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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_DMB, 생체적 권력
문화비평_DMB, 생체적 권력
  • 이병창 동아대
  • 승인 2005.05.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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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할 자본의 무기가 또 하나 출현했다. 이름하여 디지털이동방송(DMB)이라 한다. 지난 5월초부터 서비스에 들어갔는데 벌써 폭발적 인기를 끈다는 소문이다. 이에 맞춰 가로형 디스플레이가 달린 핸드폰까지 출현했다.

핸드폰이 출현했을 때, 아무도 그것이 가지는 문화적 의미를 짐작하지 못했다. 그저 이동 중에도 전화할 수 있는 편리한 기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어린 청소년들은 금방 그 숨겨진 의미를 발견했다. 청소년들은 핸드폰을 이용해서 끊임없이 서로 접촉한다. 특히 핸드폰의 문자메시지 기능은 이런 가능성을 심화시켰다. 음성접촉이 불가능한 시간대의 차이에서도 문자메시지는 상호 접촉할 수 있게 해줬다. 청소년들은 이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함께 있는 동시성의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많은 청소년들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끊임없이 만지작거리며, 심지어는 이를 품에 꼭 안고 잠이 든다. 그 모습은 핸드폰의 문화적 의미를 금방 드러내 준다. 핸드폰은 청소년들에게 고유한 고독과 불안, 그리고 무기력감을 넘어설 수 있게 한다.

핸드폰이 형성하는 네트워크의 의미는 사회 정치적으로 발전된다. 핸드폰은 최근 도시의 광장으로 벌어진 청소년들의 촛불집회의 물질적 그리고 심리적 사회적 토대다. 그 촛불집회의 힘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효순이 미순이 사건’이다. 이 촛불집회는 청소년들이 같은 또래들에게 느끼는 동질감과 연대감에서 비롯됐으며, 이 사건에 내재된 인화성을 알아채지 못한 무기력한 기존 지식인 운동을 대신했다. 그것은 또한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았던 미군의 그 뻔뻔함에 대한 도발적인 저항이었다.

핸드폰을 매개로 한 청소년 네트워크들은 지표 밑 균열된 단층을 따라 전달되는 지진파와 같이 움직인다. 이 유목민적 기동성은 이 사회에서 예기치 못한 곳에 출현하면서 견고한 듯 보이는 이 사회를 한 순간에 초토화시키고는 또 다시 또 잠복한다. 핸드폰을 매개로 한 입시부정사건이 그 대표적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청소년들조차 부정에 물들었구나 하는 사회적 지탄의 목소리를 불러일으켰지만, 생각해 보면 이는 자본주의 초기에 벌어진 노동자들의 기계파괴운동과 같다. 그것은 수많은 청소년들을 자살하게 만든, 거대한 문어발처럼 청소년들의 몸을 휘감은 입시 지옥에 대해 전개된 유목민적 전투다. 핸드폰은 여기서 기술적 가능성과 인적 네트워크와 심지어 저항적 충동을 형성시킨 매개체다.

자, 생각해 보자. 이런 핸드폰에 비해서 볼 때, DMB란 무엇인가. 20세기 후반 기존 지배체제를 매개했던 결정적 힘은 대중매체로부터 주어졌다. 30년대 라디오, 그리고 50년대 TV와 같은 대중매체는 가족구성원을 상호 대화의 테이블에서, 소수 전국적 매체권력 앞으로 개별적으로 불러냈다. 더구나 그들을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계급이 아니라 소비에 의해 지배자들과 동일화하는 소비주체로 변형시키고 말았다. 이런 개별화된 소비주체가 이른바 대중이며, 대중매체는 오늘날 안정된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이룬다. 그런데 DMB의 콘텐츠가 기존 TV 방송을 매개하든, 아니면 독자적이든, 이는 소수의 매체권력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기능은 TV나 여타 대중매체와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DMB도 이런 대중매체와 동일한 사회 문화적 의미를 지닌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DMB의 개발을 배후에서 구조적으로 조종했을 세력은 충분히 짐작된다. 그것은 바로 기존이 매체권력이며 그 배후의 자본주의 지배체제가 아니겠는가. 원래 속성상 의심 많은 이 권력들은 핸드폰의 가능성에 경악하면서 그 조그마한 틈 속에서 체제전복의 악마를 엿보고, 이 전복의 싹을 미리 자르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핸드폰을 없앨 수는 없으니, 거기에 TV 시청기능을 추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대중매체 권력의 그 압도적 힘 앞에서 핸드폰의 네트워크 형성 기능이 결정적으로 저하될 것은 틀림없다. 이렇게 핸드폰의 가능성을 교묘하게 치환하면서 탄생한 ‘손 안에 TV’로서 DMB, 생각해보면 그것은 정말 기막힌 지배도구이다. 그것은 과거 눈앞에 대상화될 수 있던 TV를 몸 안으로 이식시키면서, 동시에 권력을 몸 안에 집어넣은 것이다.  DMB, 그건 바로 푸코가 말한 ‘생체적 권력’의 실현이다.
이병창 / 동아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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