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는 정황인지도 모른다. 情은 그 뿌리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도사려 있는 것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도 눈물도 아니고 파르르 떨리는 몸부림도 아니기 때문이다.
동양의 문화는 마음의 문화다. 삶의 가치도 몸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찾았다. 우리 문화 속에서는 그 극치의 경지를 安貧樂道라고 하여 고상한 인격의 경지로 여겨왔다. 몸의 주인이 바로 마음(心者, 身之主)이기 때문이다.
情자는 설문해자에서 心자와 靑자로 형성된 글자라고 풀이하고 있다. 금문에서는 靑의 상부를 生자라고 하고 그 의미는 풀과 나무가 땅위로 나오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부인 丹자는 본래 巴越지방의 붉은 색 돌로 적색의 명칭(丹爲巴越之赤色, 意本赤色之名)이었는데 후에는 색 일반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됐다. 그러므로 靑자를 生자와 동의어로 보고, 사물이 나올 때의 색깔(靑生也, 象物生時色也) 혹은 초목이 나올 때 그 색깔은 청색이다(草木之生, 其色靑也)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상의 의미들을 종합해 보면 情자는 마음이 발할 때의 형색이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情자는 生자가 생기고 나서 거의 동시에 性자와 함께 쓰여 졌다고 한다. “성은 정을 낳고, 도는 정에서 시작한다.”(道始於情, 情生於性)는 말과 “정은 성에서 나오고, 예는 정에서 나온다.”(情生於性, 禮生於情)라는 등의 언설들은 동양문헌에서 통상적으로 접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은 자연으로부터 받아 태어난 것이고(性自天降) 정은 성으로부터 나온다(情生於性)는 사유는 동양에서 일찍부터 토착화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에서도 ‘性發爲情’이라고 하여 情을 씨인 性이 발아한 싹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性은 원리나 근본으로, 정은 작용이나 실천으로 보고, 씨는 순수한 선이지만 싹은 환경에 따라 선악의 여러 양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최영찬 / 전북대 중국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