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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비평: 강용석과 전영석의 사진예술
사진비평: 강용석과 전영석의 사진예술
  • 정주하 백제예술대
  • 승인 2005.04.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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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텝 늦춘 호흡의 비밀...삶에 정직하라

전용석, 채석장

이상하게도 사진은 사람들에게 특수한 대접을 받는 듯하다. 그렇게 많은 예술사진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고, 수없이 많은 사진 산업이 우리의 삶 사이를 오고갔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하나의 장르로 인식하지 않고, 단지 이미지의 전달 매체로만 이해하는 것을 지금 나는 본다. 때문에 어떠한 사진을 보더라도 그 사진이 가지는 내용선택의 시대적 흐름이나, 제작형식의 사용에 대한 변화와 답습에 대한 고찰은 매우 희귀하다. 때문에 사진을 보고 느끼는 관람자의 관심은 그저 그 안에 있는 이미지가 지금 자신에게 어떤 미적감흥을 주느냐와 조금 나아가 지금의 사회적 현상에 어떠한 맥락으로 다가오느냐에 대한 논의가 다소 있을 뿐이다. 이는 추측컨대, 사진을 사진이 지닌 문법적 통로를 거쳐 읽으려하지 않고, 단지 형상 이미지로써만 보려고 하는 데에서 기인한 것이라 생각한다. 사진을 독립된 매체로서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다. 혹은 사진을 언술 매체로써 학습해 본 경험이 부족한 탓이기도 하겠다.

사진을 이루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사진이 물질로써 인간의 시지각에 영향을 주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것이 바로 사진을 바르게 읽을 수 있게 하는 ‘문법적 요소’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터이다. 여기에는 이미지를 탑재한 인화지의 근본적인 성격과 그 안의 이미지가 지닌 톤과 콘트라스트가 있을 터이고, 카메라가 만들어 내는 시간성과 거리감, 포커스의 깊고 얕음, 그리고 본래의 사진이 가지는 扁瞞性 등이 있겠다. 물론 사진 안에 담겨진 사진가의 의식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이러한 문법적 통로를 통해 사진을 읽고 이해하려는 생각들을 만나기가 매우 어렵다. 회화에서 ‘마테리얼(Material)’이라는 용어가 작품해독으로써 의미를 가진 지 오래되었음에도 말이다.

잘 생각해보면 인간이 어떤 사물을 볼 수 있다는 말은 반만 맞는 말이다. 빛이 없으면 아무리 눈이 좋고 예민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물을 볼 수 없음이 이를 증명한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사물에 반사된 빛이 동공을 지나 각막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도 인간은 사물을 적확히 본 것은 아니다. 여전히 거꾸로 축소된 상을 각막이 쥐고 있을 뿐이며, 이 상을 시신경을 통해 뇌 속에서 다시 180도 회전 시뮬레이션 시켜보아야 비로소 사물의 바른 상태를 볼 수 있다. 결국 ‘보는’ 문제란 뇌 안에 축조되어진 정보와 관련되어 ‘인식’하는 것과 대단히 탄탄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모든 예술이 음악적인 것을 동경”한다는 것이 여전히 유효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사진은 그 음악적인 것을 거부하면서 대화를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우리가 어떤 사진을 단지 하나의 이미지로만 느낀다면 우리의 뇌가 지닌 능력을 표피적으로만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강용석의 사진은 매우 탁월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가 구사하고 있는 물질에 대한 ‘이해’는 그대로 ‘사진적’이다. 특히 흑백사진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파생하는 미적 규준을 자신이 재현해 보여주고 있는 대상의 사회적 맥락에 사진 문법적으로 잘 전화시키는 능력이 그에게는 있다. 예컨대, 우리 앞에 분단의 상징으로 놓여있는 민통선 부근의 저 돌덩어리(방호석)들을 그는 매우 밝은 톤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밝은 톤의 사진은 그 밝음이 이미지의 화사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잊고 싶은 기억이 하얗게 탈각되어질 때 느껴지는 밝음으로 재현된 듯이 보인다. 그렇게 읽혀진다. 때문에 그의 사진들 앞에서 한편으로는 ‘내’가 느끼는 시각의 중력을 더욱 가볍게 공중으로 부양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가벼움이 야기하는 힘이 대상이 가져다주는 무거운 시대성을 적어도 절반은 中和시킨다. 이것이 그가 우리를 유혹하는 문법이다. 뿐만 아니라 방호석 앞에 불에 끄슬리고 밑둥치가 잘려진 옥수수대를 교차하여 배치함으로 해서 언제고 지나갈 탱크의 캐터필더를 연상시키고 있다. 또 같은 시리즈의 다른 사진에서도 보이듯 대상들과는 언제나 비슷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이 그 대상의 시대/역사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있음을 시사한다. 드러내는 것으로써 만족하는 태도의 완곡한 발언이다. 이러한 방식의 표현은 민통선 안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둥근 파라볼라 안테나가 매우 어색하게 달려있는 슬레이트 지붕의 야트막한 집은 불시에 참호로 전환하기에는 턱없이 연약해 보이고, 그 앞에 두 손을 마주하고 다소곳이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 또한 더 왼쪽 뒤에 있는 비닐하우스의 색깔만큼이나 투명하게 보인다. 집 지붕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그 그림자의 톤이 밝게 처리된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인다. 이 모든 색(흑백으로써)의 분위기는 그래서 보는 우리로 하여금 저 ‘피할 수 없는 사실’을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동시에 그 사실이 투명해지기도 하고.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예로 전영석의 작업이 있다. 그의 사진이 보여주는 대상들은 모두가 파괴되어가는 자연이다. 대부분 돌과 관계가 있는 이 사진들은 나무로 뒤덮여 있는 산을 벗겨내고 그 안의 돌을 캐내는 채석장들이다. 인간의 적나라한 흠결을 보여주는 이러한 모습은 당연히 흉물스러워 마땅하다. 흉물스러운 대상에 다가가는 작가의 시선은 그러나 의외로 담담하다. 일단 대상으로부터 훨씬 먼 거리에서 지긋이 바라보는 시선의 선은 그대로 직선이다. 이는 그의 위치가 대상의 높이만큼 높아져있다는 뜻이다. 위로도 아래로도 카메라 앵글을 변화시키지 않고 바라보는 태도는 또한 중립적일 수밖에 없다. 흉물스럽고 대하기가 거친 대상을 담담하고 중립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태도는 그래서 역설적이다. 그리고 그가 역설적인 자신의 태도를 이해했던 그렇지 않던, 그의 사진이 보여주는 컬러(사진의 색깔과 작가의 특징을 나타내는 의미로써)는 밝고 연하다. 이 또한 역설적인데 적어도 노출을 한 스탭 이상을 오버하여 촬영했음직한 그의 컬러사진은 그래서 그 채석장이 발생하는 먼지를 머금은 듯 뿌연 공기감을 내포하고 있다. 그대로 대상에게 관람자의 시선을 유도하지 않고, 컬러의 톤이 일단 대상에게 향하는 시선의 일차적 거름 장치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사진을 대하는 우리는 지금 채석장에 그와 함께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되고, 그것이 착각임을 깨달을 때 그 허구를 장치해 놓은 작가의 솜씨를 깨닫는다.

정주하 백제예술대·사진가

필자는 독일 쾰른대에서 ‘순수사진’을 공부했으며, 사진작가와 평론가로 활동중이다. 주요 전시로 ‘서쪽 바다’(The West Sea, 2002), ‘땅의 소리’(Voices of the Earth, 1998), ‘탑골공원’(199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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