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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주제별 발표…현상 속에서 추상적 개념 이끌어내
대중문화 주제별 발표…현상 속에서 추상적 개념 이끌어내
  • 강혜원
  • 승인 2005.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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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대학명강의: 윤진 아주대 강사의 ‘대중문화론’


강혜원 (아주대 2학년·경영학부)

1백명이 빼곡히 들어앉은 대단위 강의실. 구조주의 언어학자이며 현대사상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소쉬르의 얘기로 강의가 시작됐다. “소쉬르는 생전에 학위논문을 제외하곤 책을 내지 않은 학자로 유명하죠. 강의준비를 철저히 하고, 또 강의 후에는 강의 노트를 없앴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유일한 저서인 ‘일반언어학강의’는 제자들이 강의노트 등을 재구성해서 만들었다고 하네요. 나는 매 학기 비슷한 강의노트를 만들어 나눠줄 수밖에 없는 것이 조금 안타깝기도 하네요.” 조용히 듣고 있던 학생들은 맞추기라도 한 듯 미소를 짓는다. 교수님의 다소 과장된 몸짓과 말투에서 묻어나는 솔직함 그리고 특유의 위트 때문일 것이다.

이공계생 눈높이 맞추는 대중문화론

강의는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 진행되는데 우선 대중문화연구의 방법론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 수업으로, 강의노트를 중심으로 매 수업에 맞추어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론, 심리학 이론, 포스트모더니즘 이론 등 문화비판에 바탕이 되는 이론들을 개괄한다. 그리고 ‘대중문화’라고 하면 학생들이 자신과 맞닿아 있는 문화라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지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다루는 데는 익숙하지 않은 현실을 고려하여, 이 수업은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대중문화연구의 방법론을 실생활과 연관지어 체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실 매일매일 접하는 대중문화지만 여러 학문적 개념이 등장하고 또 마르크스, 프로이트, 벤야민, 보드리야르 등의 이름이 언급되기라도 하면 머리에 쥐가 나면서 바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요즘 우리 대학생들이다. 또한 타 대학들도 너나 할 것 없이 교양수업 중에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우리 학교의 특성상 이공계 학생들이 많다는 점 역시 수업의 방향을 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사실 이공계 학생들은 대중문화의 밑바탕이라 할 수 있는 디지털 문화의 기술적 바탕에 정통하면서도, 그것을 인간의 마음, 삶, 사회로 연결시키는 데 익숙하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일단 관심의 물고를 트기만 하면 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수업은 이론을 가능하면 가깝게, 구체적으로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문화적 현상들과 관계 지어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맥락에서 이론 수업과 병행하여 다양한 문화현상들에 관한 학생들의 프로젝트 결과를 발표한다. 학기 초 개인별 혹은 2인 1조로 희망 학생들에게 과제를 부여하여, 매 시간 한 가지 주제씩 발표한 후 질문과 토론을 통해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다. 교수님께서 30여개의 큰 주제를 제시하면 학생들이 마음에 드는 주제를 골라 소주제를 정해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얼마 전에는 ‘사회적 금기, 터부’란 주제를 택한 학생들이 ‘우리사회의 친일’이라는 소주제로 ‘맞아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이란 책을 펴내 논란이 된 조영남씨에 대해 발표를 했다. 당연히 ‘친일’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고, 책임을 동반한 사회적 다양성의 문제, 똘레랑스의 문제로 마무리되었다.

이외에 ‘멜로, 눈물의 카타르시스’라는 주제로 대중문화가 만들어내는 사랑의 판타지를, ‘명품과 키치(가짜)’라는 주제에서는 기능성보다는 이미지를 돈으로 사는 명품과 함께 경제적 문제보다 더 좋은 것을 따라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키치를 되돌아보며 소비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영화와 현실’이라는 주제로는 최근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들의 이데올로기를 짚어보았다. 그 외에도 시사 패러디, 스포츠, 대중음악, 인터넷 게임, 만화, 무협 판타지까지 대중문화 범주에 포함되는 모든 주제를 넘나들며 다양한 현상들을 의미 있게 짚어내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섣부른 대중문화 비판 지양

또한 학생들의 발표에서 섣부른 대중문화 비판이나 진부하고 공허한 개선방향, 나아가야 할 점 등은 최대한 배제한다. 일반적인 답을 주입하는 것은 자칫 삶 속에 자국을 남기지 않는 공허한 것이 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것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주제가 무한정이다 보니 학생들의 자유표현이 수월하고 그만큼 발표자에게 강한 동기부여가 되며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치던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수업의 가장 큰 장점이지만, 이렇게 광범위한 문화를 다루는 과정에서 주어진 문제에 대해 깊이 파고들 수 없다는 것이 약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수업은 각론들을 세분화해서 연구하는 대신, 기본적인 이론적 배경을 갖추고 보다 현실적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우리의 삶 속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문화 코드를 읽어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현대사회에서 대중문화의 각 부분들은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미 거부할 수 없는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서 남들이 하니까 그저 따라 한다는 생각 없는 문화향유를 지양하고 최소한 알고 제대로 즐기는 자세가 중요하다. ‘왜?’라는 질문에 ‘그냥’이라 대답하며 넘겨버리지 않을 정도의 판단 능력 말이다. 즐기는 자기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지성’의 자각이 쉽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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