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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_간송미술관의 비밀 (2)왜 입장료를 받지 않을까
특집2_간송미술관의 비밀 (2)왜 입장료를 받지 않을까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05.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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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고집의 아름다운 고립"...계승 위한 공론화 필요

간송미술관(이하 간송)은 우리를 궁금하게 한다. 왜 입장료를 받지 않을까. 국립박물관·미술관도 돈을 받는데, 간송만 이를 비웃듯이 세월아 네월아 문을 열어놓고 있다. 도대체 그렇게 해서 어떻게 운영이 될까.

그렇다고 짐작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 민족예술의 진수를 마음껏 즐기라는 ‘澗松精神’을 지켜가자는 것이다. 간송미술관이 우리 사회에서 특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현실적인 여건도 있을 것이다. 간송은 미술관으로 등록돼 있지 않은 ‘개인컬렉션’이다. 그래서 입장료를 받기 곤란한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간송미술관의 입장료가 없는 이유
그렇다면 두번째 질문이 떠오른다. 왜 미술관 등록을 하지 않을까. 협회에 이름만 올리면 정부지원도 받을 수 있고, 간송처럼 컬렉션이 우수할 경우 입장료만으로도 충분한 운영자금이 생길텐데 말이다. 어떤 비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이 부분도 어느 정도 짐작 가능하다. 정부의 간섭과 복잡한 관계의 네트워크에 발을 담그는 것을 번거러워하는 것이고, 돈과 권력과 로비의 회오리 속으로 들어가서 손을 더럽히기 싫다는 꼬장꼬장함인 것. 보기 싫지 않은 우아한 고집의 아름다운 고립이다.

그렇다면 세번째 비밀은 어떻게 운영되는가 하는 점이다. 운영과 보관에 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기 때문에 진실의 전모를 알 수 없다. 단지 소장 유물에 대해서는 출판시의 도판사용료를 꽤 높게 받는다. 보통 컷당 30만원을 인데 백인산 상임연구위원은 “백과사전처럼 부수가 많은 책이나 상업적 목적의 서적은 좀더 비싸게 받고, 달력은 1백만원까지 책정된다”라고 밝힌다. 출판계는 도판사용료가 비현실적이라며 3만원~10만원인 시중가와 맞출 수 없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그러나 백 연구위원은 “몰래 사용하는 이들이 많지만 일일이 대응하긴 힘들다”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도판사용료가 운영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 듯하다. 이 외에 연구원들의 저서 인세수입, 도록 판매수입, 기타 사적인 후원회가 가동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여기서 네번째 의문이 생긴다. 작품 보존에 비용도 많이 들텐데 간송의 작품보존 상태가 우수하다는 점이다. 회화는 빛에 노출을 안시키면 안시킬수록 좋다. 안성찬 경주대 교수(문화재보존학)는 “노출이 ‘12만 눅스 에치’보다 낮으면 되는데, 간송은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기준을 만족한다”라고 말한다. 간송은 전시회는 공짜로 열지만 그 이외의 기간에는 작품을 절대 보여주지 않기로 유명하다. 1년에 두번 2주간 짧게 공개하는 것 외에는 일체 수장고에서 꺼내는 일이 없기 때문에 보존이 잘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는 “간송은 雨期를 피해서 전시회를 열어 습기로부터도 작품을 잘 보존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간송의 운영철학에 점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늘고 있다. 보여주지 않는 것 이외에 작품을 어떻게 보존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간송미술관 건물은 1938년에 지어져 고희를 넘겼다. 지하 수장고가 안전할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최완수 실장은 “말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한다.

작품을 안보여주는 것에 대한 학계의 불만도 높아진다. 도판과  직접 보는 것은 비교가 안되기 때문이다. 필법의 운용, 색조의 강약, 음영의 농도, 종이의 질감, 선의 예민함에 마음껏 찔릴 수 없는 회화 연구는 매력이 없고 가치도 인정받기 힘들다. 한 박사급 연구자는 “바퀴달린 가방에 쓰던 논문과 자료를 잔뜩 넣고 간송에 찾아가 왜 작품을 봐야하는지 간절히 설명했지만 결국 보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또 한 미술사가는 “간송의 학문적 공헌은 낮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제 간송도 변화할 때가 된 것이 아닐까. 최완수 실장의 ‘쇠고집’에 대해 비판도 있었지만, 그가 있었기에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그가 언제까지 간송을 지킬 수는 없다. 이제 간송에 대한 논의는 간송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공론에 부쳐져야 한다는 게 학계의 여론이다. 한 미술사학자는 “여든이 넘으신 진홍섭 선생이 간송 수장고에 어떻게 억지로 한번 들어가보셨는데, 보관상태가 썩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셨다”라고 전한다. 습기에 좀이 슬지 않을지, 누전으로 불이 나면 수장고가 안전할 지 의문이라고 지적한다. 전시할 때 유리를 깨뜨리거나, 도난의 위험도 있다.

그렇다면 국가에서는 제대로 체크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문화재청과 국립미술관 등에서는 “인원부족”으로 일일이 관리가 어렵고 “먼저 나서서 도와줄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간송의 유물에 문제가 생겨 공론화될 경우 국가책임론이 들끓을 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거나 못한 듯하다.

私有財産과 공공성의 사이에서
이런 비판들과 상황을 간송도 알고 있다. 이제 혼자만의 힘으로는 벅차고, 외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다. 민족의 유산을 학계에 널리 보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채감도 느끼고 있었다. 한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지만 구체적으로 입에 올릴 수는 없다”고 밝혔다. 입에 올리지 않는 방식으로 확인해본 결과 간송 소장 유물의 상속분배가 정확히 돼 있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정이지만 소유권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것. 문화재청은 “서류상 간송의 국가지정 유물은 전성우의 소유”이나 “법적 구속력을 갖는지는 법원이 판단할 문제”라고 말한다. 간송엔 국가가 지정하지 않은 ‘국보’들도 많다.

어떤 이는 “간송의 유물을 국가에 기증하고, 유족이 역사에 길이 남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며 “국가도 유족 측에 먼저 다가가서 적극적인 의사표시와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역사적 유물이 그다지 풍족하게 남아있지 못한 나라에서, 유물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이들을 존중하고, 그러면서 그 유산을 좀더 체계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모색해야 할 듯하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삶: 민족 문예부흥의 초석 마련하다

▲澗松 遺影 © '간송문화' 41호, 1991

간송은 1906년 서울 종로에서 무과 출신으로 정3품을 지낸 부친 정영기의 2남으로 태어났다. 10만석 소출의 대지주가의 자손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책을 가까이 했으며 피부가 백옥 같은 미소년이었다.

간송은 휘문고보를 마치고 간 일본 早稻田대학 시절 일본 학생들의 무시 속에서 망국의 한을 되씹으며 철저한 자기성찰의 시간을 보냈다. 선배와 은사를 찾아다니던 그는 휘문고보 시절 은사였던 春谷 高羲東에게 “암흑시대를 밝힐 수 있는 일은 민족문화재의 수호뿐”이라는 언질을 받고, “예술을 통해 조선을 회복”하겠다고 마음 먹는다.

1928년 23세의 대학생이던 간송이 방중에 귀향해 춘곡을 따라 葦滄 吳世昌을 찾아갔다. 손주뻘의 청년이 대견했던 위창은  간송에게 추사 이래로 전해오는 고증학을 전수해줬으며, 간송은 위창을 사사해 서화골동의 감식안을 키우고, 서화법의 수련을 거치게 된다.

간송은 유물 수집과 관련된 인간관계 이외에는 동년배 지식인들과 별 교류가 없었으며, 열심히 발품을 팔다 시간이 나면 지긋한 화단의 원로들과 예술에 대해 논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고 한다. 간송은 깊게 오랫동안 생각하고 결정한 뒤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꼭 목표를 이뤄내는 심지로 정평을 얻었다. 특히 그보다 훨씬 윗길이었던 영국인 수집가에게 국보급 청자를 대량으로 구입한 것, 지방에 나타난 ‘훈민정음’을 사러 내려가는 헌책방 주인에게 “얼마 들고 가요”라 묻고는 “천원”이라 답하자 6천원을 주면서 “천원은 수고비”라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간송은 천성이 온화하고 남한테 싫은 소리 못하는 사람이었다. 詩文書畵가 上乘에 이른 문한지사였지만, 그는 자신의 직분이 조선의 예술을 회복할 밑거름이라는 것을 늘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정신으로 선학과 후학의 물질적, 정신적 후원자 역할을 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비싼 자료들은 늘 두권씩 보화각 서실에 꽂아둬 대출할 수 있게 배려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간송은 문화재에 10만석을 다 털어넣고도 모자라 민족예술을 이어갈 재목들을 길러내기 위해 보성중학을 인수했다. 그러나 학교재정이 어려울 때 이를 막아내느라 몇년간 무리하게 일하고 마음을 쓴 나머지 1962년, 52세를 일기로 쓰러지고 만다. 그가 남긴 유품, 글씨, 그림, 일기 등은 현재 간송미술관에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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