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02:05 (금)
善治 혹은 "길들이기"
善治 혹은 "길들이기"
  • 조남호 평화대학원대
  • 승인 2005.05.1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평_『율곡의 군주론』전세영 지음| 집문당 刊| 517쪽| 2005

과거 철학사상을 연구하는 학자에게 중요한 것은 항상 비판적인 연구태도를 가져야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현재의 쟁점에서나 과거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원칙일 것이다.  저자는 현재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이의 군주론을 원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이의 군주론이 사심없는 우국충정에서 나온 것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저자의 진단은 이이를 비판적으로 음미하기보다는 그를 절대적인 인물로 신격화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이의 신격화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이뤄졌다. 예를 들자면 이이가 가난해서, 죽을 때 장례지낼 돈이 없어서 친구들이 비용을 염출했다고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받아들이기 있는데 평자가 보기에 이이는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 이이는 대대로 명문가문이었다. 그리고 건국대 박물관과 율곡기념관에 가면 이이의 아버지가 죽고 난 뒤 이이 형제가 재산을 나눈 문서(분재기)가 있다. 이 문서를 보면 많은 재산이 이이에게 분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청렴을 과장하고 있는 이이의 일화들은 이이의 제자들이 자신의 스승을 높이기 위해서 이이의 청렴성을 과장한 결과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저자는 이이를 무반성적으로 완전히 신격화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며, 나름대로 이이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기는 하다. 그 예로 저자는 이이가 사대주의적 세계관을 가졌고, 소극적인 방위관을 주장했으며, 군정에서 경장을 반대하는 대목도 있고, 종실 작록의 세습을 주장하고, 이준경의 붕당 비판론을 오판했으며, 지폐제작을 반대한 대목 등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이이가 오히려 소극적인 방위관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왜구의 출몰에 대해서 실제적인 침략이 있을 때만 군대를 출동시키고 그렇지 않다면 뒤쫓지 말라고 하고 있는 점에서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십만양병설을 주장할 정도라면 적극적인 방위관을 제시했어야 한다. 이러한 지적은 십만양병설로 드러나지 않았던 이이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지적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로 평자는 십만양병설이 각기 사료에서 연도가 달리 나올 정도로, 학계 일각에서 그 주장이 의심받고 있다는 점도 언급하고 싶다.

▲율곡전서 ©
저자 논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이의 군주론을 비판적으로 음미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이의 군주론을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언로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이이는 언로의 확대를 통해 군주의 절대권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사고는 공자이래로 유가의 전통이다. 정치사상사적으로 보면 유가는 ‘관료-사대부-지식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철학이다. 유가 지식인은 군주와 백성들 사이에서 책임의식을 가지고 이들을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가 지식인이 위로는 군주의 독재정치를 제어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민생안정에 힘써야 한다는 식으로 나타났다. 군주는 독단적으로 힘과 무력에 의존한 정치를 할 우려가 있다. 이에 대해 유가 지식인들은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그리고 힘과 무력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정치를 주장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이성에 입각한 정치란 말과 대화에 따른 사고다. 그것이 곧 언로의 확대인 것이다. 그것은 곧 군주보다는 사대부들이 주체가 되는 정치다. 군주는 어디까지나 인위적인 정치를 할 필요가 없다. 가만히 앉아 있기(無爲)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는 군주의 힘을 최대한 약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군주를 유가적 이념으로 설득하는 일이야말로 유가 지식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이황의 ‘성학십도’는 이러한 사고를 형이상학이라는 틀로 보여준 것이라면, 이이의 ‘성학집요’는 ‘대학연의’에 입각해서 구체적인 방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선의 군주들은 유가 지식인들에 맞서서 왕권강화를 꾀하고자 했다. 선조는 특히 이이를 신임했다. 이는 당시 세력이 왕성한 동인을 제어하기 위한 정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이는 서인을 옹호하는 것으로 지목받는다. 선조는 이이의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임을 한다면 정책을 받아들여야 했으나, 선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선조와 이이가 서로를 비판하는 긴장관계는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단순히 이이의 직선적인 태도가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왕권강화라는 군주의 이념과 왕권제약이라는 유가 지식인의 이념의 충돌이 그런 긴장관계를 낳았던 것이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여서 군주들의 시도는 대부분 실패하거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대부 중심의 정치가 반드시 국가의 효율성이나 민생안정을 가져왔다고 볼 수 없다. 사대부 중심의 정치가 오히려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에만 힘써 끊임없는 당쟁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것은 곧 이이의 군주론이 가지는 한계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이이의 군주론은 ‘군주 길들이기’라고는 말할 수 있어도 저자의 진단처럼 ‘군주의 善治’를 기대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남호 /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 동양철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