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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함석헌[59] "타, 타, 타, 영원한 불길로 타오르고만 마는"
내가 본 함석헌[59] "타, 타, 타, 영원한 불길로 타오르고만 마는"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5.05.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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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 퍼져나가는 가지같이 그칠 줄 모르는 삶의 음악을/ 손에, 발에, 소리에, 얼굴에 넘쳐흐르게 하는 일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러나/ 한 맘을 묶어 정성껏 바친 한 사람을 위해/ 맘껏 일하다가 힘껏 싸워 죽을 수 있다면/ 그는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보다도/ 흘러가는 세상 물결 속에 흐르지 않는 사업을 쌓아/ 바위 위에 서서 죽는 등대지기같이 그 위에 서서 죽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그보다도 또/ 영원히 실현될 길 없는 이상의 맑은 불꽃을 안고/ 새파란 날개째 부나비 되어 그 안에 뛰어들어 타죽고 만다면/ 그것은 그것은 얼마나 눈물나는 일인가?

즐거움, 아름다움, 행복, 영광을 다 모르고/ 그저 타, 타, 타,  영원한 불길로 타오르고만 마는 그 일은/ 아, 그 일은 얼마나 눈물나게 거룩한 일인가?> (전집 6: 134)


위의 시는 선생님의 유일한 시집 <水平線 너머>에 수록되어 있는 <삶․죽음>이라는 제목의 시다. 정확하게 언제 이 시를 읊으셨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선생님이 50세 이전에 쓰신 것만은 확실하다. 어찌 보면 선생님의 사생관(死生觀)이 집약된 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때마침 최근에 모 일간지에 <한약재가 첨단과학을 만났을 때…>라는 제목 하에 재미 한국인 학자가 한약재에서 추출한 물질에서 항암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 내 미국의 암연구협회(AACR) 정기학회에서 발표하여 큰 주목을 끌었다는 기사를 읽은 바 있다. 소위 최근에 문제되고 있는 대체의학이라 할까? 소위 동양의학 특히 한국에서는 韓醫學이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사실에 필자는 주목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몇몇 유망한 과학자들이 한의학에 본격적인 도전장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필자는 알고 있다. 만약에 필자가 평생 나의 전공분야에 충실하게 몸담고 연구를 지속하였더라면 한번 도전하고 싶었던 분야이기도 하다.

여하튼 선생님을 모시고 침으로 소위 8상의학을 개척한 권도원선생이 한번의 진맥으로 담도에 이상이 있는 것 같으니 양방의학의 정확한 진단을 받아오면 한 번 치료해 보겠다는 말씀에 선생님의 연세로 보아 나는 가능하면 끔찍한 개복수술 보다는 한방으로 선생님의 병환을 다스려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선생님의 주변에 장기려 박사님이 계셨고 안병무 박사가 막무가내로 한방의학을 거부하고 있었으니 나로서도 나의 주장을 고집할 수 만은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개복수술을 받으셨다.

선생님의 병상일지라 할까? 박선균님이 정리해서 <씨알의 소리> 복간호 (1988년 12월) 권말에 실었던 것을 여기에 다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일지는 최근에 박선균님이 출간한 <씨알의 소리 이야기>라는 저서에도 소개되어 있다.


▲1987년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함 선생님과 함께 찍은 사진. ©

1987년 6월 29일에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시어 7월 13일에 담도종양제거수술을 받으시고 8월 14일에 퇴원하셨다가 8월 24일에 재입원 닷세 후인 8월 24일에 퇴원하셨다. 그러나 9월 4일에 다시 이번에는 백병원에 입원하셨다가 10월 5일 퇴원하셨다. 인촌 언론상 수상자로 수락해 주실 것을 김준엽 신일철 두 교수님과 내가 찾아 뵌 것은 이 기간 중이었다. 10월 12일에 인촌 언론상을 받으시고 1988년 새해에는 자택에서 세배를 받으셨다. 1월 6일에는 세브란스 병원 기도회에서 설교하시고 같은 날 <꿈틀거려라 씨알아>라는 말씀을 출판기념회에서 답사로 하셨다. 1월 10일에는 부산 장기려 박사님 모임에 가셨었는데 1월 21일에는 서울대 병원에 다시 입원 하셨다가 1월 29일에 퇴원하셨다. 1월 27일에는 입원 중임에도 김재준 목사님 1주기 추모예배에 참석하시어 추모의 말씀을 장장 50분 간이나 하셨다. 1월 30일에는 간디 추모 강연을 이윤구 박사와 같이 하나로 빌딩에서 가지셨고 2월 2일 부터는 선생님의 마지막 노자 모임을 다시 시작하셨다. 이 모임은 5월 8일까지 계속되었다. 2월 10일에 KBS 제 3방송의 <저자와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에 출연 유종호 교수와 대담하셨다. 2월 14일에는 부산모임에 가시고 3월 1일에는 태평교회에서 3․1절 기념강연 하시고 3월 11일에는 선생님 미수(88세 米壽) 모임에 참석하셨다가 답사를 하셨는데 그때 롱펠로우의 <인생찬가> (A Psalm of Life) 중에서 라는 절을 원문으로 암송하셨던 일은 나의 기억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3월 13일 유영모 선생님 추모강연을 흥사단에서 하셨고 3월 14일에는 조선일보에 김동길 박사와의 대담을 발표하셨고 3월 28일에는 의정부 재야단체 주최 모임에서 강연하시고 3월 30일에는 부산 동의대학에서 강연하시고 4월 4일에는 가톨릭 여학생회관에서 <좌절 속의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셨으며 4일 7일에는 KBS “11시에 만납시다”에 출연하셨고 4월 22일  KBS 제 3방송에서 <뜻으로 본 인류역사>라는 제목으로 70분씩 4회에 걸쳐 5월 8일까지 강연하셨다. 4월 28일에 롯데 호텔에서 인간교육개발원 주최강연회에서 <서양사상과 동양사상>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셨고 5월 10일에는 가정법률상담소 주최 모임에서 <동양사상의 흐름>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셨는데 하루 앞인 5월 9일에는 남강 기념문집의 발행사를 집필하셨다. 5월 13일에는 YMCA 사회개발부 주최 청소년 부모들에게 강연 약속을 하셨으나 당시 병세 악화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병세 호전되어 6월 13일에 퇴원하셨으나 다시 병세가 악화되어 8월 3일에 다시 입원, 8월 8일에 잠시 퇴원하셨다가 8월 12일에 다시 입원하시어 그 병상에서 임종을 맞이하시게 된다.


이제는 독자 여러분께서 내가 왜 이 글의 모두에 선생님의 <삶․죽음>이라는 시를 소개했는지 감지하셨으리라고 생각한다. <그저 타, 타, 타, 영원한 불길로 타오르고만 마는 그 일은/ 아, 그 일은 얼마나 눈물나게 거룩한 일인가?>라고 읊으신 그 시가 바로 선생님께서 마지막 임종의 병상에 누우실 때까지 일년 남짓한 시간의 삶을 가르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옆에서 뵙기에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선생님 스스로 당신의 몸을 그저 연소시키고 또 연소시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정말로 당신이 읆으신대로 얼마나 눈물나게 거룩한 일이였나! 라고 외치고 싶어지는 것이다.

확실한 날짜는 기억에 없으나 1987년 늦 가을이었다고 생각된다. 어느날 쌍문동 자택에서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었다. <씨알의 소리>지를 복간할 예정이라는 말씀과 더불어 <이 말은 김박사에게 처음 하는 소리니 그저 그리 알고만 계시오>라고 덧붙이시는 것이 아닌가. 40년 가까이 선생님을 모시면서 이런 말씀을 듣는 일은 처음이요 마지막이었다. 당시에는 그 말씀의 진의를 헤아리지 못한 채 그저 선생님 말씀대로 혼자만 알고 아무에게도 씨알의 소리지가 복간될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로 상당한 시간이 흘러도 다시 씨알의 소리지 복간에 관한 말씀은 없으셨다. 그래서 나도 거의 이 일을 잊고 있었는데 그 다음 해 4월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께서 씨알의 소리지 복간을 위한 편집회의를 하겠으니 장소를 알아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퇴계로 아스토리아 호텔 맞은 편 골목길에 위치하고 있었던 <가연>이라는 한정식 집에서 <씨알의 소리> 복간을 위한 모임을 4월 23일 오후 5시 반에 갖게 되었다.

그날 모임에서 새로 위촉된 편집 위원은 다음과 같다.

계훈제, 김경재, 김동길, 김용준, 김영호, 노명식, 법정, 송건호, 송기득, 안병무, 이태영, 조요한, 한승헌 (존칭생략) 이렇게 열 세분이었다. 전에 편집위원이 아니셨는데 이번에 새로 위촉된 편집위원이 김영호(인하대학 철학과 교수) 김경재(한신대 교수) 송기득(목원대 교수) 한승헌(변호사) 이렇게 네 분이었다.

이렇게 전의 편집위원보다 비교적 나이가 젊은 분들이 편집위원으로 위촉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당시 이 모임에 참석한 면면은 새로이 위촉된 편집위원 전원은 아니었다고 기억되지만 전에 편집위원이 아닌 젊은 면면이 참석하고 있던 것이 이채롭다면 이채로운 광경이었다. 그날 안병무 박사의 발언이 또한 의외였다. 이제 시대도 바뀌고 하였으니 씨알의 소리지도 젊은이들에게 맡기고 늙은이들은 제 2선으로 물러서는게 어떻냐라는 요지였다. 그래서 그 젊은이로 거명된 분들이 위에 새로 위촉된 네 분 이외에 몇 분이 더 있었다. 그 이름을 지금 다 기억하지는 않지만 남은 기억으로는 황석영 소설작가도 끼어 있었다. 이때 노명식 교수의 발언이 있었다. 이 잡지는 말하자면 함석헌 선생님의 개인 잡지인데 지금까지의 편집위원들이 아닌 젊은 사람들에게만 이 잡지의 편집을 전적으로 맡긴다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요지였다. 이 발언에 따라 토의한 결과 새로 구성된 것이 편집 소위원회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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