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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동양담론의 허구성
[초점] 동양담론의 허구성
  • 김진석 인하대
  • 승인 2001.06.02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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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가 최근의 '동양담론'에 대해 그 지배논리적 성격을 비판하고 나섰다. 다음의 글은 김교수가 연세대 대학원 총학생회 주최로 열린 학술강연회에서 발표한 글의 전문이다.

1. 동도서기(東道西器)論에 대하여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현재의 우리는 한국 사람이기는 하지만 동양인은 아니다. 이 경우 한국인이란 정치적 규정이기에 일정한 현실성을 가지는 것이지만, 동양은 그런 현실성을 가지지도 못한다. 지리적 혹은 지정학적 규정으로서 나름대로 일정한 사용 가치를 가지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동양'이란 나무도 이질적이다. 그 이유는 근동에서 극동에 이르는 지역이 너무도 이질적인 정치적 문화적 환경과 배경을 가지는 데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가만히 보면 '근동'은 같은 동양인 '극동'에 가깝다기보다는 서양에 가깝다. 그러나 그 못지 않게 중요한 점은, 그렇게 이질적인 덩어리인데도 '동양'이란 덩어리 자체가 서양에 의해 기획되어지고 또 서양에 대립된 것으로 기획되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동'과 '서'라는 규정 자체가 매우 단순한 추상성에 머물 뿐 아니라, 솔직하지도 못한 개념으로 머문다. 중체서용(中體西用)이나 화혼양재(和魂洋才) 등의 이념에서 중국이나 일본이라는 주체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반면, 동도서기론에서 '동'과 '서'는 구체적인 내용도 없다.

물론 현실적인 덩어리로서 동아시아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정치경제학적 블록이고 그 블록은 나름대로 문화적 동일성을 가진다고 여겨진다. 좋다. 정치경제적 블록의 중요성은 나름대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고 그를 뒷받침할 문화적 블록의 이념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 사람들은 아는가? 그 블록이 다른 아시아 지역에 대하여, 예를 들자면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에 대하여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가 보기에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동아시아는 인구와 발전 가능성을 근거로 매우 배타적인 블록으로 기획되곤 하는 것이다.

더구나 다른 물음도 여기서 다시 제기된다. 왜 거기에 철학적 혹은 인문학적 동양 개념을 투사시키는가? 철학적 실체가 근거에 놓여있기에? 그러나 동양 철학이라는 실체, 더구나 지금의 동아시아 삼국 문화의 근저에 놓여있을 실체, 이것은 과거에도 그랬었지만 지금도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아직도 유교적 그리고(아니면, 혹은) 도가적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지 않느냐고? '동양적 전통의 현재성', 이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경험주의적 전제가 아닐까? 개념적으로 명확한 내용을 가지기는커녕 요란한 소리만 내는 깡통이 아닐까? 이 점을 암시하는 첫 번째 예로 김용옥의 노자·공자 개그를 들 수 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동양 사상을 빙자하면서 그것에 기생하는, 동시에 대중과 방송에 기생하는 문화권력 복합체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런 문화권력이라는 점을 부인하고 동양사상의 면면한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는 허울을 강조한다.

2. 우리는 여기서 동양 담론의 현재적 틀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서양에 대한 대안으로, 특히 서양문명이 초래한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동양을 생각한다. 앞에서 나는 극단적인 이질성을 이유로 그런 동질적인 동양이란 문화적으로 존재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적 전통이 질긴 동아줄 모양으로 우리를 붙들어매고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듯하다. 그 유구함을 어쩔 수 없고 또 그 유구함을 어쩌겠냐는 게 그것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변론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잔존과 대안은 다른 것이 아닐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공자 사상은 중국적 전통이다.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배타적 민족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서양적 맥락과 비교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흔히 서양 문화가 그리스에서 태동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은폐와 왜곡이 있다. 그리스 문화는 많은 점에서 이집트를 본받았지만, 서양 문화는 이 점을 가린다. 그리스에서 시작하는 서양, 이것조차도 서양적 허구인 것이다. 그러나 문명사적으로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 그리스 문화가 계속 발전하지도 않았고 지배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서양 문화는 그리스라는 허구적인 근원에서 시작하여 로마를 거쳐, 거의 모든 나라에서 꽃이 피었다.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그리고 저 먼 가공의 서인도 미국까지. 그러나 동양에서는 거꾸로, 다행 중 불행인 것은, 중국 문화가 19 세기까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헤게모니를 유지하였다는 점이다. 이천 년 가까이 된 문화적 패권주의, 이것을 되돌리고 회복하는 것이 그렇게 바람직스럽지 않은 이유이다.

다음으로 유가 사상의 가치와 인식의 중심은 정면론(正名論)에 근거한다.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아비는 아비, 자식은 자식노릇을 하는 것입니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 顔淵)

어떤 사람들은 이 동어반복을 형이상학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여기서 "∼다움"의 존재론을 투사하기도 한다.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신분적 정체성은 오늘날 회복되기 힘들다. 회복되면 좋은데 회복되기 힘들다는 말인가? 회복하는 것이 정말 좋은가? 그렇지 않다. 완전한 절연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시커먼 단절이 유가적 전통과 현재의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사회주의적 평등의 관습이 실행된 중국은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바른 이름에 근거한 정당한 차이가 아니라, 신분호칭의 권력에 구성원들을 예속시킴으로써 정당한 개인의 형성을 막는 왜곡된 봉건적 정명론이다.

중요한 점이 또 있는데, 유가적 가치의 사회적 성격과 배경이다. 신분적 정명론에서 볼 수 있듯이, 유가적 가치는 철저하게 신분에 근거하고 있다. '군자'조차도 단순히 인격의 완성자가 아니라 지배적인 가치를 소유하고 실천하는 자이며 그 근거 위에서 비로소 인격의 완성이 거론된다. 군자의 인격은 평등하거나 동등하지 않음에 크게 의존한다는 말이다.

군자는 조화하지만 동등하지 않으며, 소인은 동등하나 조화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 이러한 신분제 질서 자체를 그 역사적 맥락에서 떼어내어 오늘의 시점에서 무조건 봉건적이라고 부정할 필요도 없으며, 그 질서에 기반한 공자의 사상을 봉건적이라고 비난할 필요도 없다. 신분적 질서는 당시의 역사적 맥락에서 나름대로 '필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니 말이다. 여기서 문제는 두 가지이다. 이러한 가치의 신분 의존성이 성리학을 해석하는 근대적 해석학에서 대부분 은폐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해당하는 순수한 인격의 문제, 이기(理氣)·심·성을 중심으로 한 형이상학은 당시의 현실을 왜곡하는 가상이다. 동양에서 계속적으로 형성된 철학 혹은 문화의 탈정치화, 곧 탈정치화된 담론으로서의 유가 사상은 음모의 결과가 아닐까? 권력으로 작용하는 형이상학의 정체를 감추고 가리려는 음모. 그리고 그 권력을 유지하려는 다양한 이해관계에서 생긴 음모.

다른 문제는 무엇일까? 유가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이 지배자-군자의 성격에 대한 평가. 그 군자가 대표하고 대변한 가치는 어떤 성격을 지녔을까? 인과 예에 근거하는 한, 그 가치는 도덕주의의 성향을 띨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도덕주의는 어떤 성향인가? 흔히 그것을 동양적 인문주의의 시원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원한 곧 르쌍티망(Ressentiments)의 도덕이 아닐까?

3. 이제 서양문명의 대안으로 작동하는 다른 동양적인 것 하나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유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다양한 방향에서 환영을 받은 것. 특히 서양의 기술문명을 극복한다는 신과학, 그리고 서양의 근원적 근대성에서 이탈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해체론에 의해서까지 재발견되고 찬송 받은 것. 알다시피 그것은 도가(道家)이다. 여기서는 이 모든 관점을 다 살피는 대신 서양을 비판한다는 시도가 어떻게 도가를 동양 내부에서 구성하고 해석하는가를 분석해보기로 하자.

그 분석을 하기 앞서, 이런 역할을 떠맡기 전에 도가는 흔히 무엇으로 여겨졌는가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자의 텍스트에 꼭 맞는 해석인가는 차치하고서라도, 도가는 흔히 개인적인 은둔을 강조한 세계관이라고 알려졌었다. 무위자연도 많은 경우 이런 범주 아래에서 이해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도가는 유가적 수신제가치국과 직접 부딪치기보다는 그것과 피하거나 그것에서 조용히 도망가는 모습이었다. 집단적 훈육을 비웃는 태도로 보였다는 것은 도가가 비교적 개인적인 몸가짐의 차원을 주의를 기울인 것으로 해석되었다는 말이다. 곧 그것은 동양 내부에서도 사회적 대안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추구할 도망가고 피하기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것이 서양문화를 비판하는 대안으로 해서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이제 도가는 유가적인 가치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사회적 세계관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경향이 저 개인적인 태도의 차원에서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서양문명을 비판하는 기준이자 동시에 대안으로 떠오를 때 도가에게는 엄청난 역사적 지평이 부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가는 근원적으로 유가적 가치를 부정하고 그에 맞섰던 시원적 사상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유가가 규범적인 데 반하여 도가는 탈규범적이고, 유가가 정명론에 근거한다면 도가는 비명(非名)에 근거한다는 식이다. 심지어 서양에서 하이데거와 데리다를 거치면서 형성된 해체론적 작업을 노자 텍스트에 투사하는 시도까지 생겼다. 그에 따르면 노자의 도(道)는 우주론적 실체가 아니라 해체적 방법이라고 해석되었다. 도가는 동양의 해체론이요, 해체론은 서양의 도가라고 말해지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시도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서양에서 시작된 해체론적 작업의 의의까지 까먹는 일일 터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나 데리다의 해체론은 서양의 존재론을 그 근원에서부터 꼼꼼히 반복하면서 이루어진 작업이다. 모든 텍스트에 틈입하여 텍스트에 틈을 내고 균열을 내는 일. 그러나 노자의 텍스트가 그러한가? 도덕경은 그렇게 틈을 내는 텍스트에 못 미치는, 오천 자 남짓으로 이루어진 자기 암시적인 주장의 나열이다. 오천 자로 세상을 해체하고 텍스트를 해체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이야말로 어처구니없는 과대망상이 아닌가? 세상은 온통 텍스트가 아닌가? 어떻게 그것을 단 오천 자로 정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서양의 해체론은 역사의 뒤에서 그 역사를 상대로 이루어진 작업이다. 그에 비하면 '노자의 해체'는 동양의 역사 맨 앞에서, 역사를 예상하며 역사를 결정한 셈이다. 그것을 해체라 부를 수 있는가? 그것은 비대해진 해체 중심주의가 아닐까?

이렇게 도가를 서양의 대안으로 삼는 일은 이미 동양 내부에서 비-해체적 단순화의 대가를 치른다.

학문을 배우면 나날이 분별이 보태지고, 도를 닦으면 날마다 망상이 덜어진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마침내 무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니 아무 것도 하는 바가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도 없다. 따라서 천하를 취함에 있어서 항상 무욕으로 하지만 욕심으로 꾀하면 천하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而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故取天下 常而無事…, 48 장).

학문은 분별을 자행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배우는 일과 이렇게 단순하게 대립된 도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단순한 주장과 대립을 좋은 뜻의 해체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노자는 세상을 취하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해체적 관점에서 도가를 번역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런 정치적 치세술의 관점을 대개 은폐하고 가린다. 마치 노자의 도가 순수한 해체적 방법이기만 한 듯이 말이다. 이러한 탈정치화는, 앞의 유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지한 왜곡 아니면 음모의 결과이다. 동양의 지배계급은 그러한 탈-정치화된 노자 해석을 선호하고 더 나아가 널리 유포시켰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 서양문명의 대안으로 도가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탈 정치화의 정치를 맹목적으로 답습하는 듯하다.

장차 움츠러들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펴야 하고 약해지려고 하면 반드시 강해야 한다. 장차 쓰러지려고 하면 먼저 일어나야 하고, 빼앗으려고 하면 마땅히 보태주어야 한다. 이것을 미묘한 이치라 한다.
유약함은 강장함을 이기게 마련이므로 물고기는 연못의 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이로운 유약함이라는 통치법을 백성들로 하여금 보게 해서는 안 된다(國之利器 不可以示人, 36 장)

백성을 무지하게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만든 채로 다스리는 법. "백성의 마음을 비우게 하지만 그의 배는 채워 주고, 백성의 뜻은 약하게 하지만 그의 뼈를 단단하게 함으로써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무지하게 하고 무욕하게 하여 지혜를 가진 자가 감히 일을 도모하지 못하게 한다." 물론 이런 성인-왕의 치세술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닐 게다. 그것도 하나의 가능한 지배술일 것이다. 나쁜 일은 무엇인가? 도가를 동양의 영원한 지혜라고 일컫는 사람들뿐 아니라 서양문명의 대안으로 꼽는 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명백히 나와 있는 지배술이 알게 모르게 가려지는 일이다. 이런 절대군주적 지배술을 말하는 노자는 동양의 지배계급에 의해 백성들에게 자연스럽게 권장되었을 것이 아닌가? 여기서 다시 드러난다. 노자를 동양의 영원한 지혜와 서양의 대안으로 여기는 것은 아주 오래된 음모와 새로운 음모의 결합이라는 것이.

4. 여기 철학적인, 매우 철학적인 문제가 있다. 노자의 저 지배술은 어떤 성격을 가지는가? 흔히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그리고 해체주의적 해석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노자는 그저 아주 약한 것, 겨우 존재하는 것, 아주 낮은 데 있는 것을 옹호하지 않는다. 때로는 그런 것들을 호명하기는 하지만, 그 호명은 그것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위에서도 나왔듯이 장기적으로 세상을 취하고, 목적론적으로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목적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노자가 우주적 상징으로 내세우는 물에서 드러난다.

천하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게 없지만 강한 것을 꺾는 데에는 이보다 나은 게 없으니, 물은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드러움이 강장함을 이기고 약한 것이 센 것을 이기는 줄은 누구나 알지만 어느 누구도 행사하지 못한다(78 장).

노자는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강한 것을 꺾기 위해 부드러운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그리고 약한 것은 센 것을 이긴다고.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만 행사하지 못하는 데 다름 아닌 성인-왕이 그것을 활용하고 적용한다고.

물론 이렇게 약한 것이 센 것을 이기는 차원이 있고,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경우도 꽤 많다. 그리고 그것을 활동하는 것이 처세와 치세의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노자가 물의 상징을 빌려 말하듯이, 낮은 곳에 있고 미미한 것은 그 자체로 긍정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기고 지배하기 위하여 높이 평가된다면, 그런 현명함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현명함은 노회함과 음험함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왜 강하게 하면 좋지 않은가? 강한 것은 다시 강한 것을 유발하고, 사회적으로 적을 만드는 일이다. 노자의 무위는 적을 만들지 않으면서 교묘하게 다스리는 법이다. 노자가 말하는 암컷의 현묘함도 이런 최종적인 이기기의 목적 속에서 기획되고 계획되고 있다. 더 나아가 그토록 칭송되는 무위(無爲)조차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백성을 마음을 비우고 배만 채워주면 족하다는 구절은 끝부분을 읽어보자.

이와 같이 성인이 무위를 행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무위는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정치, 자연의 정치이다.

물의 현묘한 겸손은 은근하고 노회하기는 하다. 그러나 "최상의 선은 물과 같"기만 한 것일까? 지나치게 노회한 부드러움이 아닐까? 장기적으로는 물이 바위도 뚫고 불로 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는 다만 그런 장기적인 기획만이 유효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실천은 많은 경우 어쩔 수 없이 순간적이고 직접적인 힘의 표출을 요구하고, 때로는 그냥 이기지 않기로 끝나는 수도 많다. 때로는 불과 같이 타오르는 때도 있고, 때로는 흙처럼 질퍽하거나 푸석거릴 수도 있고, 때로는 그저 바람처럼 순간 속에서 명멸할 수도 있다. 이것들이 오히려 더 이름 없음에 가깝지 않은가?

5.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노자는 해체의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많은 경우 해체의 대상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해체론을 절대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노자가 해체 중심적으로 숭배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해체는 화려한 이름으로 남는 이론이 아니다. 차라리 끝없이 탈이 나고 또 탈을 내면서 이탈하기, 어쩔 수 없이 혹은 알면서 탈을 쓰고 또 탈을 쓰기, 곧 탈탈탈 거리기의 과정 속에서 존재할 뿐이다.

한 가지 점만 더 검토하자. 서양문명이 초래한 위험과 위기를 이야기하는 담론이 흔히 의존하는 노자의 이념이 있다. 자연. 그러나 나는 이 개념조차 해체론 혹은 환경 생태론의 이름을 빌려 가상화되고 있는 점이 많다고 여긴다.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자연은 소중한 이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노자는 앞에서 보았듯이 물로 상징되는 저절로 그러함만을 숭상한다. 상대를 앞에서 공격하지도 않고 적을 만들지도 않는 노회한 방법.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듦으로써 지배하는 방법.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은 백 배로 늘어나고 인을 끊고 의를 잊으면 백성은 다시 효성스럽고 자애로울 것이며, 기교를 끊고 지혜를 놓으면 도적이 없어질 것이다(絶聖棄智 民利白培,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絶智 盜賊無有, 19 장)

자연스러움의 극치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것은 원시적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이념조차도 이 상태에 있다. 물론 그 원시성이 나쁘지는 않고, 우리 모두 때대로 동경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때이다. 인간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관계를 순백으로 부정하고 비난하기 이한 이데올로기. 나는 오히려 말한다, 인간 문화는 이미 그 처음부터 위험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자연 상태가 중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못지 않게 문화는 쓸데없는 행위의 가벼움 속에서, 아니 가벼운 것만은 아닌 쓸데없는 행위의 무모한 열정 속에서 영위되고 있는 것이라고.

서양문명의 위기와 한달음에 노자의 자연을 말하는 사람들은 흔히 서양문명의 위기를 기술에서 찾는다. 특히 철학적인 담론은 기술의 과학주의뿐 아니라 그것 뒤의 존재론적 구조를 문제삼는다. 특히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기술론은 그러한 담론을 양산하는 경향이 있다. 기술이 초래하는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오로지 기술에 모든 책임을 묻는 그런 위기론이 매우 피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제스처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매우 상투적인 비판에 그치는 때도 많다. 자, 한 번 보자. 자본주의의 위험이 다만 기술에서 유발되는 것인가? 혹은 더 근본적으로 그 기술을 가능하게 하고 뒷받침하는 존재론적 망각 때문인가? 형이상학적인 담론이 공허해지기 쉬운 지점이다. 자본주의적 사회가 끊임없이 갈등을 유발하면서 생산력을 확대하는 괴물 같은 '자본'에 힘입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 사회가 자유와 정의와 평등을 구가하는 개인들의 욕망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억압받고 빼앗기는 층들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자유와 평등의 욕망을 실현하고 그 욕망에 제 영혼을 태우고 있다. 이 점을 망각하는 동양 대안론이야말로 공허하다.

동양적 해석학만이 허구적인가? 필자는 단순히 서양철학자의 자리에서 동양-대안론을 비판하자는 게 아니다. 서양 중심의 해석학도 마찬가지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과거의 해석학은 오늘을 위해 제한된 효과밖에 가지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를 가르는 단절이 있다. 시퍼렇고 시커먼 단절. 인문학 자체가 거기에 빠져 허둥거리고 휘청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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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리 2006-10-16 10:42:08
나는 철학한다라는 말은 철학이전에 있었던 본의와 철의 아닌가?
무엇때문에 분류 할려 하는가? 까불자...서로 까불어야 지금의 철학이 가벼울 수 있다.
가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