠다. 모델은 그가 선호한 빅토린 뫼랑이고 올랭피아는 당시 화류계의 흔한 이름이었다. 뫼랑의 발끝에 보일 듯 말 듯 고양이를 묘사했는데 에로틱한 분위기가 고양이로 인해 한껏 고조됐다.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의 잠든 개를 고양이로 대체한 것이다. 고양이는 프랑스어로 여자의 음부를 뜻한다. 보들레르의 시 “왕비의 발아래서 발기하고 있는 고양이처럼”이란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마네의 올랭피아

올랭피아란 이름의 역사적인 인물 중 올랭피아 말다치니 팜필리가 있으며 마네가 이 여인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동생의 미망인이던 이 여인은 교황의 애인이 되어 권력을 행사했다. 벨라스케스는 1649년 로마에 머물 때 이 교황의 초상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데 올랭피아의 초상도 그렸다. 마네는 이 작품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교황과 올랭피아와의 관계는 오늘날보다 훨씬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올랭피아’에는 고야의 ‘벌거벗은 마하’ 그리고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노예와 함께 있는 오달리스크’의 요소도 혼용돼 있다. 드가가 지적한 대로 마네는 다양한 데서 영감을 얻었으며 그런 요소들을 자신의 작품에서 구성 요소가 되게 했다.


‘올랭피아’에 대한 혹평이 극에 달한 1865년 마네는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위로를 받고 싶어 브뤼셀에 있는 그에게 솔직한 평가를 해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시인은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자네가 훌륭한 화가임을 내 입으로 선언하네. 사람들이 자네를 조롱한다고 괴로워하는군. 명심해야 할 점은 이런 경우를 자네가 처음 당하는 게 아니라는 것일세. 자네가 스스로를 샤토브리앙 혹은 바그너보다 위대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도 한때 자네처럼 조롱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라네. 그들이 사람들의 조롱을 견디지 못해 죽었나? 그렇지 않네. 자네가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할까봐 하는 말인데, 샤토브리앙과 바그너는 자네보다 위대했으며, 자기 분야에서 최고였고, 그들의 시대는 지금보다 훨씬 나빴다네. 자네는 ‘낡은 시대의 최고’일 뿐이라네.”


폴 세잔은 ‘올랭피아’에서 영감을 받아 ‘현대판 올랭피아’(1869~70)를 그렸다. 세잔은 마네에 대한 경쟁심이 대단했고, 1873~74년에 다시 ‘현대판 올랭피아’를 그린 것으로 봐서 ‘올랭피아’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마네의 작품을 패러디한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 경의를 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마네를 만나고 있었으며 존경했다. 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르 사리바리’에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


“자네는 이런 시간에 나더러 ‘현대판 올랭피아’에 관해 말하라는 건가? 쪼그리고 누운 추악한 여자의 몸에서 흑인 하녀가 베일을 걷어내는 광경을 넋을 잃고 쳐다보는 저 한심한 친구! 혹시 자네는 마네의 ‘올랭피아’를 기억하는가? 그 작품은 세잔이란 자의 작품에 비하면 데생, 정확도, 마무리 등이 탁월한 걸작이지.”(1874년 4월 25일) 


래리 리버스는 1970년에 ‘나는 검은 얼굴의 올랭피아를 좋아 한다’를 제작했는데, 올랭피아 앞에 흑인여인의 누드를 나란히 그려 넣어 새삼 충격을 주려고 했다.
김광우 / 미술평론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