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1-03-02 18:33 (화)
특집2_간송미술관의 비밀 (1) 역사와 의미
특집2_간송미술관의 비밀 (1) 역사와 의미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05.3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족예술을 지켜낸 결연한 선비정신

간송미술관은 문화인들의 애호 공간이자 경탄의 대상이다. 그만큼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운 이곳은 칭송은 돼왔지만, 진지하고 객관적 논의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유물의 보존방법, 운영의 실태 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최근 간송미술관은 건물노화로 유물보존에 대한 우려가 일고 있으며 미술사학계와의 그림공개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갈등도 있다. 여기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고 과연 이 기념비적 사립미술관의 정확한 문화적 실체와 의미는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논의가 추가로 더 필요한 지 다각도로 짚어보았다./편집자주

지하철 4호선 삼선교역에 내려서 도보로 10분. 차로는 안국동에서 성북동 방향으로 난 북악 스카이웨이를 타고 넘어가다가, 배나무 길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수풀에 덮인 흰 건물이 보인다. 간송미술관이다. 식민지시대 청년 巨富였던 간송 전형필이 10만석 재산을 모두 털어서 일제로부터 지켜낸 수천점의 진귀한 보물들이 오랜 세월 숨쉬고 있다.


간송미술관은 국내 최초의 사립미술관이다. 1930년대 초반부터 수집가로 나선 간송이 1934년 보진재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가 1938년 寶華閣으로 정식 개관했다. 일제 말 대륙침략의 야욕과 민족말살 정책이 노골화될 때 간송은 문화적 저항의 의미로서 보란 듯이 최고의 명당에 떡하니 이 건물을 얹었던 것이다. 건물이 지어진 후 얼마 뒤 악명 높은 조선총독이 관람을 청하여 마지못해 승락하였으나, 총독 일행을 무려 1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뒤 맞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보화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형필이 문화재를 모으고 보존하는 데 기울인 구체적인 노력을 먼저 알아야 한다. 심사정의 심하게 훼손된 그림을 기와집 다섯 채 값을 주고 산 다음에, 그 훼손된 것을 정밀히 복원하기 위해 기와집 여섯 채의 돈을 들여서 보수했다는 것만 봐도 문화재에 대한 간송의 애정이 어떠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작품들은 우리 예술사에 없어서는 안되는 ‘물질적 증언’들이다. 신윤복의 ‘蕙園傳神帖’(국보 제135호)은 김홍도와 함께 조선 풍속화 연구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었고, 혜원의 본명이 申可權이란 새로운 사실도 알려줬다. 기린 모양의 향로인 ‘靑磁麒麟形香爐’(국보 제56호), 기러기 모양의 ‘靑磁鴨形硯滴’(국보 제74호)은 고려 청자의 범주를 한껏 넓혀놓았다. 지방 양반댁의 군불을 때는 아궁이로 들어가기 일보 직전에 구해진, 겸재의 금강산 그림 21폭이 그려진 ‘海嶽傳神帖’은 어떤가. 정선을 한번도 만나지도 보지도 못한 이하곤이 “寫景設色의 교묘함이 진실로 기뻐할 만하고, 그 殺活을 조종한 것은 정말로 스스로 미치기 어려운 것”이라는 평한 이 그림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진경산수화’라는 말이 가능했을까. 또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은 국내 유일한 훈민정음 원본으로 세종 28년에 정인지 등 여덟 명이 세종의 명으로 훈민정음을 설명한 한문해설서로, 1946년부터 조선어학회가 우리말 연구를 본격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기틀을 제공한 소중한 유산이다.


보화각 예술은 사실 전형필만의 작품은 아니다. 그의 뒤에는 위창 오세창이라는 미술사의 巨木이 존재했다. 위창이 기념비적 저서인 ‘근역서화징’(1928)을 통해 우리 회화유산을 철저한 목록학적 방법을 통해서 시대순으로 정리하고, 그 가치를 매겨놓았기 때문에 간송이 이에 근거해 수집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또한 서화나 자기를 구입하면 위창의 감식과 箱書를 거쳐 고급 오동나무 상자에 착착 보관될 수 있었다.


간송이 1962년 갑작스럽게 별세한 이후, 次男 전영우(現 상명대 교수)가 이어받은 간송미술관은 1966년 민족미술연구소를 부설하면서 본격 연구집단이자 미술관으로 제2기를 맞는다. 전영우와 함께 간송미술관을 도맡아서 관리해온 최완수 실장은 조선회화사 연구에 본격 착수해 한문 원전연구와 회화분석 및 회화사 정리에서 많은 성과를 일궈냈다. 조선후기를 사회사에 치우쳐서 보던 학계의 풍토와 달리 문화와 예술을 중심으로, 철학적 논쟁의 경연장으로 이 시기를 조명하면서 “조선이 그 고유색을 한껏 드러내며 난만히 발전한 문화절정기”라는 당당한 정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간송미술관은 매년 봄·가을 두번의 전시회를 열어 무료로 그림을 공개해왔다. 또 전시회를 개최할 때마다 ‘간송문화’라는 도록을 만들어 올해 66권을 기록했다.


김홍도 2백주기를 맞아 열린 간송미술관의 봄 전시회 ‘단원대전’이 지난 5월 29일 막을 내렸다. 단원이 겸재의 진경산수를 높은 수준에서 완성했음을 보여주는 작품 1백8점은 이 미술관의 소중한 존재를 새삼 돌아보게 했다. 한국식 정원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던 정원의 향취를 올 가을 다시 맛볼 수 있었으면 한다. 물론 그 땐 올 봄에 피었던 떼죽나무의 꽃들과 선연한 작약을 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