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1:45 (금)
한정된 텍스트 중복 양산...벽 허물고 영역 넓히는 추세
한정된 텍스트 중복 양산...벽 허물고 영역 넓히는 추세
  • 신정민 기자
  • 승인 2005.05.2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향: 국내 인명학회의 운영현황

학문의 세계에도 마니아적인 측면이 있다. 카프카, 엘리엇, 칸트, 헤겔, 괴테, 로렌스, 화이트헤드, 니체, 하이데거, 하인리히 뵐, 제임스 조이스, 버니아울프, 밀턴 등 한 사람이 특정분야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을 경우, 이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이 학문적으로 의기투합하여 설립한 ‘人名학회’가 그렇다. 여느 마니아가 그렇듯 여기엔 이중적인 특징이 도사린다. 작가나 사상가가 쌓은 거대한 城을 깊고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반면, 견고한 城 안에서 자족하는 느낌도 강하다. 인명학회의 연구활동은 충분히 경계성을 띠고 있다. 특히 오늘날처럼 탈분과적인 분위기에서 이들의 활동은 아날로그적인 향취를 불러일으키면서도, 동시에 변화를 거부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느낌을 안겨준다.
이들 학회의 전체적인 특징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국내에는 60여개의 인명학회가 있다. 이런 인명학회들은 대부분 어문·역사·철학분야에 집중돼 있다. 인문학의 경우 탐구의 대상에서 ‘인물’이 중요하게 다뤄져온 반면, 자연과학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돼 뉴턴, 아인슈타인 등 수많은 과학자들이 있지만,  그들이 산출해낸 법칙을 넘어서는 관심은 생겨나지 못했다. 이에 이홍로 군산대 교수(과학정보)는 “과학은 발견자들의 과학적 결과만을 참고해서 대상에 파고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들 인명학회의 면모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크게 영미적 전통과 독일적 전통으로 양분된다는 점이다. 이는 독일과 영미 지역의 학문이 오랫동안 이 땅에 자리잡아온 탓이다. 그런데 이는 좀더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는데, 독일의 경우 ‘헤세학회’가 없는 반면, 한국에는 헤세학회가 있듯이, 이는 다분히 한국적 현상이기도 하다. 즉, 이들 인명학회를 보면 한국 인문학이 어떤 인물들을 중점적으로 받아들여왔는 지를 성찰해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하이데거학회’나 ‘니체학회’가 있다고 국내에 이들 사상적 전통이 뿌리내렸다고 볼 수는 없다. 인명학회 가운데 비교적 최신에 생겼기 때문이다. 한국어권 학회로는 ‘율곡학회’나 ‘퇴계학회’를 비롯하여 조윤제 교수를 추모하는 ‘도남학회’, ‘남명학연구소’ 등이 활동 중이다. 

중요한 것은 한 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실제로 이뤄지는가, 그리고 그 연구된 바가 외부와 소통하고 보편성을 획득하는 지의 문제일 것이다. 이 부분에서 인명학회들은 시원스러운 답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동일한 전공학과’의 교수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밀도 높은 전문 연구와 동료, 선후배간의 친목의 성격이 여기서 높아진다. 반면에 한정된 텍스트에 두번 세번 다른 옷을 껴입는 울궈먹기 현상에 대해서 그다지 엄밀한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재 인명학회 총무이사들에게 물어본 결과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해명하지는 못했다. 

인명학회들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의외로 애초의 울타리를 허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14일 학술대회를 개최한 ‘한국헤세학회’는 ‘21세기 문화산업시대의 헤세’라는 주제로 학술적 연구 뿐만이 아니라, 대중문화 속에서의 헤세의 흔적을 적극적으로 탐색해 나갔다.

‘한국호손학회’의 경우, ‘한국호손과미국소설학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회장 김지원 세종대 교수(영문학)는 “소재 제한에서 오는 주제의 유사성을 없애고, 연구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학회의 명칭을 변경하게 됐다”라고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유행성이 강한 한국의 학문풍토에서, 후속세대들에게 관심 밖으로 밀려나 학회의 지속성 여부를 불안케 한다는 게 변화를 이끈 계기가 됐다. 당연히 떠오르는 질문은 관심이 식으면 ‘해체’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지만, 학회가 지속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즉, 대상인물이 갖는 상징적 메리트가 큰 것, 그에 따라 구조화되어 있는 문화적 헤게모니 지형이 아직 굳건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회원들의 학회 이동 내지는 여러 학회에 중복되어 활동하는 데서 오는 운영상의 어려움도 적지 않다. 카프카학회의 총무이사를 맡고 있는 홍길표 연세대 교수(독문학)는 “대부분의 독문학자들이 12개의 독문학회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로 인하여 여타 학회와의 차별화보다는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젊은 연구자들의 새로운 성과물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활용한다고 했다.

영어권학회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한국T.S.엘리엇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노저용 영남대 교수(영문학)는 “영문학 내에 30여개의 학회가 난립하고, 중복회원들이 많아 학술활동 참여도나 학회지에 실을 논문수합이 쉽지 않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대부분의 학회들이 매년 1회 이상의 정기학술대회를 열고 있으며, 학회지를 발간한다는 회칙을 가지고 있는 점을 볼 때, 재정적인 문제까지 더해지면 학회의 부담은 상당히 심각해진다. 학술대회와 학회지 발간은 대부분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해야 하는데, 회비 납부율이 저조한 상황이다. 인명학회는 소규모학회가 많은데도, 그 역사가 있어서 등재후보지를 내는 데가 절반 가량은 된다. 이 지원금마저 없다면 사실 학회운영을 하기가 힘들 지경이다.

이런 사정과는 달리 한국어권 인명학회의 사정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율곡학회’의 경우 강원도가 율곡을 ‘도’의 인물로 지정하고 지원해주고 있으며, 후원해주는 일반회원들도 많아서 재정부담은 별로 없는 편이다. 그리고 철학, 사학, 국문학 전공자들이 연구원으로 다양한 시각에서 활발한 연구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월북작가 이태준으로 학위를 받은 연구자들이 설립한 ‘상허학회’의 경우, 인명학회 가운데 이태준을 중심으로 1920~30년대 문학에 대한 학술적 담론을 주도해서 이끌어나가는 등 그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 덕분인지 2년 전 학진 등재지로 선정돼 지원도 받고 있으며 연구자들의 열의로 회비 외에 추가로 내는 회원이 많아 큰 어려움은 없다고 한다.

최근 20, 21일 한국T.S엘리엇학회와 한국예이츠학회, 그리고 한국영미학회가 공동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비슷한 성격의 학회들을 통합시켜 효율적인 운영을 해자는 취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각 학회의 정체성에 대한 좀더 심각한 질문이 아닐까. 그리고 외국어권 인명학회의 경우 ‘엘리엇학회’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다른 나라의 인명학회와 교류가 전혀 없는 것도 문제다.
 신정민 기자 jms@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