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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진정한 우익은 있는가 /홍세화, 재불지식인
한국에 진정한 우익은 있는가 /홍세화, 재불지식인
  • 교수신문
  • 승인 2001.05.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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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와 맞서는 우익 없는 한국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지은이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로베르 위 공산당 당수와는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국민전선당의 장 마리 르팬 같은 극우 인물과는 절대로 상종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는 ‘우익(droite)’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재치 문답이 아니다. 실제가 그렇다.
프랑스의 우익이 극우를 단호하게 배척하는 이유는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진정한 우익이라면 당연히 극우 세력의 반민주적인 ‘배제의 논리’에 반대함으로써 민주주의 이념을 ‘보수’해야하기 때문이다. 둘은 좌우의 정치적 대결 구도에서 좌익보다 우익이 극우에게 표를 빼앗길 위험이 더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은 극우 세력이 우익의 표를 잠식하도록 유도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프랑스의 우익과 극우
프랑스 우익과 극우의 구분은 민주주의 원칙과, 나와 다른 사상을 용인하는 똘레랑스 정신을 지키는가 아닌가에 따른다. 이 구분에 의해 우익과 극우 사이의 골은 우익과 좌익 사이의 골보다 더 깊이 파인다. 곧, 보수와 극우의 사이가 보수와 진보의 사이보다 더 먼 것이다. 현실 정치에서 간혹 지방 권력을 잡기 위해 우익 인사가 극우의 표를 받는 경우가 있지만 그 우익 인사는 그 순간부터 우익으로서의 정치 생명을 끝내야 한다. ‘검은 광기’인 극우와 상종함으로써 민주주의 원칙과 똘레랑스 정신을 어겼다고 각종 언론으로부터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 하고 소속 정당의 제명 처분까지 감수해야 한다. 프랑스에서 우익이 극우와 상종하는 것을 ‘죽음의 키스’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이제 한국으로 눈을 돌려 보자. 진보정치 세력이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는, 그래서 국회에 의석 하나 없고 온통 자칭 보수나 우익이 차지하고 있는 한국에서 우익과 극우를 구분하지 않으면 한국의 정치사회상에 대한 몰이해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현실이 그러한 실정이다. 진보나 개혁을 주장하는 지식인들조차 극우 ‘조선일보’와 거리낌없이 상종할 만큼 극우에 대해 경계심은커녕 아예 무감각하지 않은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오랜 동안 한국 사회에 극우 헤게모니가 관철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극우는 스스로 극우라 칭하지 않는다. 한국의 극우가 보수 우익을 참칭 해온 궤적은 과거에 한 패였다가 지금은 다른 신세가 된 이근안과 정형근이 어느 정도 그려준다.
극우는 어디서나 ‘다름의 관계’를 ‘적대적 우열의 관계’로 환치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비열한 속성을 이용한다. “프랑스를 프랑스인에게“라는 구호가 말해주듯이 프랑스의 극우 세력은 ‘프랑스인-이주외국인’이라는 ‘다름의 관계’를 ‘적대적 우열의 관계’로 환치시켜 이주외국인에 대한 자국민의 적대적 우월 심리를 자극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 혐오-배제의 논리는 한국에서 극우반공주의와 지역주의로 그대로 재현된다. 즉, 지역주의가 ‘나와 다른 지역’이라는 ‘다름의 관계’를 ‘적대적 우열관계’로 환치시켜 다른 지역 출신을 ‘묻지마’ 식으로 혐오-배제하는 논리라면, 극우반공주의는 ‘좌경 딱지 붙이기’를 통해 혐오-배제의 논리를 관철시키는 것이다.
한국의 극우 세력은 냉전 상황에 편승해 이승만 정권이래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을 거치는 동안 정도의 차이가 있었으나 계속 주도권을 행사해왔다. 그들은 장장 반세기 동안 극우반공주의와 지역주의를 앞세워 합리적 토론을 거부해왔고 독재권력-정경유착-권언유착 등을 통해 사회 각 부문에서 힘의 논리를 관철시킴으로써 강고한 수구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 보수 우익은 극우와 싸우는 대신 극우 헤게모니의 우산 밑에서 기득권을 나누어 가지는 원죄를 저질렀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가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이에 항거했던 보수 우익은 과연 누구인가. 그들은 극우와 ‘죽음의 키스’를 했던 게 아니라 아예 한 몸이 되었다.

극우의 혐오-배제의 논리
따라서, 김대중 정부의 출현을 다만 ‘수평적 정권 교체’라고 부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놓치게 한다. 김대중 정부는 정치권력에서 처음으로 극우 헤게모니가 배제되었다는 정치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극우 헤게모니의 배제, 이것에 의해 실질적인 남북 대화가 가능했으며 전교조와 민노총이 합법화되었고 이근안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한나라당, 조선일보를 비롯한 족벌신문, 재벌 등 극우-수구 세력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주무기인 색깔론, 음모론, 지역주의를 총동원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 민병균 자유기업원장의 ‘시장 경제와 그 적들’은 이와 같은 극우-수구 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김대중 정부, 참여연대와 함께 민노총과 전교조를 ‘적’으로 지적한 것은 우연이 아니며, 그가 말한 ‘적’이란 곧 극우-수구 세력의 적을 뜻한다.
끝으로 덧붙이자. 한국에 우익이 너무 많아서 문제되는 게 아니다. 극우에 맞서 싸울 줄 아는 진정한 우익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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