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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서평_『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김용준 지음| 돌베개 刊| 400쪽| 2005
본격서평_『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김용준 지음| 돌베개 刊| 400쪽| 2005
  • 김흡영 강남대
  • 승인 2005.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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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한 두 문화의 만남...추상적 형이상학 느낌도

과학과 종교사이의 가교를 놓은 ‘한국 최초의 사상가’로 존경받는 원로 학자 김용준 교수가 그 개념적 지도를 그린 기념비적 작품을 내놓았다. 그가 지난 40년 동안 자연과학과 신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천착한 연구들을 정리한 4백쪽에 이르는 방대한 역작이다. 그동안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이루어진 담론들을 자상하게 해설한 귀중한 정보들과 자료들로 꽉차있어서 취약한 이 분야를 위한 친절한 안내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인간과 과학’에서 저자는 실존적 인간을 사색한다. 젊은 날 그의 휴머니즘과 로맨티시즘이 물씬 풍겨지는 대목이다. ‘사색하는 과학자로서 인간의 실존’, 그것이 지금까지 그를 사로잡아왔고, 또한 고뇌케 한 화두였으며, 이 책이 나오게 된 동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고전적 문헌을 들추며 집요하게 그 해답을 추적한다. 이를 위해 인류고고학, 동물행동학,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닐스 보어, 노엄 촘스키, 자크 모노, 그리고 특히 루돌프 불트만, 마르틴 하이데거, 한스-게오르크 가다머에 주목한다. 과학자이면서도 과학은 하나의 방법론에 불과하다는 해석학적 비판을 겸손하게 수용한다. 그러면서도 결코 두 세계를 연결시키는 ‘실존적 해후’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등의 모든 개념이 인간문화의 한줄기에서” 나왔다는 잠정적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과학과 종교의 두 영역을 함께 이해할 수 있는 공통 언어의 발견, 나아가서 그 둘을 통합하는 새로운 언어의 탐구에 목표를 둔다. 

제2부 ‘과학과 기독교’에서 저자는 자신의 종교인 기독교를 분석한다. 그는 두 가지의 모태신앙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첫째는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기독교요, 둘째는 그의 천직인 과학이다. 그는 이 두 모태신앙들 사이에 연결고리를 찾아 나선다. 종교개혁전통(청교도정신)이 과학혁명의 모태였다는 막스 베버-유진 클라렌의 이론에 고무된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가능케 한 것은 케플러와 보일이 보여준 것처럼 기독교가 ‘구원의 종교’에서 ‘창조의 종교’로 패러다임 변환을 이행했기 때문이라고 조심스럽게 설명해본다. 찰스 다윈, 모노, 리처드 도킨스, 에드워드 윌슨, 나일즈 엘드리지, 대니얼 데넷, 마이클 비히 등이 주도했던 진화론 논쟁을 섭렵하면서, 스티븐 호킹, 빌렘 드레스, 폴 데이비스 등이 제시한 인간원리를 살펴본다. 특히 종교를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라고 주장한 랠프 버후의 과학신학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고뇌하는 인간 루터’와 종교개혁 사상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면서도 칼뱅을 언급하지 않는 점이 흥미롭다. 청교도정신과 창조신학을 선호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루터보다는 칼뱅이 중요할 터인데도 말이다. 칼뱅적 로고스보다는 루터적 파토스를 좋아하는 내면적 성향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제3부 ‘몸과 마음’에서 저자는 종교와 과학에 대한 실마리를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인지과학과 뇌과학에서 찾고자한다. 몸과 마음의 문제는 바로 과학과 종교의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심신이원론보다는 김재권의 심신수반론과 환원적 물리주의에 관심을 쏟는다. 그러면서도 마크 존슨과 조지 레이코프의 체험주의(신체화)와 제널드 에델만과 언토니오 다마지오의 의식과 자아 형성과정에 대한 이론에 심취한다. ‘나’라는 느낌의 신비, 하나님 모듈의 가능성을 기뻐하면서도 지나친 신비주의는 함석헌과 함께 윤리적 이유로 배격한다. “과학은 사고를 위한 언어”라는 견해를 옹호하면서 언어가 생물학적 능력이라는데 동의한다. 문법유전자, 스티븐 핀커의 멘탈리스(정신어), 최초의 언어(바벨탑 사건)와 사투리에 대한 비교는 흥미롭다. 몸과 마음의 문제는 이성과 감성, 결국 의식과 감각질의 문제로 귀착된다. “자아란 반복적으로 재구성되는 생물학적 상태”이고 이 자아는 개체들 사이에 ‘설명적 간극’을 유발한다. 그것의 원인인 “외부세계에 대한 주관적 느낌”을 감각질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의 인간론은 흔들린다. 그동안 간직했던 하이데거, 가다머, 촘스키 류의 초월적, 초과학적 인간론이 한계에 부딪친다. 오히려 인간은 물리주의로 설명이 가능한 생물체, 곧 감각질이라는 독특성을 가진 영장류의 한 종이라는 사실이 중요해진다. 

제4부에서 저자는 마침내 과학과 종교의 융합모형으로서 진화신학을 제시한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홈즈 롤스톤 3세, 존 호트, 한스 요나스의 신학에서 그 패러다임을 모색한다. 특히 롤스톤의 ‘고난과 창조’론에 대한 해설은 감동적이고 신학적 심오성이 엿보인다. 또한 그는 마이클 루스의 다윈주위적 기독교 변증에 매료된다. 그러나 자신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과학과 종교 사이”가 노출된다. 루스의 논리와 이성의 신과 롤스톤과 호트의 고난과 케노시스의 신 사이에는 간극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고난의 하나님, 종말론적 소망을 위해 무한한 개방성을 가진 신론이 대미를 장식한다.

본서는 난해한 과학과 신학분야를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개념적 지도’를 그려주고 있어,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후학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옥의 티라 할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개념적 지도에서 그의 실존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동양종교문화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자아와 사투리간의 긴밀한 관계를 이론적으로 옹호하면서도 막상 그 자신은 자기의 사유적 사투리(존재의 제소리)를 무시하는 자기모순에 빠져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와 과학 담론의 자기 신체화를 실천하기보다는 서구의 철학?신학적 언어에서 보편문법을 찾으려는 형이상학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이점은 앞으로 이 분야의 2세대 학자들의 학문방향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다. 탈식민주의비평, 오리엔탈리즘 등에 의해 서구학문 속에 포장되어 있는 문화제국주의가 명확히 폭로되어왔다. 더욱이 종교와 과학의 담론이 유럽우월주의의 낭만적 환상을 버리지 못한 학자들에 의해 농락당할 가능성이 크다. 이 책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판넨베르크와 루스는 솔직히 말해서 유럽식 영광과 지배를 포기하지 못한 서구적 사고방식의 소유자들로 보인다. 유럽신학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칭해지는 전자는 이제는 낡은 유럽식 패러다임의 신학을 고집하고 있고, 후자에게서는 서구기독교문화 외에는 무지한 세계화가 덜 된 백인남성의 한계를 발견한다.

앞으로 한국에서 종교와 과학의 담론은 비록 부족하더라도 주체성을 갖고서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단지 서구 담론의 번역 또는 번안정도의 학문으로서 끝낸다면 한국의 종교와 과학은 여전히 서구 담론의 아류로서 종속적 경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과학과 종교의 딜레마는 결국 서구기독교 신학과 현대과학 사이에 가로놓인 이원론적 간극에 기인하며, 따라서 오히려 한국학자들이 동양종교사상적 대안을 가지고 이 분리를 극복할 수 있다. 앞으로 “틀려도 좋으니 맘껏 한번 해보라”는 원로의 말이 듣고 싶다.

김흡영 / 강남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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