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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비평] 숫자와 교수라는 직함의 후광효과
[칼럼비평] 숫자와 교수라는 직함의 후광효과
  • 김조영혜 기자
  • 승인 2005.05.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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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시절 통계학을 수강하게 되었다. 한번은 그 수업에서 퀴즈를 보는데 교수께서 “답안지 말미에 재미있는 농담을 쓴 사람에게는 1점씩 가산점을 준다”고 하셨다. 필자도 1점의 가산점에 혹하여 농담을 한마디 썼으나 불행히도 가산점은 없었다. 그때 필자가 쓴 농담은 이것이었다. “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첫째, 나쁜 거짓말, 둘째, 더 나쁜 거짓말, 셋째, 통계.” 이 농담은 필자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통계결과의 왜곡 가능성을 지적하기 위해 오래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회자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통계학 교수께는 이 농담이 전혀 즐겁지 않았던 모양이다.

통계를 통한 현상 왜곡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예컨대 이렇다. 평소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아내가 남편에 의해 살해될 확률은 0.1%가 채 안된다고 한다. 이 수치로 보자면 남편의 폭행으로 인해 아내가 살해당하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폭행당해온 아내가 누군가에 의해 피살되는 경우 살해범이 남편인 경우는 무려 80%에 이른다. 매우 상반된 결과이다. 결국 이 두 가지 통계수치를 종합하면 남편의 폭행으로 인해 살해되는 아내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 아내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다면 그 범인은 남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통계수치 중 첫 번째 통계수치는 O. J. 심슨의 형사재판에서 그의 변호인단에 의해 악용되었다. 물론 두 번째 수치는 제시되지 않았고 O. J. 심슨은 이러한 변호인단 덕분에 무죄평결을 받게 되었다. 통계가 “나쁜 거짓말”로 악용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어떤 경우에는 통계 수치가 아무리 정확하더라도 진실을 규명하는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여론조사이다. 지난 16대 총선의 경우 우리나라의 방송 3사는 공히 민주당이 제1당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개표 결과 한나라당이 제1당이 되었다. 이만저만한 망신이 아니었다. 그 후 절치부심한 방송사들은 17대 총선 예측보도의 정확성 제고에 사활을 걸었다. 표본의 숫자를 늘이고 더 정밀한 통계기법을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BC, SBS는 오보라 할 만큼 개표결과와 큰 예측보도를 했고, 그나마 KBS는 예측범위를 넓게 잡아 오보는 면할 수 있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가? 그 이유는 표본의 크기나 통계기법에 있는 게 아니고 상당수의 응답자들이 솔직한 응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그것이 정치관련 설문이거나 개인적 사생활과 관련된 설문인 경우 솔직한 응답을 확보하기란 매우 어렵다. 아무리 통계기법이 발달해도 사람의 마음 속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숫자는 마치 언제나 정확하고, 분명하고,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것처럼 행세한다. 한번 숫자에 부여된 마력은 숫자의 횡포로 연결되기도 한다. 특히 대중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통계자료와 수치자료는 대단한 파급력을 지닌다. 그리고 그것이 “교수”라는 직함을 지닌 자에 의해 작성된 경우 막강한 후광효과를 발휘한다. 국내 굴지의 신문사에 기고한 교수들의 칼럼이나 글에서도 통계나 수치가 잘못 사용된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비록 O. J. 심슨의 경우처럼 사안의 본질을 호도할 만큼 중차대한 문제는 아닐지언정 필자의 어설픈 눈썰미로도 부정확함을 발견할 수 있었던 사례를 보자.

2005년 5월 16일자 K신문에 실린 L교수의 칼럼에는 “전국 인구의 47.6%가 전 국토의 1.8%에 모여 살고 있는 게 우리 실정이다”라고 통계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2005년 5월 2일자 C일보에 실린 K교수의 칼럼에는 “국토 면적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2005년 현재 48.3%의 인구가 살고 있다”라고 다른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비록 47.6%와 48.3%의 차이가 별 것 아니며 수도권의 집중화의 심각성을 이해하는데 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통계수치를 인용할 때는 우수리까지 정확히 인용해야 한다. 어느 교수의 수치가 정확한 것이지 확인하고픈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했지만 두 분 모두 통계수치의 출처를 제시하지 않아 그마저 확인할 길이 없었다. 

2005년 4월 18일자 M일보에 실린 C교수의 칼럼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지난해에 비해) 물가가 4% 상승했다는 것은 지난해와 똑같은 1만원짜리 한 장을 들고 시장에 가서 장을 볼 때 장바구니가 작년보다 4% 가벼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산술적으로 정확한 것이 아니다. 물가가 작년에 비해 4% 상승했다는 것은 작년에 1만원을 지불하고 구입한 물건을 올해 구입하면 1만4백원이 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조건에서 1만원을 가지고 올해 장을 본다면 작년에 산 물건의 몇 퍼센트를 살 수 있을까. 위의 칼럼에서는 96% 라고 한다. 하지만 정확한 수치는 96.15%가 된다. 즉, 위의 칼럼과 달리 장바구니는 3.85% 가벼워진다. 이 오차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인상폭이 크면 클수록 오차 또한 커진다. 예컨데 작년에 비해 올해 물가가 100% 상승했다고 하자. 그럼 장바구니는 텅텅 비게 될까. 아니다. 50% 가벼워진다. 

통계나 수치를 인용할 때는 반드시 그 출처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정확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경우 자료를 출처를 알아야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자료의 출처가 자료의 신뢰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담배회사에서 발표하는 “담배의 무해성을 입증한 실증자료”를 우리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통계자료나 수치자료는 우리가 현상을 이해함에 있어 매우 유용할 뿐 아니라 막연히 직관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인도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인용되고 제시되었을 경우에만 그러한 것이다. 학자의 전문성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통계자료를 제시하거나 해석함에 있어서 정확성과 논리성을 확보하는 것은 언제나 필수적인 사항이다. 그것이 본의 아니게 숫자와 교수의 직함을 통해 전달되는 후광효과로 인한 “거짓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신순철 / 한동대 언론정보문화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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