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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_‘여자, 정혜’를 보고
문화비평_‘여자, 정혜’를 보고
  • 이병창 동아대
  • 승인 2005.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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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무게감이 주는 긴 여운

영화 ‘여자, 정혜’, 최근 우연히 이 영화를 보게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울림이 오래 남아서, 잊혀 지지 않는다. 정혜, 그녀는 행동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다. 어떤 충격으로 그녀에게 변신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녀는 과거로부터 단절되어, 마치 식물처럼 살아간다. 그녀는 직장인 우체국에서 거의 말도 없이 기계적으로 일할 뿐이다. 그 일들은 그저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일이어서, 굳이 정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집에선 항상 TV 화면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으며 한 밤중에도 홈쇼핑 방송을 틀어 놓는다. 새벽에 그녀를 깨울 수 있는 것은 기계적인 자명종 소리뿐이다.

그런데 기억에서 잊혀진 과거는 이미 그녀의 몸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기에 새벽, 자명종이 울릴 때 그녀의 눈은 이미 떠있다. 밤새 잠들지 못하는 불면증 환자처럼 말이다. 카메라는 이런 정혜를 바로 옆에서 들고 찍기로 비추어 준다. 흔들리면서 단편화된 화면들 사이로 그녀의 몸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어떤 웅얼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철학자 들뢰즈는 현대인은 행동능력을 상실하게 되면서 예민한 지각능력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전자가 합목적성의 논리에 따라 연속적으로 전개된다고 한다면 후자는 이미지, 즉 물질적 이미지의 흐름에 따른다. 여기서 이미지들은 자기의 무게를 지니고 그 울림에 의해 다른 이미지들과 공감한다. 전자가 공간화 된 시간의 연속적 전개를 보여준다면, 후자에서 시간의 생성하는 이미지, 즉 시간의 직접적 이미지가 출현한다. 여기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지각, 주관적인 이미지와 객관적인 이미지가 서로를 대면한다.

들뢰즈는 이런 생성하는 시간 이미지들을 1960년대 서구 누벨바그 영화들에서 발견했지만, 이제 우리는 영화 ‘여자, 정혜’에서 그런 이미지들을 다시 발견하다. ‘여자, 정혜’는 매우 모호한 영화다. 그러나 이 모호성은 관객인 우리가 정혜의 행동을 행동의 논리에 따라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영화를 들뢰즈가 말한 물질적인 이미지의 영화로 본다면, 우리는 여기서 투명하게 울리는 이미지들의 울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미지들의 물질적 흐름을 통해 정혜는 점차 몸 속 저 깊은 내면의 상처에게로 다가간다. 그것은 바로 어릴 때 고모부에게서 성폭행 당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정혜의 몸에 불면증으로 새겨져 있었으나 정혜 스스로 보고 싶지 않아하는 기억이다. 그러나 마침내 한 남자, 정혜와 마찬가지로 짓밟힌 남자, 자신도 어찌해야 될지를 몰라서 낯선 모텔의 침대에 앉아 울고 있는 남자, 그 이미지의 무게로 이제 정혜는 자기의 과거와 대면할 용기를 지니게 된다. 침대 곁에 서서 그 남자의 머리를 두 손으로 그리고 배로 감싸 안으면서, 정혜는 마침내 자신의 성폭행당한 장면을 상기한다. 정혜가 여기서 안고 있는 것은 한 남자의 머리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단절된 과거이다. 들뢰즈의 개념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시간의 직접적 이미지이다.

정혜가 이처럼 과거를 대면하면서, 이제 오랫동안 불면증으로 있던 내면의 웅얼거림이 정혜의 마음속에 분노의 감정으로 전환된다. 그리하여 정혜는 자신을 성폭행했던 고모부를 칼로 찌르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이런 전환은 정혜의 주체적 결단은 아니다. 그것은 칼날의 물질적 이미지 때문이다. 모텔에서 그 남자는 자신의 등산 가방에서 등산용 칼을 꺼내어 여러 번 그 칼로 자기의 손목을 긋는 시늉을 한다. 이 칼날의 흰 빛의 울림 때문에 정혜의 형체 없던 웅얼거림이 분노라는 형체를 얻었던 것이다.

그 다음 날, 여름 아침, 그 어둡고 푸른 나무 숲 벤치에 앉아, 정혜는 굳은 얼굴을 하고 긴장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가방 속에 칼을 집은 채로, 마침내 그녀를 성폭행했던 고모부를 찌를 순간을. 그러나 그녀 옆에 무게 없는 그림자 같이 다가와 앉아 있는 고모부를 결국 그녀는 용서하고 만다. 감독은 이 장면을 상당히 오랫동안 여백쇼트로 처리하면서, 매미소리를 사운드로 들려주는데, 결국 이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그 매미소리의 물질적 이미지가 정혜의 분노를 씻어 내렸다. 이렇게 자기와의 화해가 이루어지면서, 어떤 여자였던 정혜는 이제 고유명사 정혜로 불리게 된다.

이병창 / 동아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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