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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현대사회에서 공동체는 가능한가』(강대기 지음, 아카넷 刊)
[깊이읽기]『현대사회에서 공동체는 가능한가』(강대기 지음, 아카넷 刊)
  • 이세영 기자
  • 승인 2001.05.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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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30 16:02:36

사회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꽁트는 자신의 시대를 ‘모든 믿음과 확신의 근거가 사라진 무정부 상태’로 규정했다. 순진한 낙관론에 물들지 않은 지식인이라면 근대적 시장질서의 확대가 가져온 공동체 질서의 해체와 개인주의의 확산에서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당대에 미만한 해체적 징후에 대한 인식은 종종 과거에 대한 규범적 이상화나 구원에 대한 메시아주의적 열망과 결합되곤 했다.

베버적 비관주의와 소렐주의적 파국론에 심취했던 청년 루카치의 정신세계는 기실 20세기초 발흥했던 유럽 지식인 써클의 전형적인 지적 분위기를 표상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들이 소망했던 미래는 자신들의 근원적 과거와 맞닿아 있었다. 청년 루카치에게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전산업사회의 ‘게마인샤프트’에 대한 동경과 희구는 동시대 유럽 지식인들의 모든 정치적·미학적 실천을 추동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가 말해주듯, ‘공동체의 복원’이란 주제는 오늘날까지 지식인 사회의 뜨거운 쟁점으로 자리잡고 있다. 정보사회의 도래에서 게마인샤프트적 공동체의 부활을 예견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동일한 현상에서 ‘새로운 전체주의’의 징후를 판독해내는 비관론도 만만치 않은 만큼 속단은 금물이다. 과연 현대사회에서 공동체의 복원은 가능한가.

이 책은 제목부터가 ‘도발적’이다. 물론 제목의 도발성이 메시지의 참신함을 보증해 주는 경우란 흔치 않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여서 새로운 공동체의 건설과 관련된 저자의 전망은 철저하게 ‘양가성’이란 의미론적 범주에 의해 지배된다. 이것은 저자가 전통적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노력이 사실상 좌초할 수밖에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결코 중단돼서는 안 된다고 본다.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참다운 삶의 장을 마련하고자 하는 동기”라고 믿는 까닭이다. 어딘지 ‘패배가 운명처럼 예고되어 있을지라도 갈 길은 간다’는 식의 낯익은 독백을 연상시킨다. 물론 사회과학이 모든 윤리적(혹은 심미적)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렇다면 왜 공동체는 복원되어야 하는가. 이 근본적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 한, 전략적 구상이 아무리 치밀하다해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저자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공동체에 대한 욕구를 인간의 ‘본연의지’로 규정한 퇴니스의 논리에 의지한다. 퇴니스의 본연의지란 “시공을 초월한 인간의 기본욕구”를 가리키는 바, 저자는 결국 퇴니스의 진술에 근거해 공동체에 대한 ‘초월적 정당화’를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정당화는 이제 공동체에 대한 ‘윤리적 요청’, 다시 말해 공동체가 인간의 본연의지에 기초해 있는 한 공동체의 재건은 “시대적 과제”이자 “인간의 존재양식”이라는 논리로 나아간다. 이를 통해 공동체의 추구는 단순한 생래적 욕구의 차원을 넘어 ‘정언명령’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저자도 인정하듯 전통적 공동체(게마인샤프트)의 복원이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면, 공동체의 재건이 아무리 ‘시대적 요청’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저자는 공동체의 의미를 재규정함으로써 이 문제를 우회하고자 한다. 여기에 활용되는 것은 1950년대 중반 힐러리가 제시한 바 있는 공동체의 ‘이념형’이다. 이에 따르면 공동체는 △지리적 영역 △사회적 상호작용 △집합의식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구성되는데, 사회의 복잡성과 분화가 심화될수록 첫 번째 요소보다는 두 번째·세 번째 요소가 보다 본질적인 구성범주로 작동하게 된다. 힐러리의 시각을 계승하여 저자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상호작용의 시공간적 장벽이 빠른 속도로 극복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오직 상호간 연대의식의 형성이 진정한 공동체의 징표로 간주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공동체 형성의 구조적/제도적 요인들보다는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개인들의 동기’의 중요성에 주목한다.

공동체의 복원을 위한 저자의 전략은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가깝다. 이 같은 사실은 구조적 조건보다 “공동체의 이상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노력, 즉 참다운 자아실현을 위한 삶의 장을 마련하고자 하는 동기가 중요하다”는 저자의 진술에서도 확인된다. 문제는 공동체적 이상을 추구하는 행위자들의 동기가 결코 저절로 생겨나거나 강화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문제가 ‘교육을 통한 효과적인 사회화’(동기부여)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낙관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얼마나 효과적일까. 체제의 견고한 방벽 앞에서 한계를 절감한 개혁주의자들이 마지막으로 꺼내들던 카드가 다름 아닌 ‘교육을 통한 계몽’이었음을 우리의 역사는 또한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세영 기자 syle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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